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83
“이제 성량을 키울 필요가 없으니까요.”
이루키에게 성악의 기교를 포기하라는 조언을 듣고 기술의 변화를 모색한 그녀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콜리는 비가 쏟아지는 야밤에 자신을 찾아온 마야가 시로네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하며 펑펑 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실연의 상처로 먹을 의욕조차 없었음이 분명했다.
‘마음은 정리된 것인가?’
직접 스카우트한 제자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콜리는 이내 냉정을 되찾고 말했다.
“그래, 평가는 여전히 거부하는 거겠지?”
“네…….”
“알았다. 들어가서 쉬도록 해라.”
콜리를 지나 기숙사로 향하던 마야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용기를 내어 뒤를 돌아보았다.
수많은 남자들의 시선 속에서 시로네를 정확히 찾아낸 그녀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오랜만의 인사를 대신했다.
어느새 다가온 네이드가 시로네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야! 엄청나게 예뻐졌잖아? 그런데 아직도 너에게 마음이 있는 거 아냐? 짜식, 부럽다.”
“뭐가 부럽다는 거야?”
시로네가 정색하며 반문했으나 에이미는 이미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떠난 뒤였다.
“시간이 지체되었구나. 이제 강의실로 가자꾸나.”
병원에 있는 아이더를 제외하고 졸업반 전원이 도착한 상황이었다.
“시로네, 너 어디 가지 말고 연구회에 딱 붙어 있어. 눈물이 나도록 때려 줄 테니까.”
“하하!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
졸업반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지켜본 시로네는 강철문을 나서 마법 창고 이스타스로 향했다.
예상대로 잔소리꾼이 없으니 전보다 더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익숙한 정경, 익숙한 냄새.
하지만 이제는 이스타스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천국에서 돌아온 게 이제야 실감이 나네.”
비록 이카엘에게서 확답은 듣지 못했지만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시로네는 하산하기 전날 미로와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고기는 정말 맛있었지.’
오두막에서 처음으로 피어오르는 맛있는 냄새를 따라 방에서 나오니 미로가 마을에서 구입한 고기를 굽고 있었다.
화끈하게 분위기를 내려는 것인지, 한편에는 독한 술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하산 기념 파티 해야지. 물론 내가 만든 죽보다는 맛이 없겠지만.”
“아, 물론 그렇죠.”
혹시라도 말이 바뀔까 봐 바로 대답한 시로네가 테이블에 앉자 미로가 구운 고기를 놓고 술병을 땄다.
“자, 마셔. 이제 술 마셔도 되는 나이지?”
“네, 그렇기는 하지만…….”
시로네가 술잔을 들고 머뭇거리자 미로가 공격적으로 건배했다.
“자! 마셔, 마셔! 오늘 끝까지 가는 거야!”
그로부터 1시간 후.
술병을 모조리 비워 낸 두 사람은 동산에 앉아 산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지옥의 일정이 끝나고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시로네, 천국에 간 걸 후회하니?”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뜬금없는 질문에도 대답은 자연스러웠다.
“아뇨, 그럴 리가 없죠. 살아 돌아왔는데요.”
미로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카엘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었지?”
침묵이 길어지자 미로가 다시 물었다.
“그녀가 네 어머니라고 생각해?”
“네.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요.”
“그렇다면 아버지에 대해서도 짐작하는 게 있겠네?”
이카엘이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 알지 못하는 시로네였기에 미로의 질문은 조금 더 어려운 문제였지만, 내면에 깃든 누군가의 존재감은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원망스럽지는 않아? 친부모가 너를 버린 거잖아.”
대답을 듣기 전에 대답을 하는 게 먼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의 부모님은 크레아스에 살고 계세요. 다른 부모는 없어요.”
시로네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냥 알고는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거기까지 들은 미로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로네, 어쩌면 나는…….”
무거워진 목소리에 시로네가 고개를 돌렸으나 미로는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장난스럽게 어깨에 기댔다.
“에잇.”
“왜, 왜 이러세요?”
시로네가 몸서리를 쳤으나 미로는 막무가내로 팔까지 휘감았다.
“가만히 있어 봐. 왜? 부끄러워?”
“말 돌리지 마세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거 아니에요?”
미로는 기댄 채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네가 정말로 지금의 부모를 친부모로 생각한다면, 내 입을 통해서 나올 말이 아닌 것 같아.”
미로를 빤히 바라보던 시로네는 어떤 결론에 도달한 듯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 저에게 부모님은 오직 두 분뿐이세요.”
어떤 이야기는 남을 통해 들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
“하아, 그나저나 좋다. 이렇게 젊은 남자의 어깨에 기대 있으니까. 이래서 연애하나 봐?”
“협회장님이 미로 씨를 많이 생각하던데요.”
미로는 그저 소녀처럼 웃었다.
“앞으로 바쁠 거야. 너도 그렇고 나도. 20년 동안 흘려보낸 청춘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살아야지.”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셨어요.”
“감사는 무슨. 이것도 다 노후 준비야. 언젠가는 제자 덕 좀 볼 날이 오겠지.”
미로는 산 위에 떠 있는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연락하고 지내자.”
시로네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네.”
회상에서 벗어난 시로네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어.’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지나간 일이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이스타스도 그저 평범한 연구회일 뿐.
‘더 이상의 비밀은 없어. 오늘부터 다시 수련이다.’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경계하듯 시로네는 자세를 고치고 수열식에 돌입했다.
억에서 조로 들어가는 것과 조에서 경으로 들어가는 것의 난이도는 하늘과 땅 차이.
그렇기에 다음 단계인 해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얼마가 걸릴지 예상조차 불가능했다.
‘하루의 힘을 믿는다. 하루하루 쌓아 가는 거야.’
수열이 질주하면서 광천사 모드에 돌입하자 빛의 화신이 시로네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특별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1초에 3초를 인지하는 것만큼은 기정사실이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의 벽을…….’
그 순간 시로네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뭐지? 이거 뭐야?’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아른거렸다.
“누구야!”
무언가가 등 뒤를 지나간 것 같은 느낌에 돌아서며 소리치는데 문밖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아아!”
“쫓아라! 절대로 놓치지 마!”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소리만 듣고서도 복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시로네는 급한 표정으로 문을 박차고 연구회를 나섰다.
“…….”
하지만 그가 바라보는 복도의 광경은 전과 다름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아무도 없잖아? 그럼 내가 들은 건 뭐지?’
광천사 모드가 풀려 있음을 깨달은 시로네는 다시 물아일체에 들어갔다.
‘시불상폭매.’
화신이 스며들자 또다시 천장에서 쿵쾅쿵쾅 사람들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최강의 반야다!”
“보고합니다! 1조 전멸! 1조 전멸!”
넋이 나간 표정으로 환청을 듣고 있던 시로네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퍼뜩 스쳤다.
“어쩌면…….”
이곳에 무언가가 더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다시 강철문 (3)
***
그날 저녁.
설명회가 끝난 후 이루키와 네이드는 곧바로 연구회로 직행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로네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이루키가 말하고 네이드가 소매를 걷으며 다가갔다.
“왜긴 왜야? 앞으로 펼쳐질 살육의 현장을 상상하니까 피가 마르나 보지. 이리 와. 입만 빼고 다 맞자.”
“얘들아…….”
시로네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 좀 이상해.”
“그래, 이상하겠지. 앞으로 네 시체가 묻힐 곳이니까.”
“내 얘기 좀 들어 봐! 진짜라니까!”
“시끄러워! 배신자가 입만 살아 가지고!”
진심이 담긴 네이드의 우악스러운 레슬링에, 시로네는 세상이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으아아! 살려 줘!”
이번에는 이루키도 말리지 않았다.
“괜찮아. 죽진 않을 거야. 남자구실을 못 하게 될 뿐이지.”
“아하! 그거 좋은 생각인데!”
시로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잠깐! 으하하하! 간지러워!”
“아직 멀었어!”
네이드의 집요한 괴롭힘에 시로네는 몸부림을 쳤다.
“으하하하! 아! 파! 진짜 아프다고!”
새된 비명이 터진 뒤에야 네이드는 시로네를 풀어 주고 손을 탁탁 털었다.
“흥, 앞으로 또 배신하면 그때는 알지?”
“알았어, 알았다고.”
이루키가 소파를 두드리며 말했다.
“일단 앉아 봐. 들어 보기나 하자. 유서까지 쓰고 갈 정도면 심각한 일이었겠지?”
고작 이 정도로 분이 풀리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시로네에게 이유를 듣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눈물을 쏙 뺀 시로네 또한 초상감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이야기는 장장 2시간이나 이어졌으나 그조차도 압축을 시킨 것이었다.
한참이나 눈을 깜박이던 네이드가 대뜸 물었다.
“너 요즘 소설 쓰냐?”
“진짜라니까!”
시로네가 거짓말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곧바로 받아들이기엔 소화시키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무튼 알았어. 흐음, 그래서 평가를 거부한 거로군. 확실히 옳은 판단이야. 점수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졸업 시험에서 임팩트를 주는 게 중요하지.”
이루키의 말에 네이드가 가슴을 두드렸다.
“좋아! 걱정하지 마, 시로네. 내가 졸업반의 모든 정보를 알려 줄 테니까.”
이루키가 빈정댔다.
“알려 주긴 뭘 알려 줘? 졸업반 꼴등 주제에.”
시로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꼴등? 네이드, 너 정말 꼴등이야?”
“아하하,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마법에 의욕이 넘치지는 않았어도 언제나 중간은 했던 네이드였기에 의외의 결과였다.
“나 때문이구나.”
삼총사의 리더가 사라지자 가장 허무에 빠졌던 사람이 네이드이기는 했지만 친구에게 짐을 떠넘길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았다.
“아니. 절대로 그건 아니야. 사실 내가 졸업반을 너무 우습게 봤어. 고급반처럼 설렁설렁 해서는 안 되더라고.”
이루키도 그 점은 인정하는 바였다.
‘어쨌거나 시로네가 돌아왔으니 네이드 저놈도 정신을 좀 차리겠지.’
친구들이 모두 졸업하고 혼자 남는 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결과일 테니까.
“그나저나 네이드가 꼴등이면 나랑 마야, 아이더가 빠졌으니 27위라는 거네. 이루키, 너는 몇 위야?”
이루키가 짧게 답했다.
“8위.”
“우와, 클래스 원이야? 대단하다.”
“뭐…… 한 놈이 넋이 나갔으니 나라도 밸런스를 맞춰야지.”
네이드가 미운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게다가 나는 대단한 것도 아니야. 에이미는 5위니까.”
‘5위!’
시로네의 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