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48
리안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람다스가 검을 휘돌린 다음 다시 자세를 취했다.
“뭐 하고 있어? 어서 덤벼. 설마 뭘 하는 건지도 모르고 죽기를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기사 수행 중에 일기토가 들어오는 경우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현재 리안은 120명의 도적단을 궤멸시킨 참이었고 디나이의 여파도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아니었다.
“물론 알고 있지.”
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람다스에게 돌아섰다.
그렇게 두 검사는 20미터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검보다 훨씬 먼 간격이었으나 스키마의 이동속도를 생각한다면 결코 멀다고 할 수 없는 거리였다.
‘와라. 너의 실체를 까발려 주지.’
람다스가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리안의 모습이 사라졌다.
사고의 영역에서 수평의 섬광이 무한히 길어지는 것만이 보이는 전부였다.
3차원으로 이루어진 람다스의 몸을 2차원으로 그어 버린 듯 허리와 손목, 흑철로 만든 검이 같은 경도에서 잘려 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
종자는 종이에 한 글자도 옮기지 못한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천천히 뒤로 돌아서자 대검을 든 손을 쭉 뻗고 있는 리안이 산을 내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퍼퍼퍼펑!
리안의 어깨부터 손목까지 근육이 터지면서 뼈가 드러났으나, 손가락은 여전히 대검을 움켜쥐고 있었다.
-스밀레. 스밀레.
오른팔의 근육들이 다시 연결되는 것을 느끼며 리안은 종자의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강해질 것이다.
세상의 끝에 오를 것이다.
‘거기가 바로 네 옆자리일 테니까. 그렇지, 시로네?’
리안이 완전히 모습을 감춘 뒤에야 종자는 입에 한가득 고인 침을 꿀꺽 넘겼다.
10년을 모신 주인이 사망했으나 애도의 감정보다는 감동이 먼저 밀려들었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떨리는 손을 따라 흔들리는 펜촉이 종이 위를 천천히 스쳐 지나갔다.
마하의 기사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
새로운 계약 (1)
갈리앙트 섬에서 34킬로미터 떨어진 바다 위에는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섬 하나가 있다.
40년 넘게 배를 탄 늙은 어부들만이 알고 있는 이 ‘백도’라 불리는 섬은, 오래전에 어떤 기관이 갈리앙트 자치 지구로부터 거금을 주고 사유화시킨 섬이었다.
그리고 현재 그 백도에, 상아탑 관리인 중의 1명인 케이라가 상부의 명을 기다리며 근신하고 있었다.
천해의 풍경은 미지로 가득했다.
독자적으로 진화한 수많은 동식물들과, 피리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구관조들까지.
케이라는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는 곳에 지어진 오두막에서 이른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촐한 식사였지만 항상 업무에 찌들어 살았던 그녀에게는 참으로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맛있는 냄새네. 토끼 스튜인가?”
국자를 젓는 케이라의 손이 우뚝 멈췄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지만 목소리만으로 충분했다.
아르민이 웃으며 말했다.
“뭐야? 설마 문전박대야?”
하지만 케이라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듯 다시 국자를 휘젓는 일에 열중했다.
“……화 풀리면 다시 올게.”
아르민이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케이라가 신경질적으로 국자를 집어 던졌다.
탕 소리를 내며 국자가 바닥을 뒹굴고, 눈물을 흘리는 케이라가 온 힘을 다해 달려와 아르민에게 안겼다.
“나쁜 자식! 죽은 줄 알았잖아! 진짜로……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
아르민은 케이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돌아왔어. 약속대로.”
눈물로 범벅이 된 케이라가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완전히 돌아온 거야? 일단 앉아. 배고프지?”
식사를 준비하는 분주한 손길만큼이나 그녀의 입은 쉴 틈이 없었다.
“협정 서약을 찢은 덕분에 징계를 받았어. 일단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지내라고. 그래도 기다린 보람이 있네. 아, 아침 먹고 바로 상아탑으로 가자. 보고해야지.”
“아니, 케이라. 나는 상아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케이라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할 일이 있어. 당분간 새로운 팀에서 활동하게 될 것 같아. 너라면 이해할 거야.”
“이해? 죽었으면 모를까 살아 돌아온 이상 상아탑의 감시를 피할 수는 없어.”
“물론 그렇지. 하지만 아마도 괜찮을 거야. 상아탑도 이번만큼은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새로운 팀은 또 뭐고?”
“우선, 아침부터 먹자고. 설명해 주지.”
아르민은 한껏 여유를 부리며 식탁에 앉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긴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 *
토르미아 왕국 수도 바슈카.
카이젠 검술학교로 돌아온 쿠안은 많지도 않은 짐을 가방 하나에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고르는 눈빛이 여느 때보다 신중했으나 어느 것을 들어도 성에 차지 않았다.
‘소매를 잘라야 하나? 아니면 이대로 두는 게 좋은가?’
그때 문이 왈칵 열리면서 째질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미친놈아!”
검술학교의 서저리인 키요라 엘리스였다.
“왔냐?”
쿠안은 짧게 인사하고 다시 거울을 돌아보았다.
“뭐? 왔냐? 그래, 왔다, 이 자식아! 네가 오늘 낸 사직서. 이거 철회하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무단으로 학교 수업에 불참한 쿠안은 당연히 해직으로 처리가 되었으나 엘리스가 힘을 써서 유보시켰다.
그런 그녀였으니 쿠안이 복귀했을 때 느낀 감정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돌아왔다.
다리를 저는 것도 모자라 팔 하나가 사라져서.
특히나 신경 접합 분야의 서저리인 그녀였으니 아끼는 친구가 매번 이런 꼴을 당하는 것에 억장이 무너졌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안은 마치 오래 묵은 쓰레기를 내다 버리고 온 것처럼 후련한 반응이었다.
“철회를 왜 시켜? 기껏 잠 안 자고 시간 내서 썼더니. 다시 돌려주고 와.”
“아우, 씨!”
엘리스는 사직서를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학교를 떠날 거면 이딴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너 도대체 왜 그래? 방학 동안만이라도 학교에 있으면서 생각하면 되잖아! 유급휴가라고!”
“새로 직장 구했어. 그리고 어차피 교사가 될 수도 없어. 내 검은 학생들에게 전해지지 못해. 그러니 지금이라도 다른 교사 알아봐.”
엘리스 또한 검술학교의 교사였기에 쿠안이 팔을 버린 대가로 무엇을 얻었는지는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학교를 떠나기 전과 지금의 쿠안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기질이 기묘했다.
“끝까지 말 안 해 준다 이거지? 나랑 친구 하기 싫다 이거지?”
“그런 걸로 협박할 나이는 지났지.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생각해? 소매를 잘라야 하나, 아니면 그대로 둬야 하나?”
“내가 어떻게 알아, 인마! 자기 팔도 자른 인간, 소매 따위 알 게 뭐야! 신경질 나게 하고 있어!”
“그냥 내버려 둬야겠군.”
전투 상황이 벌어지면 거추장스럽겠지만 외관상으로는 이편이 훨씬 나았다.
엘리스는 그제야 쿠안이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변화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렇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전보다는 많이 차분해져 있었다.
오랜 악몽을 딛고 세상에 나갈 결심을 한 것이다.
“너,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어?”
쿠안이 엘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아.”
엘리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친구가 10년 만에 처음으로 보여 주는 미소 앞에서 어떻게 가지 말라고 잡을 수 있겠는가?
“고마웠어. 연락할게.”
엘리스의 어깨를 두드리고 방을 나선 쿠안은 늘 지나다니던 복도를 지나 수많은 학생들에게 얼차려를 시켰던 훈련장을 두 눈에 담았다.
지긋지긋했던 풍경들도 오늘만큼은 그리웠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잘 있을까?’
기사 수행을 떠나겠답시고 학교를 자퇴한 리안.
결과가 이렇게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리안보다 한발 늦은 셈이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그것이 검사의 숙명이니까.
미리 예약해 둔 마차에 몸을 실은 쿠안은 마부에게 켄트라 도시로 가 달라고 말했다.
토르미아의 유명한 목축 지대로, 천국에 가기 전에 시이나와 점심을 먹었던 레스토랑이 있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그녀를 만난다.
“늦지 않았으면 좋겠군.”
20분을 지각한 쿠안은 마차 문을 거칠게 열며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젠장.”
예전에 왔던 대로 여전히 편안한 분위기였고 손님들도 대부분 소박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쿠안이 특이한 손님이었다.
검을 차고 있는 데다가 인상마저 험악했으니 식당은 고요해지고 시선은 집중되었다.
그때 코너에 있는 테이블에서 시이나가 일어났다.
“여기예요, 선생님.”
쿠안은 잠시 넋을 잃고 시이나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벗고 머리를 풀고 있는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여성이 쿠안을 반기자 손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거슬리는 걸음걸이.
레스토랑에서 오직 시이나만이 진심 어린 눈길로 쿠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바슈카는 먼 거리니까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네. 뭐…….”
먼저 연락을 한 사람은 시이나였다. 천국에서 했던 약속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리라.
쿠안은 양고기 스테이크를 시켰다.
팔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일상이 생소했지만 갑자기 다른 걸 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후회로 변했다.
예상보다 고기가 질겨서 잘 잘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식칼로 검술을 펼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푸흡!”
옆 테이블에서 들린 웃음소리에 쿠안의 칼질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한 여자가 뒤늦게 입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고 맞은편 남자는 안절부절 시선을 피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시이나가 말했다.
“쿠안 선생님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는 제가 알고 있어요. 강한 사람일수록 여유가 넘치는 법이죠.”
천국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은 시이나는 또한 강한 자들이 어깨 위에 무엇을 짊어지고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제가 잘라 드릴게요.”
쿠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시이나가 접시를 들고 가져가 스테이크를 잘랐다.
효과가 있던 것인지, 손님들의 시선도 전보다는 훨씬 따듯했다.
물론 몸이 불편한 약자를 시이나가 도와주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서 나온 반응일 테지만.
쿠안은 귀신에 홀린 듯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시이나 선생님.”
시이나가 칼질에 열중하며 되물었다.
“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혹시 저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하시는 거라면…….”
갑자기 불쑥 눈앞으로 내밀리는 스테이크 조각에 쿠안은 말을 멈췄다.
검술로 따지자면 탁월한 찌르기.
쿠안이 시선을 들자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시이나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말했다.
“드, 드실래요?”
감정의 격류에 쫓기다 보면 이성의 핀트가 어긋나 제정신이 아닌 행동을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지금 시이나가 그랬다.
쿠안에게 호감이 생긴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막나갈 생각은 조금도 없었던 것이다.
분위기를 직감한 손님들은 남자 쪽의 선택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쿠안이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그녀가 건넨 고기를 입속에 넣었다.
“아…….”
그리고 점잖게 포크를 건네받은 뒤 묵례했다.
“감사합니다.”
만약 엘리스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무덤 앞에까지 찾아와서 놀려 댔을 테지만 쿠안은 이것으로 됐다고 생각했다.
긴 여행을 하기 전에 즐거운 추억 하나 정도쯤 가지고 간다고 나무랄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시이나는 돌아가는 마차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개학이 되면 자주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네. 아마 그러시겠죠.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시이나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어차피 그녀도 남녀 관계에는 젬병인지라 할 말을 꺼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편지하실래요?”
“편지요?”
뜬금없는 제안에 눈을 깜박이던 쿠안은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긴장하고 있었는지 시이나의 얼굴색이 갑자기 밝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