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52
돈 앞에서 태세를 전환하는 건 아르디노의 독자적인 기질일 테지만, 미로는 애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거래라면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죠. 하지만 상대가 고모라면 조건이 붙을 것 같네요.”
“말해 봐.”
페르미가 바닥을 가리켰다.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구한다면 생각해 보죠. 일단 저도 아르디노 가문이니 함부로 거래를 틀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쉬운 일이야.”
미로는 진심이었다.
“무릎을 꿇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아드리아스의 핏줄이라면 마음이야 손바닥 뒤집듯이 바꿀 수 있으니까. 그래서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데.”
“무엇을요?”
“너에게 무릎을 꿇는 것과, 지금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는 것의 차이가 나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아드리아스 미로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인간이니까.
“하하!”
페르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었다.
“농담이에요. 설마 고모에게 제가 그런 일을 시키겠어요? 하지만 거래의 대가는 확실히 받을 겁니다.”
“그건 얼마든지. 이래 봬도 엄청나게 짱짱한 분을 스폰서로 물었거든.”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그럼 시작해 보죠. 제가 뭘 도와 드리면 되죠?”
미로는 우오린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고, 우오린이 내린 결론에 대해서까지 털어놓았다.
“흐음, 담보의 추출이라.”
영특한 재인답게 페르미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또한 미로와 테라제의 이름값만큼이나 거대한 거래가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일단 조금은 의욕이 생기는군요.”
페르미에게 의욕이 생긴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미로가 원하는 건 페르미의 능력 외에도, 아르디노 가문이 보유한 방대한 마법적 지식이었으니까.
“시로네의 마법을 추출할 수 있겠어?”
페르미는 대답 대신 팔걸이에 올린 손을 들었다.
규정외식-감가상각의 거래.
페르미의 손바닥 아래로 다양한 색상과 패턴의 칩들이 촤르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칩이 탑처럼 똑바로 세워지자 그는 가장 위쪽의 칩을 공중으로 튕겼다.
“멋지네. 무슨 마법이야?”
떨어지는 칩을 낚아채며 페르미가 말했다.
“소환 마법 에폭시 토스카.”
“오호.”
미로는 페르미가 던진 칩을 받았다.
얼룩덜룩한 색상의 투 톤 패턴에, 중앙의 데칼 부분에는 거미를 닮은 곤충이 그려져 있었다.
“토스카 호수에 서식하는 대형 벌레예요. 인간의 척수에 달라붙어 환각 유도제를 분비하고 피를 빨아 먹죠. 환각 상태에서는 진실만 말하게 되고 강제로 뜯어낼 시에는 강산을 쏟아 내며 자폭하기 때문에, 48시간 안에 뼈까지 소멸해요.”
“범죄용으로 안성맞춤이네.”
“그렇죠. 물론 저는 왕성 관계자에게 구입했지만. 상사가 필요한 마법은 프리미엄이 붙어서 비싸게 샀어요.”
“어떤 마법이든 추출할 수 있는 거야?”
미로가 칩을 던지자 페르미가 다시 낚아챘다.
“기본적으로는요. 타인의 마법을 빼앗거나 복제하는 규정외식은 등가교환의 과정에서 복잡한 조건이나 위험한 대가가 따릅니다. 반면에 저는 조건이나 대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등가교환 자체를 도구로 사용하니까.”
페르미는 백치처럼 활짝 웃었다.
“바로 그거예요. 저는 규정외식을 완성시키는 중개인일 뿐, 마법을 거래할 때에는 반드시 판매자와 구매자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합니다.”
넘기는 쪽과 받는 쪽이 이미 합의를 마쳤기 때문에 페르미에게는 특별한 조건도 대가도 붙지 않는다.
“쌍방의 균형을 맞추는 매개물은 돈일 테고. 대충 이해했어. 그럼 가격 측정은 어떻게 하지?”
페르미는 왼손을 내밀었다.
규정외식-감가상각의 거래 계약서.
한 장의 종이가 구현되어 잡혔다.
“가격은 상황에 따른 브로커의 합리적 판단을 기준으로 합니다. 물론 위증은 불가능해요. 합리성을 잃은 가격을 책정하게 되면…….”
“규정외식 자체가 발동되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이 마법의 장점은 브로커가 따로 충족해야 할 조건이 없다는 것이죠. 결국 결정은 당사자가 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어요.”
“거래자들의 문제를 말하는 거지?”
“네. 예를 들어 ‘후회’나 ‘변심’ 같은 요소가 있죠. 타인의 마법을 영구적으로 양도한다는 것은 마법적 가치 이상의 리스크를 필요로 하니까요.”
“그래서 감가상각을 적용한 거로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계약 파기’의 가능성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약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 고객의 불안감은 약화되고 규정외식은 더욱 단단해질 테니까요.”
페르미는 거래 계약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A라는 마법의 가치가 한 달 임대에 100골드라면 계약 기간에 따라 감가상각비가 매겨집니다. 예를 들어 3개월이라면 두 번째 달에는 60골드, 세 번째 달에는 30골드가 되는 식이죠. 파기는 물론 양도도 가능하고, 연장도 됩니다.”
계약서를 살피는 미로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감가상각을 이용하면 어떤 거래든 합리적인 선에서 가능해진다.
“좋아. 그렇게 가치가 책정되면, 다음에는 어떤 게 남았지?”
“수수료를 정해야죠. 고객 사이에서 오고 가는 모든 자금에 대한 수수료를 제가 책정합니다. 1퍼센트에서 99퍼센트 사이로요.”
“큭큭큭.”
미로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법의 가치는 위증할 수 없으나 수수료만큼은 페르미 마음대로 먹일 수 있다.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남들 좋으라고 이런 규정외식을 만들 사람은 없으니까.
또한 임의로 수수료를 책정함으로써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를 휘두를 수 있는 상황으로 유도할 수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솔직히 이 정도도 아니면 아르디노 가문도 다 됐다고 생각하려고 했거든. 자, 그럼 이제 들어 볼까? 네가 판단한 발할라 액션의 가치는 어느 정도야?”
페르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위증은 불가능하고, 오직 진실로 그렇게 믿는 숫자를 가치로 내놓아야 한다.
더 이상의 계산은 없다고 판단한 페르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1천억 골드.”
아리우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일전에 아타락시아를 도굴하여 지온에게 팔려고 할 때, 40억 골드에 더해서 테라제의 라인에 서는 조건으로 넘기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론 테라제의 라인에 서는 것이 40억 골드보다 훨씬 가치가 높은 일이고 페르미가 가치를 매기는 기준에 ‘상황에 따른’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1천억 골드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금액이었다.
‘뭐, 전문가가 봤을 때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만.’
나중에라도 장사는 절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아리우스였으나, 페르미의 통은 그보다 훨씬 컸다.
“3년 계약을 기준으로 합니다. 1년에 1천억 골드, 2년 차에 600억 골드, 3년 차에 300억 골드. 대략 2천억 골드 규모의 거래라면 발할라 액션을 추출할 수 있을 겁니다.”
미로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구매자인 테라제가 백지수표를 내밀었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고, 어차피 자신의 지갑에서 나가는 돈도 아니었다.
“좋아. 수수료는 아마도 99퍼센트겠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페르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죠. 그런 다음 판매자와 구매자의 사인이 들어가면 거래 완료입니다.”
“테라제의 사인은 내가 가서 받아 오면 되지만, 시로네는 현재 모라토리엄 상태라 사인을 할 수 없어. 그냥 손에 쥐고 휘갈긴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
“물론 그렇죠.”
“그럼 어떻게 사인을 하지?”
페르미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고모가 알아서 해야죠.”
“금동아.”
미로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내가 마법 추출하는 규정외식자를 못 찾아서 여기에 왔겠어? 얼마짜리 거랜데,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브로커계에서 천재 소리를 듣는 놈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뭔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 아냐?”
미로가 작심한 듯 띄웠으나 페르미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고모도 모르는 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아니, 넌 알고 있어.”
“왜 그렇게 생각하죠?”
“시로네가 모라토리엄이라는 얘기를 듣고서도 감가상각의 거래를 설명했으니까. 그건 방법이 있다는 뜻이잖아?”
“넘겨짚지 마세요. 그런 식의 화법은 상인에게 전혀 압박이 안 되니까.”
“그래? 그럼 상인의 방식대로 말해 줄까?”
의자에 기댄 미로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처음에는 어째서 이런 마법을 만들었을까 생각했어.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아르디노 가문의 자금력으로 충분하잖아?”
“또 지레짐작이네.”
“계속 들어 봐. 결국 네가 원하는 건 최고 등급의 마법. 즉,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마법을 구사하기 위해서지. 그렇다면 명확해져, 어째서 네가 이런 마법을 만들었는지.”
페르미는 그제야 미로를 돌아보았다.
“네가 설명한 것 중에서 딱 하나 빠진 게 있어. 수수료를 임의로 정하기 위해 네가 감수해야 할 조건 말이야.”
미로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브로커가 사용하기 위해 칩을 구입할 경우, 그 자금은 반드시 여태까지 발생한 수수료로 지불해야 한다.”
‘이런 씨……!’
페르미의 머릿속에 육두문자가 올라왔다.
조력자 (3)
규정외식 감가상각의 거래.
페르미는 마법을 판매하는 자에게 마법을 추출하여 마법을 구매하는 자에게 칩의 형태로 제공하고 거기에 대한 수수료를 받는다.
또한 마법의 가격은 시간에 따라 가치가 일정하게 감소하는 감가상각비가 적용된다.
기본적으로 구매자가 판매자에게 돈을 지불하고 페르미는 일정한 수수료만 떼어 가기에, 능력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자본금은 필요하지 않다.
단 페르미 본인이 구매자가 되어 판매자와 거래를 할 경우에는 제약이 붙게 되는데, 바로 여태까지 감가상각의 거래로 벌어들인 수익으로만 계약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현재 페르미가 규정외식으로 벌어들인 수수료의 총합은 대략 6억 골드.
물론 페르미 또한 학교생활과 브로커 활동을 하려면 칩을 꾸준히 구입해야 했다.
일례로 주특기 시험에서 20개 항목 전체를 만점으로 받는 데 사용한 칩은 ‘에어 계열 기초’라는 것으로, 은퇴한 공인 마법사에게 구입했고 가격은 3개월 계약에 대략 1천만 골드였다.
그렇게 하여 현재 운용할 수 있는 자금은 순수익의 절반인 3억 골드 정도지만 페르미가 추구하는 금액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태까지 벌어들인 운용자금의 600배에 달하는 돈을 벌 수 있는 거래가 들어왔다.
감정을 자주 드러내지 않는 페르미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이 미로에게 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감가상각으로 안전하게 마법을 추출하지. 그리고 거기에서 얻은 수익으로 마법을 강화시킨다.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굉장히 효율적인 능력이야. 다만 문제는 수수료겠지. 네가 여태까지 얼마를 벌었는지, 대체 어떤 마법을 구입하기 위해 이런 능력을 개발했는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페르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내가 무려 1,900억 골드짜리 거래를 제안했어. 그것도 수수료 99퍼센트로. 즉, 3년 동안 1,881억 골드가 네 손에 들어오는 거야. 지금까지 네가 구입했던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과연 네가 놓치려고 할까?”
“하하하! 하하하하!”
페르미는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웃음 속에 담긴 감정은 미로조차 알지 못했다.
갑자기 소리가 뚝 하고 그치더니 페르미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정답. 역시 고모는 속일 수 없네요.”
“당연하지. 그러니 알량한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다시 말하지만 내가 굳이 너를 찾아온 이유는 마법 추출에 대한 문제 때문이 아니야. 만약 시로네의 모라토리엄을 해제할 방법이 없다면 다른 규정외식자를 찾는 수밖에. 물론 1,900억 골드는 공중에 붕 뜨는 거고.”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이해했으니까 좀 들어 봐요.”
말은 그렇게 했으니 입은 한참 동안 열리지 않았다.
구부정한 자세로 턱을 괴고 있던 페르미가 지나가는 듯한 말로 고백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럴 줄 알았지. 뭔데?”
페르미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극히 어려운 일이죠. 모른 척하려고 했던 것도, 뭔가를 더 얻으려는 게 아니라 웬만하면 생각할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에요. 위험한 것은 둘째 치고 굉장히 비효율적이거든요.”
“그런 말을 들으면 아드리아스의 피가 끓지.”
“마법 사채업자들이 가끔 시도하는 경우가 있어요. 대부분 당사자가 사망해 버렸을 때. 그런 경우 남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죠.”
페르미가 테이블의 계약서를 낚아채며 서명란을 가리켰다.
“사인을 위조한다.”
“아하.”
미로는 영혼 없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어떻게? 마법적 계약서라면 대상의 의지가 반드시 들어가야 되잖아?”
“그래서 불법적인 방법이 필요하죠. 현재 시로네의 화신이 모라토리엄 상태라면, 화신의 복제품에게 사인을 하도록 만드는 겁니다.”
“화신을 어떻게 복제해? 설령 규정외식이라 하더라도 시로네의 화신이 잠든 상황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잖아.”
“복제하는 게 아니에요. 이미 ‘어딘가에’ 복제되어 있는 거죠.”
아리우스가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설마?”
미로가 아리우스를 돌아보았다.
“너도 알고 있어?”
“제가 드리모에서 미로 님의 트라우마를 찾아낸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인간의 정신은 꿈을 통해 드리모로 흘러들죠. 그렇다면 사망한 자의 정신은 어떻게 될까요?”
미로는 눈을 깜박거렸다.
“사망한 자의 정신은 더 이상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파편으로 쪼개져 다른 정보와 결합됩니다. 그 과정에서 결합이 불가능한 정보의 찌꺼기들은 최하층으로 퇴적되죠. 정신계 마법사들은 이 정보를 ‘마이너리티 컨셉션’이라 부릅니다.”
페르미가 말을 이었다.
“마이너리티 컨셉션은 세상을 구성하는 데 불필요한 정보들이에요. 너무 흔해서 다른 정보와 결합될 필요조차 없거나, 너무 개성적이어서 고립되었거나, 너무 기괴해서 배척을 당하거나, 모두 여기에 속하죠. 이 정보들이 최하층에 퇴적되어 만들어진 세계가 ‘디 어비스’라는 곳입니다.”
아리우스가 말을 받았다.
“그래서 심각한 것이죠. 정보는 독립적으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수많은 정보들과 결합합니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것만 존재한다면 이게 뭔지 몰라요. ‘빨강’, ‘과일’, ‘나무’, ‘햇살’ 등등 수많은 정보들이 서로를 지칭하면서 마침내 ‘사과’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반면에 마이너리티 컨셉션은 이러한 결합에서 배척된 것들입니다. 이 세계를 이루는 대부분의 정보들이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죠. ‘살인’, ‘고문’ 같은 것들은 그나마 세계가 포용합니다만, 그 이하의 정보들은 소수만의 전유물이죠.”
“그런 정보의 결합체가 디 어비스라는 거군.”
“네. 물론 이 세상의 어떤 정보든 결국에는 마이너리티 컨셉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보 엔트로피는 떨어지게 되고, 새로운 정보가 그 자리를 대체하니까요. 따라서 디 어비스는 이 세상의 정보들이 마지막에 도달하는 무덤과도 같은 것입니다.”
정보는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재료.
따라서 정보들의 최종 종착지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미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미래라는 건가?”
아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포칼립스. 간단히 말해 세상의 종말을 구현하고 있는 가상의 세계입니다.”
페르미가 덧붙였다.
“현재가 변하면 디 어비스도 변합니다. 하지만 그곳이 종말의 세계라는 건 변함이 없어요. 버림받은 정보들의 결합체니까요.”
“그리고 그곳에…… 시로네의 정보가 가라앉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페르미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가능합니다. 디 어비스를 지옥이라 부르는 이유는 사망자의 정보 또한 마이너리티 컨셉션이 되어 그곳에 쌓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로네처럼 모라토리엄 상태일 경우, 어떤 부분까지 마이너리티 컨셉션으로 잡혔는지는 알 수 없어요. 멀쩡할 수도 있지만, 상당히 훼손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정보를 복구시켜 계약을 체결한다면, 진짜 시로네가 계약한 것과 같은 효력을 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