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53
“제대로 복구만 된다면 가능해요. 어차피 현실의 시로네와 다르지 않은 정보니까요.”
아리우스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지? 생산적인 정보인 우리는 드리모로 들어간다고 해도 디 어비스로 떨어지지 않아. 만약 가려면 죽거나, 심각한 쇼크를 통해 정신을 파괴하는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러면 작전을 수행할 수 없을 텐데.”
페르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갈 수 있어요, 멀쩡한 상태로.”
미로와 아리우스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갈 수 있다고? 어떻게?”
“드리모로 들어간 정보는 다른 정보와 결합되죠. 극한의 숫자가 뒤엉키는 결합의 패턴은 무한대. 하지만 설령 인간의 기준에는 이상할지라도, 정보들은 완벽하게 얽혀 거대한 세계를 이룹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배척당한 정보만이 드리모 바깥으로 튕겨 디 어비스에 쌓이죠. 따라서…….”
페르미의 결론은 간단했다.
“우리도 튕겨 나가면 되죠. 드리모의 바깥으로 나가는 겁니다. 이 바닥에서 노는 사람들은 그 영역을 이렇게 부르죠. .”
미로조차 처음 드는 말이었다.
“마이너리티 컨셉션을 다루는 자들은 극히 폐쇄적이죠. 그들에게 현실은 딱히 중요하지 않아요. 언더 코더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 놀기 때문에 고모라도 생소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가 보시면 깜짝 놀랄 거예요. 꽤나 재밌는 세계들이 많거든요.”
“한마디로 변태라는 거잖아. 뭐, 네 취향까지는 굳이 묻지 않을게. 그럼 어떻게 로 들어가지?”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지금은 디 어비스로 가 봤자 소용이 없거든요. 시로네의 화신을 복구하려면 밀접한 교감을 나눈 자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잖아요?”
“흐음, 그럼 마법학교 친구들에게 부탁하면 어때?”
페르미가 손을 내밀었다.
“그건 안 됩니다. 학교는 제 밥줄이거든요. 마법학교가 아닌 곳에서 시로네와 긴밀한 교감을 나눈 자를 찾으세요. 또한 어느 정도 임무 수행 능력을 갖춘 자여야 하죠. 이 두 가지가 제가 제시하는 조건입니다.”
“네가 조건 내세울 때야? 돈 벌기 싫어?”
페르미도 이번만큼은 굽히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1,900억 골드의 거래를 앞에 두고도 학교를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은 페르미의 최종 목적이 단순히 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시로네를 깨우는 게 중요한 이상 지금 따져 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모라토리엄을 우회하려면 페르미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때 시녀가 문밖에서 일렀다.
“도련님, 식사 준비가 끝났습니다.”
페르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단 식사하시죠. 오늘은 여기서 보내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되겠군요. 그동안에 저도 로 갈 준비를 끝내겠습니다.”
“거래 성립이네.”
1층으로 내려가자 고기 파이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도너에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베이컨과 야채를 얹은 다음 치즈를 뿌려 오븐에 구운 요리였다.
미로는 치즈가 길게 늘어진 파이 조각을 크게 입을 벌리고 물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아, 너무 맛있어. 이거 먹고 싶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누가 보면 며칠은 굶은 줄 알겠다.”
엔리케의 말에 미로는 손가락 2개를 폈다.
“20년.”
차원의 벽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생리 현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으나 세상으로 되돌아오면서 모든 신진대사가 제자리를 되찾았다.
거핀이 전해 준 알 수 없는 비밀.
또한 이것이야말로 시로네가 127년의 결과를 대출할 수 있었던 이유일 터였다.
‘위조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 시로네의 담보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이 두 가지를 해결하려면 시로네와 깊은 교감을 이룬 사람을 데리고 와야 했다.
‘카샨에 가야겠네. 어차피 사인도 받아야 하니까.’
엔리케는 아예 대놓고 물어보았다.
“그래, 도대체 언제 이 집을 나갈 거냐?”
미로가 생각에 잠겨 대답이 없자 페르미가 대신 말했다.
“당분간 자주 왕래할 겁니다. 상담할 일이 있어서요. 그렇죠, 고모?”
“응? 아, 그렇지. 졸업은 안 하고 헛짓거리만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좀 가르치려고.”
“기대되는군요. 세계 최고의 마법사를 사사하다니.”
엔리케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살폈다.
가족에게조차 함구한다는 것은 이미 모종의 거래가 오고 갔다는 얘기.
또한 거래 상대가 미로라는 점에서 상식 밖의 일에 휘말렸다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더니, 이제는 자식까지 끌어들여?’
엔리케는 한숨을 내쉬며 체념했다.
미로와 얽히면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많이 겪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살면서 그만한 재미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래, 내버려 두자. 설마 지옥에라도 끌고 가겠어?’
제법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였다.
조력자 (4)
북北에이몬드 공화국.
철인의 독재자 이고르가 다스리고 있는 북에이몬드 공화국은 공포정치로 유명하다.
사회는 지극히 폐쇄적이고 국민들은 호전적이며 자국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에서는 자살 공격도 불사하는 성향 탓에, 강대국에서도 쉽게 점령하지 못하는 세계의 문제아라고 할 수 있었다.
도둑질을 하면 손목을 자르는 강력한 법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범죄는 끊이지 않는다.
공화국 자체에서 국민의 제1요건은 전투력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거리의 아이들조차도 작은 칼을 차고 다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유일하게 타국에 개방을 허락한 항구도시 도르미카는 온갖 전쟁 무기가 거래되는 서대륙의 시한폭탄이었다.
용병, 해적, 전역 군인 등이 이곳에 터를 잡고 있으며, 치안은 유명무실하다.
이고르의 강력한 권력으로도 어둠의 세력을 쓸어 내지 못하는 이유는 치안대 또한 다른 세력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다른 조직의 무기 거래를 허용하는 조건으로 돈을 받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치안대와 여타 조직의 대규모 전쟁이 치러지기도 한다.
항구에 들어오는 대부분이 무기를 실은 교역선이었고, 관광객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제 막 항구에 내린 푸른 머리의 한 여성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야, 여기가 북에이몬드구나.”
미로는 누가 보더라도 여지없는 관광객이었다.
긴 머리를 땋아서 목도리처럼 두르고 연한 화장을 했다.
표적이 되기 딱 좋은 액세서리를 치렁치렁 걸친 데다 소매가 손목 아래로 내려오는 긴 스웨터를 입고 치마는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로 짧아서, 전체적으로 발랄한 인상이었다.
도르미카에서 이런 차림새를 한 여성은 몸을 파는 여자거나 정신을 어디다 팔아 버린 백치밖에 없을 것이다.
“휘유! 아가씨, 배짱 좋은데? 굶주린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그렇게 살결을 드러내고 다니면 잡아먹어 달라는 소린가?”
생선 납품하는 일을 하는 인부들이 다가왔다.
방수 작업복은 비린내가 심했고, 허리띠에 식칼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대머리 남자가 미로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어때, 우리랑 같이 노는 게? 아주 끝내주게 재밌는 곳을 알고 있거든.”
“어머, 마침 나도 비슷한 곳을 찾고 있었는데. 거기가 어디예요?”
“어디긴 어디야? 바로 여기지.”
남자는 미로의 손을 자신의 사타구니로 가져갔다.
“푸하하! 어때? 대왕고래 뺨치지? 난 한번 잡은 고기는 절대로…… 으아아아악!”
남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아래를 붙잡고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내, 내……!”
고통에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인부들이 식칼을 꺼내 들고 미로를 둘러쌌다.
“이게 미쳤나! 너 우리가 누군 줄 알아? 제임스 수산에 잘못 걸리면 그날로 물고기 밥 되는 거야!”
미로는 더러운 것이 묻은 듯 옷에 손을 쓱쓱 닦아 내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아, 됐고. 혹시 너희들, 오스토스 주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벌일 듯 다가오던 남자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오스토스 주점이라면 도르미카라는 무법 지대에서 고유의 법을 관철시킨 세 가지 세력 중의 하나가 있는 곳이었다.
“너 정체가 뭐야? 만약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거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무슨 꼴을 당하게 될지는 상상에 맡기마.”
간혹 그런 경우가 있다.
백도 없고 힘도 없는 것들이 제 한목숨 건지기 위해 오스토스 주점을 들먹거리는 일이.
그곳에서 세운 규칙인 ‘외부인 공격 금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쪽 지리를 잘 몰라서 말이야. 오스토스 주점에 있다고 하던데.”
두려운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고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미로가 다가오자, 인부 또한 확인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거기에서 누구를 찾지?”
상가 쪽을 살피던 미로가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타락한 성모.”
인부에게 들은 길을 따라 오스토스 주점 앞에 도착한 미로는 4층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1층과 2층은 주점이었고 3층은 숙박소, 4층은 도박장이었다.
하지만 미로가 향한 곳은 일반인에게는 열려 있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곳, 오스토스 주점의 지하 깊숙한 곳이었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자 큰 문 앞에 2명의 검사가 지키고 있었다.
지상에서도 경계의 기운을 느꼈지만 여기서부터는 살기의 기질부터가 달랐다.
“흐음, 역시 수완이 좋네.”
이런 수준의 검사를 문지기로 둘 정도라면 거의 망한 조직을 전성기에 준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렸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무엇보다 고작 1년 사이에 이룬 성과라는 점에서 신뢰감이 더 들었다.
“뭐야, 너? 누가 들여보냈지?”
“아무도 들여보낸 적 없는데?”
문지기들이 서로를 돌아보더니 곧바로 검을 꺼내 들었다.
“정체를 밝혀라. 이곳은 말장난이 통하는 곳이 아니야.”
“어머? 난 진짠데.”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미로가 문지기 앞에서 두 손을 내밀었다.
반야의 관음장이 바람처럼 밀려들면서 문지기를 밀어 버리고 문이 덜컹 열렸다.
40평 규모의 방에 10여 명의 인물들이 마음대로 흩어져 나름의 소일거리를 하고 있었다.
석벽으로 둘러싸인 방은 지하 무덤처럼 음침했으나,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불청객의 등장에도 어느 하나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테이블 쪽에 앉아 담배를 물고 카드 게임을 하는 3명의 남성은 아예 문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크윽! 습, 습격입니다.”
문지기가 뒤늦게 기어들어 와 일렀으나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해먹에 누워 술병을 나발 불고 있던 한 남자가 트림을 거하게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알아, 자식아. 우리도 뇌 있거든! 이번엔 누구 손님이야? 스나이드, 너냐?”
굵직한 시가를 문 거구의 남자가 카드 패를 뽑아 들며 말했다.
“몰라. 이 근방에 몸 파는 여자 중에 저렇게 곱상하게 생긴 애는 없어.”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해먹에 누워 있던 남자가 짜증 난 듯 소리쳤다.
“아, 진짜! 아무나 나서서 뭐라도 좀 해! 습격이라잖아!”
“그럼 네가 하면 되겠네.”
“푸하하하!”
저마다 따로 노는 간부들의 모습을 미로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때 거구의 남자가 가리고 있는 뒤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너 누구니?”
남자가 시야를 열어 주자 고양이를 닮은 단발머리의 여성이 테이블에 앉아 주판을 튕기는 게 보였다.
옆에는 눈썹이 없는 창백한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는데, 밀랍 인형처럼 보일 만큼 표정이 없었다.
“당신이 타락한 성모인가?”
“그렇게 부르는 멍청이들도 있기는 하지. 그런데 너 누구냐니까?”
미로는 딴소리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갈리앙트에서 그렇게 당하고 정신 좀 차린 줄 알았더니. 여전히 도적단을 못 벗어났네.”
철컥! 철컥!
말이 끝나는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두가 각자의 무기로 미로를 겨누었다.
동작이 너무나 신속해서, 당하는 입장에서는 마치 두 장의 그림이 순식간에 교체된 기분이었다.
미로는 오른쪽을 흘겨보았다.
어느새 눈썹이 없는 남자가 다가와 마정탄을 장착한 건을 관자놀이에 대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다. 정체를 밝혀라.”
“글쎄. 과연 누굴까?”
마정탄의 방아쇠에 걸려 있던 손가락이 구부러지는 것과 동시에 여자가 말했다.
“그만둬라, 프리먼.”
미로는 일단 합격점을 주었다.
상대의 역량을 가늠할 정도도 되지 못한다면 디 어비스에 들어갈 자격조차 없는 셈이니까.
“갈리앙트라는 말을 꺼냈다는 것은 내가 누군지도 알고 있다는 거겠네?”
“물론이지. 앵무 도적단의 단장, 클레이 마르샤.”
일전에 갈리앙트 섬에서 시로네 일행과 치열한 사투를 벌인 끝에 패배한 도적단의 수장.
테라제의 첩보를 통해 들은 바에 의하면 탁월한 모사꾼에 규정외식자다.
양부에 대한 트라우마로 타인의 마법을 추출하는 능력을 구사했었으나, 현재는 시로네에게 ‘카타르시스’를 당해 다른 능력으로 대체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서류를 치워 버린 마르샤는 그제야 미로 쪽으로 돌아앉아 다리를 꼬았다.
긴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자 프리먼이 신속하게 돌아와 불을 붙여 주었다.
“그래, 내가 클레이 마르샤야. 그럼 뭐 날개 달린 천사라도 앉아 있을 줄 알았어?”
“이런, 시로네가 들으면 서운하겠네.”
시로네라는 말에 마르샤의 눈썹이 미묘하게 흔들렸으나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곰방대를 다시 물었다.
“아, 그 꼬맹이? 어떻게 시로네를 아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거든. 배운 게 도적질이기도 하고.”
어떤 강함은 소중한 것을 내치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만만치 않은 여자라는 걸 깨달은 미로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로네에게 조금 문제가 생겼어. 그쪽이 와 주면 해결에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마르샤는 고민하는 티조차 내지 않았다.
“미안. 요즘 바빠서. 다른 사람 알아봐.”
“사실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야.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자초지종 따위 알지 못해도, 마르샤는 눈에 그려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모든 걸 던졌을 터였다.
“딱하게 됐네. 그런데 이미 짐작하겠지만, 시로네는 내가 좋아하는 취향이 아니야.”
갈리앙트를 떠나 세상을 떠돌면서 세력을 키워 왔다.
강력한 부하들을 아래로 두었고, 북에이몬드의 항구도시에 정착해 치열하게 싸우는 와중에 시로네에 대한 기억도 차츰 잊혀 갔다.
“좋아. 내가 잘못 찾아왔네. 바쁜 시간 뺏어서 미안해.”
미련 없이 몸을 돌린 미로는 이를 뿌드득 갈고 있는 문지기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문을 나섰다.
페르미는 시로네와 감정적으로 깊이 교류한 자를 원했고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마르샤는 1순위 대상이었으나, 이미 마음이 떠났다면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잠깐.”
마르샤의 부름에 미로가 다시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