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68
마르샤가 준비된 멘트를 꺼내자 시로네의 머리에 또다시 극심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크윽!”
미로, 마르샤, 페르미.
좋든 싫든 현실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대체 이들은…….’
시로네의 정보 속에 그들의 정보가 자연스럽게 맞물리면서 새로운 기억이 탄생했다.
요정의 후예.
사회에서 소수만이 섞여 있는 요정족의 후예이기에 특별한 능력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도와줘! 요가 잡혀갔어! 지하로 갔을 거야!”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어른도 아이들의 소꿉놀이에 끼어들지 않듯, 열린 상태의 사람들에게 이곳의 일은 무의미했다.
“역시 예상대로군요. 일단 제압하죠.”
“페르미……!”
페르미를 돌아본 시로네는 요정 사회에서 지독히도 자신을 괴롭혔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를 뿌드득 갈았다.
“싸울 시간 없어. 도와주지 않겠다면 혼자서라도 요를 구하러 갈 거야.”
“그러시든지.”
마법이 발동하려는 그때, 리안이 말했다.
“그래. 가자, 시로네.”
페르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리안은 무시하듯 시로네에게로 완전히 돌아섰다.
“누군지는 몰라도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겠지. 그녀를 구하러 가자.”
페르미가 미로와 마르샤를 돌아보았다.
“내버려 둘 거예요?”
“갈 수밖에 없잖아. 이게 시로네니까.”
마르샤가 알고 있는 시로네는 어떤 대의명분이 있더라도 눈앞의 불행을 모른 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페르미는 마지막 희망을 미로에게 걸었으나, 그녀 또한 몸을 풀며 마르샤 쪽으로 향했다.
“다수결로 찬성이군.”
“고모, 하지만 이건…….”
“이번만큼은 양보해. 시로네가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잖아? 그리고 이제는 리안의 성격도 알지.”
“답답한 것도 정도가 있지.”
피식 웃음을 터뜨린 미로가 두 손을 움직이자 관음의 화신이 후광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후 거대한 쌍장이 바닥을 내리찍었다.
쿠우우우우웅!
수목원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으나 바닥에는 손바닥의 형태만 찍혔을 뿐이었다.
모두의 시선을 눈치챈 미로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이곳은 건물이 되게 단단하네?”
시로네가 울화통을 터뜨렸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차라리 내가……!”
“후우우우우.”
미로가 길게 숨을 내뿜자 시로네의 눈이 커졌다.
관음의 화신이 조금 전보다 수십 배는 거대해지면서 수목원의 천장에 닿았다.
‘일지一指!’
미로가 검지로 바닥을 찌르자 관음의 거대한 손가락이 건물의 층을 연속으로 관통했다.
쾅! 쾅! 쾅! 쾅! 쾅!
마르샤가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고, 이어서 모두가 시설의 마지막 층인 지하 10층까지 추락했다.
페르미가 먼지를 털며 투덜거렸다.
“성질머리 하고는…….”
시로네는 미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신은 대체 누구죠?”
“일단 가면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미로가 복도 쪽을 가리키자 요의 굴곡이 드러난 점액질이 빠르게 어둠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멈춰!”
시로네 일행은 빠르게 몸을 날렸으나 복도의 끝은 거대한 유리 벽으로 막힌 상태였다.
“이건 뭐야?”
답을 아는 건 시로네가 유일했다.
‘자기 부상 엘리베이터…….’
유리 벽에 손을 대자 LED선이 나타나며 직사각형의 패널이 떠올랐다.
시로네는 손바닥 형태의 지문 인식기에 손을 가져다 댔고, 이내 지문이 반짝이더니 유리문이 열렸다.
‘역시 내 기록이 저장되어 있다.’
훗날 동면에서 깨어날 사람들이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하려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로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자 천장에서 은은한 빛이 내려왔다.
“어디로 가는 거지?”
미로의 말이 끝나는 순간 승강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어둠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사위가 어두워, 가속 구간을 지나서는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뮤커스의 통제장치가 있는 곳이겠죠.”
동면 전에만 해도 지하에 이토록 거대한 시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마도 입구는 하나가 아닐 거야. 주요 기관의 지하에는 모두 이런 게 설치되어 있겠지.’
생각을 끝마친 시로네는 그제야 일행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위화감이 있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였다.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들어, 시로네. 믿기 어렵겠지만 현실이야.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미로가 시로네의 반응을 살피며 말했다.
“모두 가짜야. 심지어는 너조차도.”
시로네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으나 몰타의 아내와 달리 우선 들어 보는 쪽을 택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어요.”
“좋아. 그럼 처음부터 다시 할게.”
미로가 알아야 할 것들을 전부 털어놓자 이번만큼은 시로네라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짜라고요? 이 세계가 전부?”
“그래. 그러니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쓸 필요가 없어. 네가 해야 할 일은 현실의 너를…….”
“그럴 리가 없어요.”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맹신하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정말로 그럴 리가 없다고요.”
미로는 시로네의 심정을 이해했다.
“아마도 그럴 거야. 하지만 내 말을 믿어야 해. 요정의 후예? 아니, 나는 인간이야. 너와 나의 기억이 다를 수는 없는 거잖아?”
“거짓말!”
결국 시로네는 참지 못했다.
“인공동면의 후유증으로 기억에 혼란이 온 거예요! 관리자도 그렇게 말했어요! 장시간 동면 상태에 빠지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그것 또한 거짓이야. 아포칼립스의 정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기억일 뿐이지.”
“그 말을 날더러 믿으라고요?”
마르샤가 말했다.
“믿어야 돼, 시로네. 안 그러면 현실의 너는 죽어.”
“제길!”
시로네는 듣기 싫다는 듯 몸을 틀고 승강기 안을 초조하게 돌아다녔다.
리안이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시로네, 힘들겠지만…….”
“믿을게요.”
시로네가 돌아섰다.
“좋아요, 믿을게요. 어쩌면 미로 씨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죠. 그러니 믿는다고요.”
시로네는 두 팔을 벌리고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어떡하죠? 저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나나요? 아니면 뭔가를 더 해야 돼요?”
“…….”
진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설령 시로네가 미로의 말을 믿는다고 해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진짜로 그렇다고 느끼는 것은 우주의 끝과 끝만큼이나 먼 거리이기 때문이다.
위이이이이잉!
질주하던 승강기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더니 갑자기 아래로 뚝 떨어졌다.
“크으으으!”
승강기 내부의 기압이 자동으로 조절되면서 무중력상태는 면했지만 배 속의 공기가 울렁거리는 기분은 끔찍했다.
‘대체 어디까지 떨어지는 거야?’
승강기는 오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지상에서 얼마나 먼 거리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이 깜빡이는 패널로 뒤덮인 통로와 끝없이 이어진 전선이었다.
낙하의 공포 덕분에 정신을 환기시킨 시로네는 눈을 부릅뜨며 통로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무엇이 사실이든 요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특수 격리 구역이라는 팻말이 붙은 곳을 지나자 문짝이 없는 문 안쪽에서 정숙한 기계음이 새어 나왔다.
시로네가 손에 포톤 캐논을 띄우고 갑자기 몸을 날리자 일행이 황급히 뒤를 따라붙었다.
“이건……?”
시로네는 투지조차 망각한 채 반구형 공간의 중심에 있는 거대한 물체를 바라보았다.
직경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렌즈는 사람의 눈동자와 흡사했고, 그것을 이루고 있는 강철의 몸체에는 수천 개의 전선이 달라붙어 주변의 벽과 연결되어 있었다.
미로의 입에서 저절로 하나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라?”
디지털 라(로컬 에너지 순환 시스템 양자 컴퓨터).
페르미가 물었다.
“라? 이 고철 기계가 그거라고요?”
“아니, 진짜 라는 생물이야. 그런데 너무나 흡사해서.”
페르미는 디지털 라의 모습에서 실제 라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으나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말소되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말소된 정보는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맞아. 따라서 진짜 라가 아니야.”
한 소년에 의해 신화는 파괴되었다.
“신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신이지.”
디지털 라의 렌즈에 들어 있는 장치가 회전하자 천장에서 요를 붙잡은 상태로 뮤커스 맨이 착지했다.
“요! 괜찮아?”
절망이 전부였던 요의 얼굴에 한순간 화색이 돌았으나 뮤커스 맨이 곧바로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너희는 누구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것인가?”
시로네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너야말로 정체가 뭐야? 이미 세계는 멸망했어. 그런데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내 이름은 라. 양자 컴퓨터의 데이터에 저장되어 있는 인간형 모델이다.”
미로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화신 같은 건가?’
“사실 무엇이라 불리든 상관없지. 나는 태양에너지를 기반으로 세계를 정화시키는 프로그램이다. 라는 고대의 인간들이 믿었던 일신교의 신이라고 하더군.”
“어떤 기능을 갖춘 컴퓨터든, 인간을 공격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어차피 순환의 연결 고리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은 또 하나의 생명을 만드는 행위와 다르지 않아.”
“그건 네가 생명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야.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해 본 적 있어?”
“인간은 누군가의 죽음을 기뻐하기도 하지.”
시로네는 이를 까득 깨물었다.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을 말로 바꿀 수 있었다면 세상이 이렇게 망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싸우는 수밖에 없어. 하지만 요가 잡혀 있는데…….’
시로네가 고민에 빠진 사이 마르샤가 라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뭐가 됐든 간에. 인간이 필요한 거라면 차라리 나는 어때?”
“마르샤?”
시로네가 돌아보자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패륜의 단도만 찌를 수 있다면…….’
라의 팔이 쭉 하고 늘어나 마르샤의 목을 붙잡고 끌어당기자 요가 황당한 듯 소리쳤다.
“미쳤어? 인질을 자초하다니!”
“그래. 아무래도 그런가 봐.”
마르샤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왼쪽 손등에서 패륜의 단도를 꺼냈다.
라의 옆구리를 찌르자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확인한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통한다! 이거라면……!’
마르샤는 미친 듯이 계속해서 단도를 찔러 댔고, 라는 반응조차 없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뭐지?”
그제야 마르샤도 이상함을 깨닫고 공격을 멈췄다.
“이런……!”
규정외식으로 만든 칼집이 저절로 아물고 있었다.
“정보를 변형시키고 있군.”
양자 컴퓨터의 백업 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했다.
“너의 데이터를 분석하겠다.”
벽면의 뮤커스에서 표범을 닮은 맹수의 점액질이 튀어나와 마르샤를 덮쳤다.
멸망하기 전 라가 소화했던 특정 생물의 모델이었다.
“위험해요!”
시로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날려 마르샤를 끌어안고 바닥을 뒹굴었다.
“시로네……?”
마르샤와 눈이 마주친 시로네의 동공이 흔들렸다.
-날 안아도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