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57
페르미가 미소를 지으며 전방을 가리켰다.
“여기가 바로 정신의 끝입니다.”
딱히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저 멀리 초원에서 봤던 석양이 눈앞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벽에다 그린 그림처럼, 멀리서 봤을 때와 크기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정보가 더 이상 생성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이 경계선을 넘어가면 언더 코더의 영역이 됩니다.”
미로가 씩씩하게 소매를 걷으며 걸음을 옮겼다.
“좋아,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석양 앞에서 잠시 멈춘 미로가 결심한 듯 몸을 밀어 넣자 마치 환영의 장막처럼 그녀의 몸이 안으로 사라졌다.
인더 코더 (3)
리안과 페르미, 마르샤는 미로의 뒤를 따라 석양의 장막을 넘어갔다.
밤하늘처럼 어두운 공간에 푸른 빛을 내는 선들이 수직으로 질주하고, 그 선을 따라 별처럼 반짝이는 광채가 내려가고 있었다.
“추락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정보가 전송되는 것이니까요. 중력은 관계가 없습니다.”
리안은 미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여기가 인가?”
“입구라고 할 수 있죠. 드리모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정보는 마이너리티 컨셉션으로 치부됩니다. 드림 스타의 약효가 사라지면 우리도 분해될 겁니다.”
“위험하지는 않은 거야?”
“네. 화신이 훼손되지 않았으니까요. 다른 정보와 결합될 일이 없기 때문에 온전한 상태로 내려갈 겁니다.”
“아리우스는?”
그러고 보니 푸른색 털을 가진 개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화신이 아니에요. 우리의 정신 채널을 통해서 나타난 환영이죠. 여기까지는 정신이 미치지 못한 것 같군요.”
미로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상관없어. 알아서 연락할 방법을 찾겠지. 안되면 할 수 없는 거고.”
드림 스타의 약효가 사라지자 네 사람의 몸이 반짝이는 입자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사지부터 시작된 분해가 하체와 상체를 지나 얼굴만을 남겨 둔 시점에서 페르미가 말했다.
“증간층에서 보죠.”
“그게 무슨…….”
마르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원의 몸이 빛의 가루로 분해되어 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아우, 머리야.”
미로가 인상을 찡그리며 정신을 차리자 리안과 페르미, 마르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간층이라는 게 무슨 뜻이야?”
페르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바로 이곳이죠.”
100평가량 되는 정사각형의 방에 수백 개의 거울이 달려 있었다.
“이곳은 의 중간 지점, 인간이 만든 가상의 공간입니다. 드리모에서 버려진 고물 정보를 재활용해서 작은 세계를 만드는 거죠. 화신이 온전한 상태의 인간이라면 모두 필터를 거쳐 여기에 도착합니다.”
에 찍힌 인간의 발자국 앞에서, 마르샤는 새삼 인간이 얼마나 탐험에 미친 종족인지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거울은 뭔데?”
“설계자들이 만든 가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죠. 링크라고 부릅니다. 거울은 그들이 정한 통신 규약이에요.”
“흠, 각기 다른 가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거지? 어떤 세계들이 있는데?”
페르미는 감가상각의 거래를 시전했다.
가로 네 줄, 세로 네 줄의 섬광이 벌집처럼 얽힌 그림이 그려진 칩이 그의 목구멍 속으로 넘어갔다.
“정보 마법 인포메이션. 중간층의 프로토콜을 현실의 정보로 해독시켜 줍니다.”
스피릿 존을 펼치자 거울의 표면에 가상 세계의 명칭과 설계자의 코드명이 현실의 언어로 드러났다.
“이곳, 중간층의 입구에는 현재 가장 인기 있는 가상 세계의 링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몇 개 읊을 테니 마음에 드는 세계가 있으면 골라 보시죠.”
페르미는 세계의 이름과 설계자의 코드명을 나열했다.
인간의 맛-ID : 싸는 돼지
개와 사람의 사랑 이야기-ID : 동물 애호가
팔다리쯤 없어도 괜찮아-ID : 머리만 남았다
“그만!”
마르샤가 더 읽을 가치가 없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세계의 이름을 곰곰이 들어 보면 현실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 연상되었다.
‘인육을 먹거나, 수간을 하거나, 신체 절단 같은 것을 하는 세계라는 거로군.’
더욱 가관인 것은 세계의 이름과 연결되는 코드명으로,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온갖 마이너리티 컨셉션의 향연이네. 그 세계에 들어가면 실제로 해 볼 수 있다는 거야?”
“그냥 구경만 하는 사람도 있고, 실제로 플레이하는 사람들도 있죠. 비율은 5 대 5 정도 돼요.”
“당연히 공짜는 아닐 테고?”
마르샤의 말에 페르미는 피식 웃었다.
대가를 바라고 이런 세계를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부터가 마르샤가 정상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콘텐츠의 80퍼센트가 무료예요. 설계자의 대부분은 그냥 현실 세계에 아무 미련이 없는 미친놈들이죠. 유료 콘텐츠를 이용할 경우에는 드림 스타로 지불하면 돼요. 그들이 필요한 것은 오직 드림 스타뿐이고, 현실에서는 화폐로 교환도 가능하니까요.”
미로가 말했다.
“대충 이해했어.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들어가지?”
“어떤 링크를 타든 정보는 계속 추락하게 돼요. 아무 곳이나 선택해도 종착지는 결국 디 어비스입니다.”
“그럼 저기로 가자.”
미로가 큼지막한 거울을 가리키자 페르미는 인포메이션 마법을 통해 어떤 세계인지 살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ID : 흐물흐물한 시체
시체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세계였고, 페르미는 초심자에게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링크를 타고 이동하는 건 간단해요. 이면 세계의 원리죠. 그냥 이렇게 거울에 손바닥을 대면…….”
페르미의 모습이 사라졌다.
“흐음, 확실히 간단하네.”
다음으로 미로가 손바닥을 대자, 현실의 그녀와 거울에 비친 그녀의 실체가 역전되면서 풍경이 돌변했다.
마치 처음부터 거울에 비친 모습이 진짜 자신이었던 듯한 느낌에 미로는 이면 세계의 원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편리하네. 이거라면 정보를 통째로 전송할 수 있겠어.”
기다리고 있던 페르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거죠.”
잠시 후 리안과 마르샤까지 도착하자 일행은 본격적으로 중간층의 세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간이 구축한 가상 세계는 크기도 제각각이었고 구성이나 환경도 저마다의 특색이 담겨 있었으나, 눈을 뜨고 보기 힘들만큼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는 건 공통적이었다.
끔찍한 비명 소리, 역겨운 행위들, 쾌락 혹은 고통에 미쳐 버린 사람들의 표정은 이미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었다.
링크를 타고 마흔 번째 세계에 도착할 무렵에는 규정외식자인 마르샤도 정신적으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무상심의 미로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으나 페르미가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즐거워한다는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페르미를 흘끗 살피던 미로가 물었다.
“이런 곳이 꽤나 익숙한 모양이네. 얼마나 자주 를 이용한 거야?”
“요즘은 오지 않아요. 열두 살 무렵에는 완전히 빠져 살기도 했지만, 요새는 흥미가 안 생기더라고요.”
‘열두 살이라…….’
20년 만에 만난 조카지만 미로는 페르미가 결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끔찍한 비명 소리에도 개의치 않고 페르미가 말을 이었다.
“한때는 저도 이곳의 설계자였어요. 세계의 이름은 복수는 나의 것. 증오하는 대상을 구현하여 마음껏 복수를 할 수 있는 가상 세계였죠. 거기에서 고모도 저에게 꽤나 많이 괴롭힘을 당했어요.”
아무리 가상이라지만 자신과 똑같은 정보를 구현시켜 놓고 고문한 당사자와 함께 걷는다는 건 섬뜩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미로는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인기 좀 끌었겠는데?”
“아뇨. 초반에는 중간층 인기 순위 1천 위 권 내에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갈수록 게스트가 줄어들었어요. 새로운 정보가 갱신되지 않으면 중간층에서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제가 만든 세계는 디 어비스로 가라앉아 버렸죠.”
“흐음, 안타까운 일이네.”
“당시에는 자존심이 상했죠. 어떻게 하면 인기를 끌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어요. 나는 고모를 고문하고 죽이면서 재밌었는가? 생각해 보니 아니었던 거예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미로는 손가락으로 턱을 짚고 궁리해 보았다.
“으음, 글쎄. 진짜가 아니라서?”
“아뇨.”
페르미가 걸음을 멈추고 미로를 돌아보았다.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갇혀 있는 것만이 진짜다.
뚜껑이 열리는 순간 모든 개념은 바깥으로 튀어나와 새로운 의미로 변질되기 마련이었다.
“언제든 나갈 수 있어,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모든 감각은 가짜가 되어 버리죠. 그때부터 여기는 안 왔어요. 저 같은 현실주의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거든요.”
‘언제든 나갈 수 있다.’
미로는 페르미의 말을 음미했다.
인간이 만든 가상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과연 이 현실 속에서 그 생각을 진심으로 할 수 있는 자는 그녀를 포함해 아무도 없을 터였다.
“이제 도착했군요. 여기가 마지막 가상 세계입니다.”
링크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신체의 일부분을 절단하여 서로에게 바꿔서 달아 주는 가상 세계였다.
어째서 그것이 즐거운지는 알 수 없으나 사지가 잘린 자들은 황홀해했고, 팔을 여러 개 붙인 인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그것을 빠져나오자 마침내 어두운 조명에 거울 하나만이 설치된 방이 나왔다.
페르미는 인포메이션 마법을 시전하여 정보를 해독했다.
경고. 이곳은 중간층의 출구입니다. 디 어비스로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라고 적혀 있군요.”
“꿈에서 깬다는 건, 그냥 기다리면 되는 거야?”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다. 를 즐기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죠. 하지만 그것도 인간이 만든 세계이기에 가능한 거예요. 디 어비스는 마이너리티 컨셉션의 자동 집합체입니다. 어떤 정보도 우리를 배려해 주지 않을 거예요.”
페르미는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경고하지만 일단 디 어비스에 들어가면 돌아올 방법은 저조차도 몰라요. 어쩌면 방법 따위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확실히 있어.”
미로가 말했다.
“내 친구는 돌아왔으니까. 그러니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물론 지금은 다시 그곳으로 가 버렸다는 얘기는 굳이 꺼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르샤가 물었다.
“가기 전에 들어 두고 싶은데, 시로네가 정확히 어떤 상태로 디 어비스에 존재하는 거지? 완전히 다른 세계라면 적응의 문제도 있잖아. 마법학교가 있을 것 같지는 않는데.”
“정보의 결합 패턴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어요. 다만 디 어비스의 세계에서 가장 적합한 형태로 결합되어 있을 겁니다. 마법학교가 있다면, 당연히 그곳의 학생일 거고요.”
“흐음, 그러니까 결국 가장 익숙한 정보들끼리 결합된 상태로 존재한다는 거네.”
“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두 사람이라면 다름 아닌 마르샤와 리안이었다.
“현실에서 강렬한 교감을 나눈 우리라면 시로네와 정보 친화력이 높을 거라는 얘기지?”
“네. 두 사람의 정보가 밀접하게 침투할수록 시로네의 훼손된 정보가 복구될 확률도 높아지겠죠. 즉, 디 어비스와 결합된 정보를 끊고 여러분의 정보를 주입하는 겁니다.”
“좋아, 이해했어. 그럼 들어가 보자.”
네 사람은 디 어비스로 가는 마지막 거울을 바라보며 나란히 멈춰 섰다.
돌아올 방법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그곳의 세계는 의 중간층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최악의 정보들이 집적되어 있을 터였다.
‘정보의 종착지. 즉, 이 세계의 종말.’
를 밥 먹듯이 드나들었던 페르미조차 내려가 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인 만큼 긴장이 되는 건 당연했다.
미로는 심호흡을 하고 거울을 가리켰다.
“자, 그럼 누구부터 시작할까? 지옥 여행의 첫 번째 관광객이 될 사람 말이야.”
누가 나설 기회조차 주지 않고 리안이 말했다.
“내려가서 기다리겠습니다.”
리안이 손을 내밀자 거울을 경계선으로 2명의 리안이 오른손을 맞댔다.
거울 속의 리안이 진짜가 되면서 현실에 있던 리안의 육체가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듯 사라졌다.
“와우, 역시 남자네.”
“흥, 가 보자고. 설마 죽는 것보다 심한 일이야 있겠어?”
마르샤가 이어서 링크를 타고 빠져나가자 미로는 페르미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너도 가야지? 돈 벌어야 할 거 아냐? 아니면 나만 보내 두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나?”
“설마요.”
페르미는 씁쓸하게 웃으며 거울에 손을 댔다.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디 어비스에 빠트린 정도로 천하의 미로에게 복수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차근차근 해 나가는 거야.’
페르미가 디 어비스로 들어가자 미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아. 네가 있는 곳이니까.”
남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미로는 끝없이 빠져드는 지옥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최후의 세계 (1)
디 어비스는 현재의 정보를 기반으로 미래의 종말을 구현시킨 가상의 세계다.
정보의 쓰레기장에서 크기를 가늠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만, 미로 일행은 시로네를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디 어비스가 아무리 방만해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세계의 정보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다만 정보의 종착지이기에, 그 세계는 현재 정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일 것이다.
당연히 시로네의 정보 또한 디 어비스가 ‘가장 적합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스며들어 있었다.
누군가가 처음으로 지었을 이 세계의 이름은, 아포칼립스였다.
* * *
폐허의 마천루.
빌딩은 살점이 발린 생물처럼 철골을 드러냈고, 자동차는 시동이 꺼진 채로 화석처럼 제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하메이, 빨리 와, 빨리!”
지독한 폐허 속에서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소년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태양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인종으로, 수차례의 핵전쟁과 우주적 규모의 재난을 겪은 인류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녹색의 머리카락에 까무잡잡한 피부는 광합성으로 생명 활동을 하는 그들만의 특징이었다.
그렇기에 소화기관은 수분을 섭취하는 데에만 필요하고, 물보다 험한 음식은 재미로라도 삼키지 않았다.
“고마워, 오빠. 우드가 오빠가 따라와 준다고 해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어려운 부탁을 해서 미안해.”
“아직 꼭지도 안 떨어진 게 어른처럼 말하는 거 아냐.”
한 살 터울이지만 우드가에게는 이제 막 ‘채집’을 시작하려는 하메이가 어리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