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45
폭스가 올려 막은 검마저 잘라 버리고 몸통을 수직으로 쪼갠 뒤에야 대검이 멈췄다.
세상이 멈춘 듯한 정적.
폭스의 몸이 좌우로 쓰러지면서 털썩 소리를 내자 마을 사람들이 그제야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혼자서 도적단 12명을 베어 버렸다.
완전히 망해서 뜯어 먹을 풀 한 포기조차 없는 마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고수였다.
“헉! 헉!”
리안은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후련함을 느꼈으나 아무리 떠올려 봐도 조금 전의 자세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체 뭐냔 말이야…….’
검을 갈무리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실비아와 리즈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긴 건가?’
아니, 살아남았다.
행운에 행운이 겹쳐서, 요행에 요행이 겹쳐서 살아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아…….”
리안과 눈을 마주친 실비아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을 내뱉고 말았다.
세상의 모든 번뇌를 짊어지고 있는 듯한 눈동자였다.
하지만 리안은 동정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사방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살폈다.
‘저질러 버렸구나.’
제 몸 하나 간수하지 못하는 주제에, 또다시 오지랖을 떨고 말았다.
“시체를 치우십시오.”
리안이 아마도 듣고 있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책임지고 싶지 않다면 그게 좋을 겁니다.”
누구도 오늘의 사태를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기에 리안의 설명도 길어질 이유가 없었다.
“들어가죠. 자세한 얘기를 해 주십시오.”
리안이 그렇게 말하고 집으로 먼저 발길을 돌리자 퍼뜩 정신을 차린 실비아가 뒤따라 들어갔다.
반면에 리즈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문 채 리안이 만든 참혹한 현장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 오빠…… 진짜 강하잖아?”
무명의 검사 (3)
리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리안과 실비아는 얘기 중이었다.
리안이 들은 바에 의하면 붉은창 도적단의 간부들은 대부분 바이덴 왕국에 속한 패잔병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단장은 국경 주둔지에 근무했던 페이컨이라는 40대 중반의 남성으로, 국경이 밀리기 전에는 보병 대대장의 직위에 있던 인물이었다.
‘보병대의 대대장이라.’
전쟁터를 숱하게 돌아다닌 리안은 이름만 듣고서도 페이컨의 무위를 가늠할 수 있었다.
왕국의 수도라면 모를까, 전쟁이 치열한 접전 지대에서 계급은 곧 실력의 척도가 된다.
특히나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국경 지대의 대대장이라면 실력 이외의 것은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흠, 그런 자가 어째서 도적단을?”
“알 수 없지요. 지친 것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사정이 있을 수도…….”
실비아는 잠시 갈등하다가 진심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결국 인간이란 그런 게 아니겠어요?”
리안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설득당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저 인간이기 때문에, 조금 더 나은 길을 찾아 악을 선택하는 것이다.
“붉은창 페이컨은 적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에요. 그렇기에 바이덴 치안대도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들은 이곳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아치 산에 터를 잡고 근처 마을을 수탈하면서 세력을 넓히고 있어요.”
리안이 베어 버린 폭스 또한 실비아가 말한 세력 확장의 한 부분이었다.
“아치 산이라…….”
“오빠.”
리즈가 다가오자 뒤늦게 깨달은 리안이 사과했다.
“미안하다. 흉악한 꼴을 보이고 말았구나.”
“괜찮아요. 별로 안 놀랐어요.”
시체를 보고 기분이 좋을 수는 없으나 그것도 매일같이 보다 보면 그저 바퀴벌레 정도의 혐오감만 들 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오빠, 되게 유명한 사람이죠? 진짜 이름을 밝히면 사람들이 몰려들까 봐 거짓말한 거죠?”
“아니. 내 이름은 리안이다. 그리고 유명하지도 않아. 도적들이 약했을 뿐이야. 결코 내가 강해서 이긴 게 아니다.”
리즈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우린…… 그 약한 도적들한테도 당하고 살아요.”
리안이 해 줄 말은 없었다.
약한 것은 죄가 아니지만 전쟁터에서는 그런 말도 허울뿐인 이상에 불과했다.
“조금 쉬고 싶은데요.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아서.”
리안은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실비아가 굳게 닫힌 문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리즈가 품에 안기며 물었다.
“엄마, 오빠가 떠나 버리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
“리즈, 타인에게 많은 걸 바라는 건 나쁜 짓이야. 오빠는 우리를 구해 주었잖니.”
“하지만 이제 싫어.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고통 속에 머물고 싶은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실비아는 아직 어린 딸에게 냉혹한 현실을 말해 줄 수 없었다.
세상을 살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경험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해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소싯적에는 그녀도 삶이란 이런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게 정답이다 등 많은 말들을 떠벌리고 다녔으나, 그것을 직접 당했을 때 자신이 내뱉었던 말과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갖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리즈, 너도 살아 보면 알게 될 거야. 아무도 너를 완벽하게 이해해 줄 수 없어. 하지만 엄마가 있잖니. 엄마가 너를 지켜 줄 거야.”
“난 엄마가 나를 지켜 주는 거 싫어. 누군가가 엄마를 지켜 줬으면 좋겠어.”
실비아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것 또한 어린아이가 가질 수 있는 공포일 터였다.
“엄마가 한번 말을 해 볼게.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도 엄마는 언제나 네 편이란다.”
실비아는 리즈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밤이 깊도록 리안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침을 먹은 뒤로 끼니를 걸렀지만 굶주림마저 잊을 만큼 막중한 부담감이 그의 어깨에 내려앉아 있었다.
‘붉은창 페이컨. 대대장이라고?’
오젠트 가문에서 형과 대결을 했을 당시 오젠트 라이는 8급 하사관이었다.
물론 리안이 아는 라이는 천재였기에 페이컨의 나이가 되었을 때 고작 대대장이나 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단지 현재 실력만으로 비교하자면 라이를 상회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내가…… 벨 수 있을까?’
실비아의 말에 의하면 붉은창 도적단의 간부들은 7명.
그중에 폭스를 포함해 부단장만 3명이었으니 예하 부대원의 수는 못해도 세 자릿수가 넘어갈 게 확실했다.
그들 모두와 싸워야 한다.
왕국 치안대조차 포기해 버린 도적단을 혼자서 상대해야 하는 것이다.
‘죽겠지.’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굳이 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관철시킬 수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모르겠다, 시로네.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똑똑.
리안이 번뇌의 밤을 지새우는 와중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비아예요.”
“들어오시죠.”
실비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누운 흔적도 없이 침대에 앉아 있는 리안의 모습을 보자 조금 안심한 낯빛으로 의자에 앉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도움을 받아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저와 제 딸의 은인이세요.”
리안은 기사 수행의 여정을 돌아보았다.
그에게 은인이라는 말을 썼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은 결국 리안을 원수라고 칭했다.
책임이란 그런 것이다.
“저를 위해 싸운 것뿐입니다. 어차피 도적단은 저를 죽였을 테니까요.”
실비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견디지 못한 리안이 먼저 솔직하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저 혼자서는 도적단을 상대할 수 없습니다. 국경 치안대도 손을 놓았고,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이 나서지도 않을 테니까요.”
“면목이 없네요. 예전부터 삭막한 곳은 아니었어요.”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이미 죽었거나 도적단에 붙어 버린 게 문제였다.
“아침에 떠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기사님에게 도적단을 궤멸시켜 달라고 부탁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면?”
리안이 고개를 들자 실비아가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리즈의 아버지가 되어 주실 수 있나요?”
리안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만큼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죄송해요. 나이 서른셋에 차마 결혼이라는 말은 입에 담을 수 없어서 딸아이를 팔았네요. 하지만 진심이에요. 물론 평생 곁에 있어 달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5년, 아니 3년만이라도, 리즈가 이곳을 떠나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곁에 있어 주면 안 되나요?”
리안은 가슴이 턱 막혔다.
제안을 거절한다면 자신은 또다시 리즈의 인생을 망친 원수가 될까?
“좋은 아내가 될게요.”
침묵이 길어지자 실비아는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숙이더니 옷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남편의 친구인 폭스에게 의탁하기란 죽기보다 싫었던 일.
하지만 그 정도로 역겹지만 않다면야, 여자 혼자 딸을 지키기 위해 포기할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리안이 단호하게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실비아의 부끄러운 손길이 우뚝 멈췄다.
단지 하룻밤을 보내고 떠나 버리는 자들도 부지기수였기에 여기까지는 그녀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는 제 마음을 돌리지 못할 겁니다.”
“그렇군요.”
실비아는 옷깃을 여미고 일어섰다.
더 이상 줄 수 있는 게 없기에 요구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감사했어요. 폭스는…… 정말로 원수 같은 작자였죠. 음식을 좀 싸 둘 테니 아침에 가지고 가세요.”
마주쳐 봤자 서로 간에 부끄러울 뿐이기에 실비아는 그렇게 리안을 배려하고 방을 나섰다.
다시금 정적이 찾아오고 달빛이 창가를 통해 들어왔다.
리안은 번뇌에 잠겨 남은 시간을 보냈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이 기준 없이 흘러갔다.
동이 틀 무렵 리안의 혼란스러운 눈빛도 점차 안정을 되찾아 갔다.
대검을 등에 맨 가죽 검집에 꽂고 문을 나서자 실비아가 미리 준비해 둔 음식 보따리가 있었다.
리안은 모녀가 자고 있는 방을 잠시 돌아보았다.
“…….”
그리고 어느 것도 손대지 않고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리프네 마을로 돌아올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리안이 떠나고 1시간 뒤, 실비아의 집은 리즈의 울음소리로 떠나갈 듯 시끄러웠다.
“엄마! 오빠가 가 버렸어! 우리를 버려두고 가 버렸다고!”
“아니야, 리즈. 오빠는 자신의 길을 간 거야.”
“으아아앙!”
어린 마음에도 조금이나마 세상을 이해한 것인지, 리즈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저 울기만 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말씀 좀 묻겠습니다.”
실비아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문을 빼꼼 열고 밖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문턱 끝까지 올렸다.
평균적인 인간의 규격에서 벗어난 신체.
키가 2미터가 넘었고, 어깨는 문에 끼일 정도였다.
그녀의 경험상 이런 부류는 언제나 검을 다뤘다.
허리를 숙인 남자가 얼굴을 불쑥 내밀자 실비아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고구마처럼 긴 얼굴에 속눈썹이 진하고, 말코 아래로 가느다란 콧수염이 삐죽거리며 자라 있었다.
“아,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들어가도……?”
실비아가 리즈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남자가 양해를 구하지 않고 집으로 쳐들어오자 그의 가슴께에나 미칠까 싶은 종자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종자도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흑철 갑옷을 입고 장인이 세밀하게 조각한 철검을 차고 있는 남자에 비하면 난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코를 킁킁거리며 의미 모를 행동을 하던 남자가 마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문에 듣기로 며칠 전에 이 마을에 파란 머리에 대도를 찬 기사가 왔다고 하던데, 혹시 보셨습니까?”
파란 머리에 대도라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아뇨. 그런 사람 몰라요. 나가 주세요.”
“흐음, 그렇습니까?”
남자는 테이블 의자를 꺼내 들고 우직하니 앉았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모녀에게는 위압감으로 전해져 왔다.
“소개가 늦었군요. 기사 수행자 람다스라고 합니다. 저 먼 나라에서 관직을 맡고 있다가 늦바람이 들어 정처 없이 떠돌고 있지요.”
람다스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구구절절 꺼냈다.
“그러다가 바람결에 어떤 소문을 들었지요. 푸른 머리의, 대검을 찬 젊은 검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사람 모른다고 했잖아요!”
“네. 그리 유명한 인물은 못 되지요. 하지만 저는 명성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그 젊은 검사의 행보가 유독 제 흥미를 돋운단 말이지요.”
실비아는 포기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 청년이 베어 버린 시체, 물론 중구난방 얻어걸린 것도 있겠습니다만, 어떤 시체들에는 일관된 면이 있습니다. 바로 호쾌함!”
람다스가 쾅 하고 테이블을 내리치자 모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모든 것이 일 검에 끝났다고 하지요. 말이든, 갑옷이든, 방패든, 무기든, 전부 다 무시하고 베어 버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