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50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
10년 전에 아킬레스건이 잘려 나간 쿠안이라는 검사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일단은 잡아야겠지.’
여자는 무게중심을 천천히 왼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자 점차 기울어지던 세상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완벽하게 수평으로 되돌아왔다.
‘확실히 쉽지 않다.’
인생을 파멸시킨 원수를 앞에 두고도 쿠안이 선뜻 검을 뽑지 않은 이유는 임무를 우선시하는 마음 이전에 상대가 풍장이기 때문이었다.
‘기다려라. 언젠가는 전부 다리를 잘라 줄 테니까.’
그렇게 훗날을 도모하는 쿠안과 달리 여자는 조금 전에 느꼈던 기괴한 기질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다.
‘대체 뭐였지?’
호기심을 참지 못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너…….”
그때 미로의 목소리가 여자의 말을 잘랐다.
“아리우스, 들어와.”
아쉬운 듯 미간을 찡그린 여자는 다시 올빼미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옆으로 물러섰다.
아리우스가 방으로 들어가자 우오린이 손을 들었다.
“오랜만이야, 아리우스.”
카즈라 왕성에서 인연을 맺었으나 그때하고는 서로의 처지가 너무나 달랐다.
일국의 공주였던 우오린은 삼황계가 되었고 마도7걸의 도굴꾼은 최강의 반야, 미로의 충실한 종이 되어 있었다.
“테이블에 눕혀.”
미로가 천의 끝을 붙잡고 홱 젖히자 아르망의 로브를 입고 있는 시로네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시로네…….’
짧은 순간 우오린의 눈빛이 다정하게 변했다.
새로운 계약 (3)
“시로네. 물론 알고 있지.”
미로는 잠시 스쳐 간 우오린의 다정한 눈빛에서 오히려 섬뜩함을 느꼈다.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어머니의 인자함은 그 아이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발현되는 것.
우오린의 표정이야말로 욕망을 초월한 소유욕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오린은 능숙하게 말을 돌려 감정을 숨겼다.
“행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말이야.”
이미 케이지 B팀이 가져온 정보는 첩보라는 이름으로 세계 각지에 조금씩이나마 흘러들고 있다.
그리고 그 첩보를 가장 먼저 접하게 될 곳은 다름 아닌 성전이었다.
미로가 시로네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보다시피 의식이 없어. 완전히 맛이 가 버렸다고. 당신이라면 시로네를 깨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우오린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다리를 꼬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미로 네가 되돌아온 시점에서 시로네의 역할은 끝났어. 굳이 수고를 들여 가며 되돌려야 할 만큼 중요한 인사도 아니고 말이야.”
미로가 입꼬리를 올렸다.
“왜 이래, 선수끼리? 시로네의 역할은 끝났어도 라는 존재하잖아? 시로네의 능력, 당신에게 필요할 텐데?”
“필요한 것과 도와주는 것은 다르지.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시로네를 취할 수 있어.”
“과연 그럴까? 아무리 당신이라도 아르망의 정조대는 쉽게 풀 수 없을 텐데? 이거, 절대로 안 풀린다고.”
발할라 액션의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기 전까지 아르망은 시로네에게서 벗겨지지 않는다.
미로의 자신만만한 대응에 비로소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한 우오린이 고집을 꺾었다.
“좋아. 뭐가 문제야? 별 볼 일 없는 거라면 그만둘 거야. 언제가 되었든 나는 시로네만 차지하면 그만이니까.”
“욕구는 여황님 좋을 대로 푸시고, 일단 시로네는 현재 발할라 액션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야.”
“발할라 액션?”
미로는 가올드 일행에게 들은 내용을 토대로 시로네가 처한 상황을 전했다.
발할라 액션의 메커니즘을 플루가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얘기를 들은 우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배짱을 부릴 만하네. 천사의 능력이라. 그럼 시로네는 두 가지 능력을 구사할 수 있는 건가?”
“발할라 액션은 아르망에 장착되었어. 어차피 시로네와 일체화되었으니 상관없겠지만, 당신에게는 의미가 다르겠지.”
시로네에게 선뜻 아르망을 선물한 이유는 빚을 지우기 위함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실력을 성장시켜 한꺼번에 그 능력을 물려받기 위한 계략도 깔려 있었다.
그렇기에 발키리에서도 최고 등급으로 등재되는 천사의 능력이 한낱 무기에 장착된 상황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미련을 접은 우오린이 물었다.
“그래, 정확히 치러야 할 대가가 어느 정도야?”
아리우스가 말했다.
“제가 다이브를 해서 조사한 결과 127년 정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훨씬 웃도는군.”
현재 시로네의 나이가 열아홉 살이으니 백마흔여섯 살이 되었을 때에야 깨어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맞아. 그때쯤이면 이미 모든 게 끝나 있겠지. 하지만 이카엘은 그것이야말로 시로네를 다시 되돌릴 힌트라고 했어.”
그렇게 말한 미로는 우오린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게 자신과 같다면 분명 뭔가를 떠올릴 터였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우오린이 상체를 젖히며 손가락 3개를 폈다.
“일단 시로네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을 것 같다.”
“호오?”
예상보다 많은 숫자였다.
“발할라 액션이 발동되었다는 것은 인과율이 성립되었다는 뜻. 하지만 시로네는 지불 한도보다 훨씬 많은 대가를 지불했어. 바로 그 점이 핵심이야.”
아리우스가 끼어들었다.
“지불이 불가능한데 지불이 되었다는 것이군요.”
“그래. 정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추론이 가능하지. 내 생각에 발할라 액션은 인과율의 계산에서 시로네의 무언가를 담보로 잡은 것 같다.”
“담보라니?”
“발할라 액션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불공평하다’라는 것이었어. 물론 미래의 불확실함까지 이자를 먹여서 도출한 결론이겠지만, 그렇더라도 담보가 없이 127년의 결과를 대출해 준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따라서 내 생각에는 수명의 문제가 아니다.”
아리우스가 말했다.
“시간이로군요.”
“그래. 인간인 이상 수명을 늘리는 건 불가능하지. 하지만 시간에 관한 담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치…….”
우오린은 미로를 가리켰다.
“너처럼 말이야.”
미로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20년 전, 정확히 19년이지. 너는 그때에 비해서 조금도 늙지 않았구나. 그 이유가 무엇일까?”
“글쎄? 내가 워낙 동안이라?”
농담처럼 말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이카엘이 말한 힌트를 들었을 때부터 머릿속에 맴돌던 한 가지 가능성을 우오린이 짚어 내고 있었다.
“물론 너 같은 구도자들은 정신 수양을 통해 생체 활동을 충분히 늦출 수도 있겠지. 하지만 차원의 벽에서 무려 20년 동안 너는 먹지도 자지도 않았어.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정답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맥클라인 거핀.”
우오린이 말했다.
“미로, 네가 있기 전에도 차원의 벽은 존재했지. 그리고 그것이 천국의 병력을 막았고. 그 이후에 거핀은 사라졌고 네가 낙점되었다. 너는 거핀의 후임자야. 말소되어 떠올리지 못할 뿐, 너는 분명 거핀을 만났을 거야.”
미로의 시선이 시로네에게 옮겨졌다.
“그리고 그 거핀이 나에게 전수한 어떤 것이, 시로네에게도 전수되어 있다는 건가?”
우오린은 고개를 들고 회상했다.
“세 번째 리셋, 즉 대정화기에 들어서면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이카엘은 어째서 시로네에게 아타락시아를 전수했을까? 또한 천국에서 발현된 시로네의 화신에는 어째서 천사의 날개가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오린은 아리우스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시로네의 모태 심리에는 거핀의 보안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던 것일까?”
“그걸 어떻게…….”
시로네의 심층에 들어간 사람은 아리우스가 유일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추종하는 미로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한 적이 없었다.
미로가 살며시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리셋 이후에 알아냈군.”
“그래. 대정화기를 살아오면서 나는 또다시 아리우스와 카즈라에서 만나게 되지. 아타락시아 도굴에 실패한 아리우스는 워커에게 쫓기다가 아포토시스로 탈출하고 말이야. 당시에 몰래 정보를 추출했다. 기억하지? 네가 시로네를 잠재운 수면 마법 말이야.”
수면 마법의 고수들은 대상의 의식을 칼같이 잘라 잠에 빠진 것도 모르게 기억을 연결시킬 수 있다.
당시를 떠올리던 아리우스는 무언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는지 침음성을 삼켰다.
시로네에게 도어를 설치한 장면까지 관찰하고 있었다면 그녀가 모르는 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미로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우오린을 노려보았다.
‘이래서 짜증 나, 테라제는.’
시로네와 미로는 거핀의 이름과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통틀어 극소수의 케이스였다.
다만 문제는 우오린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점이다.
‘분명 알고 있는데.’
인류 역사를 세 번이나 경험한 테라제라면 거핀에 대한 데자뷔가 없을 리가 없다.
어쩌며 인류 중에서 유일하게 거핀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다만.
‘절대로 말해 주지 않겠지.’
그것은 오직 테라제만이 알고 있는 기밀.
본인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어떤 방법으로도 진실을 캐낼 수 없을 터였다.
미로는 포기하고 시로네의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사설은 됐고, 일단 말해 봐. 시로네를 되돌릴 세 가지 방법 말이야.”
“첫 번째 방법은 아주 단순하고 쉬운 거야.”
우오린이 손가락 하나를 들고 말했다.
“시로네를 죽인다.”
“흐음.”
미로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담보가 있다고 확신한다면 시로네를 죽이는 게 가장 쉬운 해결책이야. 그렇게 된다면 어떤 일이든 벌어지겠지. 만약 운이 좋다면, 죽었다가 살아날 수도 있고.”
턱을 괴고 있던 미로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런 경우가 있나?”
“인류 역사를 통틀어 세 번 정도.”
“극히 희박하네.”
“하지만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 설령 죽는다고 해도 딱히 상관은 없잖아? 나도 아깝기는 하지만 다시 깨우는 수고와 저울질했을 때 크게 아쉬울 건 없어.”
“그렇기는 하지.”
가장 신속하게 해결을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니 시로네를 죽이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일단 두 번째도 들어 볼까? 판단은 그때 가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두 번째 방법은 시로네가 스스로 채무를 이행하게 만드는 것. 이것도 담보와 관련이 있지.”
“과연. 하지만 모라토리엄 상태에서 어떻게 선택을 하지?”
“그에 대한 방법은 따로 준비해야 되겠지.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을 쓸 수 있다면 오히려 세 번째 방법이 나을 거야.”
“세 번째라 하면?”
“다른 사람에게 채무를 대신 갚게 한다.”
“오호라…….”
“발할라 액션의 인과는 분명 시로네의 것. 하지만 그 인과를 연결시키는 담보는 시로네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담보는…….”
두 여자가 동시에 말했다.
“누군가에게 양도될 수 있다.”
우오린은 턱을 괴고 벽을 돌아보았다.
“규정외식. 오브제. 어쩌면 둘 다 필요할지도 몰라. 모라토리엄을 우회하는 능력. 마법을 추출해서 양도하는 능력. 이 두 가지 기능을 갖추게 된다면 시로네를 깨어나게 할 수도 있을 거야.”
누군가를 떠올린 미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으음…… 규정외식이라.”
“짐작 가는 바가 있는 모양이군.”
“그게, 그냥 당신이 좀 알아봐 주면 안 돼?”
“협조는 하겠지만 기대는 건 사절. 게다가 아드리아스 가문의 미로라면 그리 멀리 있지 않을 텐데?”
우오린이 의뭉스럽게 되묻자 미로는 이미 그녀가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맛을 다셨다.
“너무 야박하네.”
“담보를 추출해 와. 양도할 사람 정도는 구해 주지.”
“127년인데. 청산할 수 있겠어?”
“대마법사 10명 정도가 분담하면 1년 안에 갚을 수 있을 거야. 안 된다면 20명을 고용하면 되지.”
미로가 피식 웃었다.
“어쩌니 해도 정성이네? 언제는 죽이는 게 제일 간단한 방법이라더니.”
“지금도 마찬가지야. 대마법사 20명을 고용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들의 능력을 그냥 갖다 버리는 셈이니까. 내가 아무리 시로네를 탐내도 그만큼의 가치가 시로네에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래? 그런데 어째서?”
우오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귀엽잖아. 나 이런 스타일 좋아해.”
미로의 눈매가 가식적으로 구부러졌다.
‘거짓말쟁이.’
그녀는 우오린이 쉬운 방법을 놔두고 굳이 세 번째 방법을 택한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시로네가 가지고 있는 담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만약 그 담보가 거핀에 관련된 것이라면 대마법사 20명으로도 싸게 먹히는 셈일 테니까.
‘까지 않은 보물 상자라 이거지.’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미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리우스는 황급히 시로네를 검은 천으로 감싸고 등에 업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니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그럼 나는 추출을 맡을게. 당신은 양도 쪽으로 준비해 줘.”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 계약을 전제로 한다면 무엇이든 도와줄 테니.”
“으응. 얼마든지 그럴게.”
미로가 흔쾌히 손을 흔들며 방을 나서고, 시로네를 업은 아리우스가 뒤를 따랐다.
문밖에서 풍장의 리더가 잠시 방 안을 둘러보더니 주군의 안위를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그것과 동시에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던 우오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변했다.
“빚은 많이 지울수록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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