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51
토르미아 왕국 재계 서열 20위 안에 들어 있는 가문이라면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상단을 보유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단테의 에어하인 가문은 에어하인 해운이라는 회사를 설립, 대륙은 물론 남방, 중동까지 연결된 운송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세계 물동량의 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재계 서열 14위의 거대 상단이었다.
이는 외교적 중립국의 위치를 오랜 시간 지켜 낸 토르미아 왕국의 군사적, 정치적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일 테지만, 그런 가문 중에도 유독 독특한 방식으로 성장한 가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현재 미로가 가고 있는 아르디노 가문이었다.
도시에 휘황찬란한 저택을 짓고 사는 다른 가문과 달리 수도 바슈카를 북쪽으로 에워싸고 있는 지저 산맥 깊숙한 곳에 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비밀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상당히 깊은 곳에 있군요.”
시로네를 업고 미로의 뒤를 따르는 아리우스가 혀를 빼물고 말했다.
아르민과 쿠안은 각자의 장기를 살려 다른 임무를 수행 중이었기에 미로와 동행하는 사람은 아리우스뿐이었다.
“본래는 상인 집안이 아니었으니까.”
본가에 가까워진다는 게 느껴질수록 미로의 표정이 전과 달리 안 좋아지고 있었다.
미로도 사람이니 어찌 기분이 없을까마는, 무상심의 반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감정 변화는 아니었다.
“신경 쓰이십니까? 조금 의외군요.”
“아르디노 가문은 다른 상인 가문과는 성질이 달라.”
“아르디노 출판사의 인장은 마법을 공부하면서 자주 접했죠. 그래도 서적 판매만으로 재계 서열 20위라는 건 대단한 일이라고 봅니다.”
“편찬만 하는 건 아니야. 협회 공식 간행물을 제외한 사적 서적들의 번역, 교정, 수정 작업까지 할 수 있다는 건 방대한 마법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거지.”
“시로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미로는 다시 산길을 걸었다.
“그래. 하지만 내가 말한 성질이 다르다는 얘기는 그런 뜻이 아니야.”
아리우스가 멀어 버린 눈을 들었다.
“아르디노 가문은 오래전 아드리아스 가문에서 분가한 가문이거든.”
“아드리아스라면…….”
“내 가문이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아드리아스 가문은 대대로 금욕주의로 유명했다.
귀족이지만 한 푼의 재물도 모으지 않고, 가솔들은 산속에 터를 잡아 최소한의 물과 식량으로만 살아간다.
그런 환경에서 미로라는 천재가 나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추구하는 것은 욕망과 번뇌를 초월한 궁극적 안정.
그들의 통찰은 세상의 이치를 관통하고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어 차별 없는 가르침을 베푼다.
그렇기에 왕국에서도 국가 활동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아드리아스 가문에 굳이 작위까지 내려가며 자국 소속임을 못 박아 두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대의 누군가가 금욕적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거야.”
마도7걸로 속세의 쾌락을 마음껏 누렸던 아리우스는 십분 이해했다.
“그렇겠죠. 저라면 못 살 것 같습니다.”
“당연히 가문에서는 만장일치로 반대표가 나왔지. 그러자 선대는 가문을 박차고 나와 새로운 이름을 짓고 사회로 스며들었어. 그게 바로 지금의 아르디노 가문이야. 아드리아스 고유의 지식과 통찰력을 이용해 부를 쌓았고, 지금은 재계 서열 20위의 거대 상단이 되었지. 하지만 실상 그들의 주 수입은 대부분 어둠의 루트를 통해 들어오고 있어.”
“어둠의 루트라면……?”
“마법. 현재 세계에서 가장 돈이 되는 사업이자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는 영역이니까. 결국 출판 사업은 겉치레일 뿐이야.”
아리우스는 미로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말하자면 그런 가문이 친척이라는 것이군요. 어쨌거나 같은 피가 흐르니까요.”
“딱히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야. 물론 세간의 비난은 아르디노 가문에 쏟아졌지만, 우리 사이에서는 딱히 마찰은 없었어. 속세 철학도 세상에 필요한 것이고, 당시에는 아르디노 가문도 어둠의 자금을 끌어모으지는 않았으니까.”
“지금은 다르다는 겁니까?”
미로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쯧 하고 혀를 찼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이스타스에 들어가 차원의 벽을 만든 후부터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했어. 20인의 심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부분 나에게 포커스를 맞추지만, 시선 바깥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
“그렇겠죠. 인류의 존망을 좌지우지한 사건이었으니까요.”
단지 미로보다 중요하지 않기에 돌아보려 하지 않았을 뿐, 20인의 심판이 결정되고 세계 전체에 퍼진 파장은 어마어마했을 터였다.
“아드리아스 가문이 인류를 구했다, 이 명제가 성립되자 상대적으로 아르디노는 비난의 폭격을 받았지. 호사가들의 입담이야 당연하고 사업적, 정치적 알력도 심했을 거야. 돈에 영혼을 판 수전노. 인류를 배신한 도망자. 뭐, 이런저런 얘기들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 그러다가 결국 어둠의 자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거지.”
“미로 님을 원망하고 있을까요?”
“글쎄. 나도 거의 20년 만에 만나는 거니까. 어쨌거나 가 보면 알 일이야.”
30분 정도 산행을 이어 나간 두 사람은 아르디노 가문에 도착했다.
자연과 동화되어 있는 건물은 분가하기 전 아드리아스의 기질이 남아 있는 유일한 증거였다.
철문은 관리되지 않아 나무 넝쿨이 잔뜩 엉켜 있었고, 자물쇠조차 걸어 놓지 않았다.
을씨년스러운 건물로 걸어간 미로는 나무 문의 철 손잡이를 세게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소갈머리가 비어 있는 중년의 남성이 문을 열었다.
“뭐야? 오늘은 예약 손님…….”
웃고 있는 미로를 발견한 남자의 얼굴이 귀신을 본 듯 창백해졌다.
“너…… 너…….”
“오랜만이야, 엔리케 오빠.”
아르디노 엔리케.
현 아르디노 가문의 가주이자, 어릴 때에는 미로와 종종 어울렸던 사촌이었다.
“미로, 정말로 너 미로냐?”
놀람을 감추지 못하던 엔리케의 눈빛이 갑자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역시, 언젠가는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내 예상보다 빨랐던 건가?”
“뻥치네. 통찰력은 쥐뿔도 없는 사람이.”
엔리케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 사실은 죽은 줄 알았다. 그나저나 너는 하나도 늙지 않았구나.”
“오빠는 배가 더 나왔고. 어휴, 이 살들 출렁거리는 것 좀 봐. 이것들 어떻게 할 거야?”
“이, 이런……!”
뱃살이 잡힌 채로 얼굴을 붉히는 엔리케의 얼굴에서 잠시나마 젊은 시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하지만 역시나 세월은 세월이었고, 오랜만의 회포를 끝내자 눈빛에서 거리감이 물씬 드러났다.
“여긴 왜 온 거냐?”
“서운하네. 20년 만에 돌아온 사람에게 그게 할 소리야?”
“20년 만에 돌아왔으니 그런 것이지.”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무언의 압박에도 미로는 오히려 상대방이 무안할 정도로 자리를 지켰다.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던 엔리케가 결국 혀를 끌끌 차며 집으로 몸을 돌렸다.
“들어와라. 밥이라도 먹고 가.”
저택으로 들어간 미로는 20년 전과 바뀐 게 없는 풍경에 헛웃음이 나왔다.
“뭐가 이래? 엄청난 거부라더니.”
“쉬운 일이 아니야. 상단은 물론이고 이제 왕국에서도 주시하고 있어. 아드리아스가 사라졌으니, 이젠 아르디노 차례라는 거지.”
미로의 얼굴에 잠시 슬픔이 머물다가 떠났다.
낡은 가죽 소파에 뚱뚱한 몸을 누인 엔리케가 담배를 꺼내 물자 시녀가 차를 내왔다.
“용건이 있어서 왔어.”
“미로야.”
엔리케는 한 모금밖에 빨지 않은 담배를 초조한 듯 꺼 버리고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냥 밥만 먹고 가 주면 안 되겠냐? 나나 되니까 너랑 이렇게 얘기라도 하는 거야. 가문의 모두가 너를 싫어해. 제발 부탁인데 그냥 가 다오.”
“하지만 가주는 오빠잖아? 가주가 그런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하아.”
엔리케는 지친 듯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그래, 예전부터 너는 제멋대로였지. 내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았어.”
“그래도 나 때문에 재밌었잖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엔리케가 풋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대체 용건이 뭔데?”
“‘금동이’ 어딨어? 지금 방학 기간이지?”
엔리케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우리 아들? 그 자식은 갑자기 왜 찾아? 아직 졸업도 못 하고 있는 변변찮은 놈을.”
“들었어. 그래서 고모가 훈계 좀 할까 하고.”
엔리케가 흐음 하고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긴 동안 미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쩌니 해도 아르디노 가문의 수장이다.
자금력도 인맥도 대단한 인간이, 미로가 천국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아들놈은 2층 방에 있다. 며칠 전부터 아예 내려오지를 않아.”
“만나고 올게.”
아르디노 가문의 분위기를 파악한 이상 시간을 끌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미로가 아리우스를 데리고 계단으로 향하는 그때, 소파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
계단을 앞에 두고 미로가 돌아섰다.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는 엔리케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미로야, 너도 이제 알았잖아? 네가 얼마나 강하든, 결국 세상에 이용만 당할 뿐이다.”
잠시 주저하던 엔리케가 말을 이었다.
“성을 바꿔라. 아르디노로 들어와. 그러면 내가 책임지고 너를 지켜 주마.”
미로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섰다.
“내가 선택한 일이야.”
“아직도 그렇게 합리화를 시키는 것인가!”
엔리케가 벌떡 일어났다.
“솔직히 네가 날 찾아왔을 때 놀랐다! 돌아왔다는 사실에 놀란 게 아니야! 조사해 봤을 텐데! 아드리아스 가문의 일족은 전부 숙청당했어! 네가 제시했던 유일한 약속을 어겼다고!”
“그것 또한 가족들이 선택한 일이지.”
엔리케는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어찌 그리 잔인할 수 있지? 정말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세상에 대한 원망도 없는 거냐? 네가 인류를 구한 이후로 우리 가문 또한 압박을 받고 있어! 어째서인지 알아? 세상은 우리를 무서워해! 자신들이 살기 위해 이용해 먹었을 뿐, 한편으로는 제2, 제3의 미로가 나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그게 아드리아스 가문이 사라진 이유고, 우리 가문이 물밑으로 들어간 이유야!”
엔리케는 소파를 돌아 미로에게 다가갔다.
“인간에게 많은 걸 기대해서는 안 돼. 필요할 때는 온갖 달콤한 말을 내뱉지만 필요가 없어지면 어떤 생물보다 잔인해지지. 그런 자들을 위해 희생한 시간이 아깝지도 않다는 거냐?”
“아깝지 않아.”
천천히 고개를 든 미로가 미소를 지으며 엔리케를 돌아보았다.
“그게 아드리아스니까.”
엔리케는 맥이 탁 풀렸다.
원래는 한 핏줄이었거늘,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고기 파이 구워 놓으라고 하마. 다 되면 내려와.”
미로가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말을 돌린 엔리케가 거실로 사라지자 미로는 계단을 올라 직각으로 꺾인 복도로 들어갔다.
바닥에 나무판자가 깔린 복도에서는 골동품 냄새가 났다.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네 번째 방에 도착한 미로는 노크를 하려다 말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금동아! 뭐 하니?”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훤칠한 미남자가 간이 실험대에서 실험 도구를 씻고 있었다.
불청객의 등장에도 태연하게 고개를 돌린 그였으나, 미로의 모습을 본 순간만큼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훤칠하게 자란 모습에 미로는 처음으로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20년 세월의 격차를 실감했다.
“이야, 너 진짜 많이 컸다? 나 기억나?”
“이런…… 누군가 했더니.”
삼각플라스크를 싱크대에 탁탁 털어 낸 남자가 건배를 하듯 내밀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고모.”
알페아스 마법학교 서열 1위, 아르디노 페르미였다.
조력자 (2)
페르미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엔리케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미로는 아리우스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실망이네. 한창 혈기에 방학 중인데 틀어박혀서 설거지나 하고 있다니. 이상한 짓이라도 하고 있으면 실컷 놀려 주려고 했는데.”
“방학 중에 그런 짓이나 하는 것도 딱히 건설적이진 않죠. 왜 찾아왔습니까?”
소파에 앉은 미로가 말을 돌렸다.
“정말 기억하는 거야? 세 살 때 보고 말았는데. 금동아, 금동아, 부르면 까르르 웃으면서 달려오고 그랬잖아.”
“뇌가 기능할 때부터의 기억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확실히 엄마를 닮았네. 너희 아빠는 어제 일도 기억 못 하는데. 아, 그러면 혹시 대머리는…….”
“하아.”
페르미는 슬슬 짜증이 났다.
“본론만 말하세요. 왜 왔습니까?”
“내가 천국에 갔다가 돌아온 일은 들었지?”
“몰라요.”
아마도 사실일 것이라 생각하며, 미로는 시로네의 로브를 벗겼다.
“짠, 어때? 이러면 조금 흥미가 생기려나?”
페르미는 잠에 빠진 시로네의 얼굴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미로에게 돌렸다.
“구면이긴 하군요.”
졸업반 경쟁이 한창이던 중에 시로네는 평가를 포기했고, 그 이후로 소식을 들은 적은 없었다.
“시로네도 천국에 있었어. 세계의 운명을 걸고 싸웠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지 않아?”
페르미는 지루하다는 듯 소파에 등을 기댔다.
“관심 없어요.”
“그러지 말고 들어 봐. 천국에는 말이야, 앙케 라라는 괴상한 생물체가 있는데…….”
“어차피.”
페르미가 말을 끊었다.
“그런 건 아드리아스가 알아서 하면 될 일 아닌가요?”
미로는 입술을 말아 물고 미안한 웃음을 지었다.
“세상이 끝장나든 말든, 다른 세상에 무슨 괴물이 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시로네도 마찬가지예요. 학교에 돌아오면 밟아 버릴 것이고, 못 돌아온다면 그걸로 됐어요.”
“그래? 그런데 어째서 알페아스 마법학교에 입학했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페르미의 눈에 비정상적인 광기가 차올랐다.
“당신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아드리아스 가문 따위, 이미 망해 버린 과거의 유산일 뿐이야.”
페르미가 말도 트이기 전에 아르디노 가문은 수많은 고초를 겪었고, 19년 후 그는 규정외식자가 되어 있었다.
“피해를 입힌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이건 진심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착각하지 마. 알페아스에 입학한 건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야. 거긴 돈 되는 일이 많거든.”
미로는 웃음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 좀 써 보는 게 어때?”
마치 고양이가 발톱을 숨기듯 페르미의 광기가 순식간에 내면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