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62
“내가 상대하지.”
대검의 손잡이를 쥐고 리안이 발을 내딛자 페르미가 손을 들어 말렸다.
“아뇨. 어떤 마법이든 상성은 있는 법. 그렇다면 모든 마법을 구사하는 제가 적격이죠.”
페르미가 칩을 삼키는 것과 동시에 일렉트릭라이거가 전기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라이트닝 선더.’
강력한 뇌전이 쾅쾅쾅 하고 세 번 내리치자 일렉트릭라이거가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퍼져 버렸다.
“물론 진정한 마법사는 어떤 상성이든 깨부수지만요.”
마르샤가 삿대질을 했다.
“웃기고 있네. 그냥 돈 아까워서 그런 거지?”
“물론 그런 부분도 있고요.”
미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영악한 녀석.’
아포칼립스는 코드로 이루어진 세계.
따라서 페르미는 전기 계열의 능력이 괴물의 정보인지 세계의 정보인지를 확인하려고 했던 것이다.
‘괴물의 정보라면 전기는 면역. 하지만 페르미의 전격은 제대로 들어갔다. 따라서, 가상의 세계지만 현실과 똑같이 화신과 율법이 분리되어 있다.’
페르미는 턱을 톡톡 치며 생각했다.
‘적어도 우리에게 있어 이곳에서의 죽음은 현실의 죽음을 의미한다. 가급적 빨리 시로네를 찾는 게 관건이야.’
마르샤가 물었다.
“그런데 카지노 칩 말이야, 얼마나 삼킬 수 있는 거야?”
“위장의 크기만큼은 들어갈 수 있죠. 다만 과용하면 두통이나 구토 증상 정도는 있을 겁니다. 왜, 거래하시게요?”
“작전에 필요하다면. 일단 생각 좀 해 볼게.”
페르미는 마르샤를 유심히 살폈다.
‘규정외식자라고 했지.’
예전에는 마법 추출 방식이었지만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면 현재의 능력은 다를 공산이 컸다.
“그나저나 그쪽의 능력은 뭐죠? 왠지 저만 까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은데요.”
“그거야 너는 브로커니까. 상품 소개는 기본이지. 나는 아직 밝힐 수 없어. 이유는 알고 있잖아?”
페르미가 말을 돌리며 검지를 겨누었다.
“문신이 예쁘군요. 무슨 의미라도?”
곰방대를 쥐고 있는 마르샤의 왼쪽 손등에 작은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손잡이 부분이 연기처럼 표현된 십자가 형태의 단도였다.
“갈리앙트 섬을 떠난 뒤에 새긴 거야. 여기 말고도 몇 군데 더 있어. 예를 들자면…… 여기.”
치마춤으로 손을 넣은 마르샤는 배꼽 아래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었다.
“궁금하면 보여 줄까? 확인해 볼래?”
마르샤의 의미심장한 눈빛에 페르미가 고개를 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런 취미는 없어서.”
더 이상의 관심은 생명과 직결된 문제일 것이다.
“그만 들어가죠. 해가 지고 있으니.”
리안을 선두로 지하철 입구의 계단을 내려가자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열차가 전복되어 있었다.
미로가 샤이닝 마법으로 불을 밝히며 말했다.
“다행히 점액은 없네. 그래도 입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는 말자.”
끼야아아아아!
말이 끝나는 순간 터널 저편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밀려들어 왔다.
“살려 주세요! 제발!”
“먹자! 먹자! 우리는 먹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터널에 메아리치자 미로 일행은 즉각 공격 태세를 갖췄다.
“어이, 이봐.”
철로 옆에 있는 환풍구가 덜컹 떨어져 나가면서 남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쪽으로 가면 안 돼. 지하인들에게 잡아먹힐 거야. 살고 싶으면 이쪽으로 오게.”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어차피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끼야아아아아!”
또다시 비명 소리가 들리자 미로가 결정을 내렸다.
“따라가 보자. 누구랑 싸우든 최소한 말이 통하는 쪽이 편하겠지.”
‘그러고 보니…….’
남자는 그들의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미로 일행이 환풍구 아래로 뛰어내리자 좁다란 터널이 이어져 있었다.
그로부터 수십 미터를 걸어간 남자가 벽에 설치되어 있는 철문을 열고 말했다.
“들어오게. 여기가 내 집이야.”
기관실을 개조한 집에는 디지털 음원 재생기나 모니터 등,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손님이 왔어. 차를 준비해 줘.”
아내에게 부탁한 남자가 미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인간이군. 자네들 어비스 워커지?”
“어비스 워커?”
남자는 시작을 잘못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언더 코더를 통해서 들어온 사람들 말이야. 정보의 손실이 없는 멀쩡한 인간.”
미로가 말했다.
“맞아. 그렇다면 당신도?”
“꽤나 오래전의 일이지. 현실 세계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아내가 차를 내오자 남자가 자리를 권했다.
“앉게. 내 이름은 몰타. 당신과 똑같은 마법사지. 이쪽은 내 아내 큐리아.”
“안녕하세요? 몰타의 아내예요.”
미로가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마법사라고? 그런데 왜 여기에 떨어진 거야?”
“이 세계의 이름은 아포칼립스야. 디 어비스의 일부분이지. 어쩌면 자네들과 같은 이유일지도 몰라. 아내를 찾기 위해 내 발로 이곳에 들어왔어.”
페르미는 이런 얘기를 듣고도 반응이 없는 큐리아의 모습에서 깨달았다.
‘정보가 손실되어 있군.’
“현실 세계의 아내는 식물인간이야. 나도 제법 잘나가는 마법사였기에 백방으로 방법을 찾았지만 허사였지. 그래서 내가 들어온 거야, 아내가 있는 이 지옥으로.”
“하지만 아내는…….”
“가짜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어? 내가 이 세계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현실의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그러자 모든 게 명료해졌어. 내가 머물 곳은 여기라는 것을.”
“나갈 방법은 없는 거야?”
몰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 어떤 수단을 써도 디 어비스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고. 어떤 정신병자가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정신병자?”
“가올드라는 인간이었지. 내가 봐도 미친놈이었어. 머리는 산발에 눈은 퀭하고, 몸은 피골이 상접해서 지하인들이 뜯어 먹을 것도 없겠더군.”
미로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만났다고? 지금 어디에 있지?”
“이미 떠났어. 현실로 돌아간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나갈 거냐고 물었지. 그러니까 그 미친놈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몰타가 황당하다는 듯 두 팔을 펼쳤다.
“지옥을 나가려면 지옥의 끝으로 가면 된다고 하더군. 하하! 그런 생각은 누가 못 해?”
미로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여전히 나아가고 있구나, 가올드.’
화신은 잠들었어도 그를 이루는 정보는 종말의 세계에서조차 극단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사실, 시도를 해 보지 않은 건 아니야.”
몰타는 소파용 테이블 아래에서 직접 그린 전지 크기의 지도를 펼쳤다.
“그의 말대로 해 보려고 나간 적이 있지. 하지만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어. 도시를 벗어나면 온통 사막, 사막, 사막뿐이야. 아마도 그 인간은 죽었을 거야.”
“아니, 내 친구는 죽지 않아. 내가 죽기 전까지는.”
페르미가 지도에 찍힌 점을 가리켰다.
“여기가 우리의 위치인가요?”
“그렇지. 이곳에 살기로 작정하면서 샅샅이 조사했어. 일단 이 세계는 지하에 시설이 많아. 건물에도 방이 수백 개나 있지. 어떤 곳은 점액으로 가득 차서 들어가지도 못해. 여기서는 그걸 뮤커스라고 부르더군.”
“나무 기호와 태양 기호는 뭐죠?”
“생명나무와 군락이야.”
몰타는 태양의 아이들이란 종족에 대해 말해 주었다.
“이 도시에 생명나무는 3개, 그래서 군락도 3개가 있지. 각기 다른 집정관이 다스리고 있어. 딱히 호전적이지는 않지만, 문제는 지하인이야.”
“동굴에서 들렸던 괴성?”
“그래. 생김새는 인간하고 비슷하지만 스키마를 구사하는 것처럼 날렵하지. 광합성을 못 하기 때문에 주로 사냥을 해. 이상한 무기를 쓰니까 가급적 피하는 게 좋을 거야.”
할 말이 떨어진 남자가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도 좋아. 어차피 나에게는 이제 쓸모가 없으니까.”
“아, 그럼 감사히…….”
리안이 지도를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 페르미가 말했다.
“아뇨, 외웠습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부터 군락을 중심으로 살펴보죠.”
“…….”
리안의 손이 슬그머니 거두어졌다.
“쉬는 거야 문제가 아니지. 전진기지로 삼아도 좋고. 나도 오랜만에 사람을 만나니까 기분이 좋군. 저번의 그 미친놈은 제외하고 말이야.”
“고마워요. 그럼 당분간 신세 좀 질게요.”
“시설은 마음껏 이용해도 좋아. 마법사인 덕분에 물은 충분하지. 전기를 충전하는 법도 배웠어. 이 세계는 편리한 게 많더군. 씻고 싶으면 욕실을 이용하게.”
몰타의 호의적인 미소를 바라보던 마르샤가 곰방대를 뻑뻑 빨아 대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내가 먼저 씻을게. 점액이 튀었는지, 찝찝해.”
“버튼을 누르면 물이 나올 거야.”
몰타의 배려에 손을 들어 준 마르샤는 욕실로 들어가 온수를 틀고 옷을 벗었다.
“후우, 피곤해.”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방울에 몸을 맡긴 그녀는 전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문신은 7개.
왼쪽 손등, 오른쪽 손바닥, 가슴골 사이, 배꼽 아래, 왼쪽 허벅지 안쪽, 엉덩이뼈 위, 마지막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물론 실제로 몸에 새긴 것이 아니라, 규정외식 ‘패륜의 단도’를 발동하기 위한 마법적 문신이었다.
‘시로네…….’
어린 시절 양부에게 당했던 상처는 한 소년이 준 카타르시스로 인해 위로를 받았다.
-날 죽여도 좋아.
물론 트라우마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상처를 적극적으로 이겨 내려는 마음가짐이 생겼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삶의 가치였다.
‘이것으로 빚을 갚을 수 있다면…….’
규정외식을 해제하자 일곱 개의 문신이 사라졌다.
샤워를 끝내고 몸을 닦은 그녀는 처음 보는 최신식 변기를 유심히 발견하고 턱을 괴고 앉았다.
“그나저나 이번 일이 끝나면 얼마를 받을 수 있으려나? 슬슬 사업을 확장해야 하는데. 응?”
볼일을 마친 마르샤는 주위를 살폈다.
“휴지가…….”
일반적으로 휴지가 있어야 할 곳에 초록색과 붉은색 버튼이 달려 있었다.
“뭐지?”
초록색 버튼을 누르자 좌변기 밑에서 강한 수압의 물이 쭉 쏘아졌다.
몸을 움찔한 마르샤가 놀란 표정으로 일어서서 물이 나온 곳을 살폈다.
“뭐, 뭐야? 몬스터인가?”
익숙한 사람에게는 별게 아니겠지만 이보다 과거에서 살았던 마르샤에게는 엄청나게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이걸 그냥……!”
마음 같아서는 박살을 내 버리고 싶지만 얹혀사는 입장에서 기물을 파손할 수는 없었다.
“…….”
그로부터 5분 뒤.
“아, 시원해.”
마르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자 페르미와 계획을 짜고 있던 미로가 고개를 돌렸다.
“물은 괜찮아?”
“깨끗해. 아, 맞다. 미로 씨.”
“응?”
마르샤의 입가에 고양이처럼 간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화장실 안 갈 거야?”
그날 밤 자정.
도시 북서쪽 군락에 거대한 빛의 구체가 떠올랐다.
그런 문제 (2)
* * *
“라의 화신이시여! 우리에게 영생을! 죽지 않는 육체를!”
함성 소리가 도시 바깥으로 퍼져 나가자 간부들은 지상을 돌아보며 지하인이 움직이는 낌새가 있는지 확인했다.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기에 신관이 앞으로 나와 자연스레 의식을 진행시켰다.
“이제부터 군락의 집정관을 정하겠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집정관이 분노와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소리쳤다.
“저놈은 고대인이다! 우리의 노예란 말이다! 위대한 태양의 아이들이 어떻게 노예에게 지배를 당할 수가 있겠는가!”
목숨을 건 항변에 사람들은 웅성거림으로 답했다.
태양의 아이들에게 빛은 유일한 양식이지만, 하루아침에 노예에게 지배당하는 상황은 확실히 달갑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태양의 아이가 아닌 자가 어떻게 빛을 구사할 수 있겠는가? 속임수를 쓴 것이다. 신의 언어가 아니다! 만약 훗날 능력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 그때 너희는 무엇으로 어둠을 버틸 것인가?”
사람들이 설득당하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박쥐의 날개가 달린 깡마른 인상의 남자가 신관에게 다가갔다.
수호자 중의 1명인 에크서였다.
“신관, 저 소년에게서 신의 언어를 봤나?”
신관이 에크서에게 대답하는 동안 시로네는 집정관에게 다가가 일을 크게 키우지 말자는 뜻을 전했다.
“이봐, 난 이 대결에서 무언가를 얻을 생각은 없어. 위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나도 이 군락에 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