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84
작년에도 최종 평가에서 5위로 시험을 치렀던 만큼 중반의 페이스치고 나쁘지 않았다.
네이드가 말했다.
“네가 떠난 뒤로 클래스 원으로 새로 승격한 사람은 총 3명이야. 에이미, 이루키, 단테.”
“단테는 몇 위인데?”
“4위.”
“…….”
이제부터는 실력보다 정치라고 다짐한 시로네지만 친구들의 약진을 듣자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기존의 클래스 원 중에 3명이 클래스 투로 내려갔지. 그 외에도 지각변동이 상당해.”
“정말 치열했구나.”
네이드가 분한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쳇, 시로네의 얘기를 들으니 이제 이해가 되네. 페르미 그 자식, 어떻게 계속 1위인가 했더니 남의 마법을 사들인 거잖아.”
“그것도 능력이야. 그리고 시로네, 너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그 대단한 미로 씨에게 특훈을 받았다며.”
시로네는 그제야 다시 초상감을 떠올렸다.
“맞다, 내 얘기 좀 들어 봐.”
시로네가 시불상폭매의 능력에 대해 설명하자 네이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무슨 소리야? 시간을 다르게 인지한다는 게 뭐야?”
“직접 보여 줄게.”
자리에서 일어난 시로네가 물아일체의 경지에 들어가자 광천사의 화신이 피어올랐다.
“이게…… 화신?”
“응. 시간을 파괴하는 율법이야. 이런 식으로…….”
금빛 잔상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던 시로네가 정지하자 1초 전의 위치로 몸이 이동했다.
“…….”
기나긴 정적의 끝에 이루키가 말했다.
“그렇군. 시간을 뛰어넘은 게 아니라 시간 자체를 다르게 인지하고 있다는 거지?”
“바로 그거야. 게다가 미래의 사건도…….”
그 순간 또다시 천장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눈을 크게 치켜뜬 시로네가 외쳤다.
“이거야! 들려? 듣고 있는 거지?”
친구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가 들린다는 거야? 네가 떠드는 소리밖에 안 들려.”
시로네는 문밖에서 터진 비명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자, 봐! 복도에서 싸우는 소리도 안 들려?”
복도를 살펴본 이루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없는데?”
시로네는 허탈한 표정으로 시불상폭매를 해제했다.
“하아, 진짜 왜 이러지?”
“대체 무슨 일인데?”
시로네가 차근차근 설명하자 이루키도 그제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능력의 부작용 아니야? 시간을 다르게 인지하면서…….”
“그건 아니야.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 이스타스에서만 그래.”
“흐음, 이스타스라…….”
시로네는 신중한 표정의 네이드를 바라보았다.
“혹시 뭔가 짐작 가는 게 있어? 예전에도 네가 내 초상감의 비밀을 밝혀냈잖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예전에 선배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나서. 알다시피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는 대단한 선배들이 몸담았던 곳이잖아. 그런 만큼 오래전부터 수많은 음지의 연구회가 이곳을 차지하려고 눈독을 들였어.”
이루키가 끼어들었다.
“상층부 루머 말이지? 하지만 시로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건 그냥 미로의 시공이었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지금 시로네가 느낀 초상감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무엇보다 내가 직속 선배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계속 거슬리거든.”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이드가 기억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말했다.
“이스타스의 상층부에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 그래서 수많은 연구회가 이곳을 차지하려고 하는 거라고 그랬어.”
시로네는 네이드의 말을 곱씹었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게 뭔데?”
“나도 모르지. 선배도 몰라. 선배의 선배, 그 선배의 선배로부터 내려온 말이니까. 그냥 루머일 수도 있어. 솔직히 나도 네 얘기를 듣고 이스타스의 비밀이 완전히 풀렸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이군.”
이루키가 흥미를 드러내며 턱을 괴었다.
“조사해 볼 가치가 있겠어. 미로의 시공처럼 건물의 특정 좌표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가 아닐까?”
네이드가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그래! 건물의 구조를 바꿔 보는 거야! 시공간이 작용하는 퍼즐이라는 걸 알았으면 이루키도 계산할 수 있을 테니까.”
두뇌의 기능만큼은 이루키가 세인보다 떨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시로네는 다른 의미에서 걱정스러웠다.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말자. 우리는 졸업반이잖아. 매일 피 터지게 수련해도 모자란데.”
이루키가 손가락을 저었다.
“아니지. 졸업반이니까 해야지. 일단 졸업하면 언제 다시 여기 오겠어? 이 재미를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고.”
“바로 그거야! 우리가 새로운 역사를 써 보자고. 이스타스의 비밀을 밝히자!”
네이드의 반색에 이루키가 딴죽을 걸었다.
“넌 그냥 수업하기 싫은 거잖아.”
“아니야. 이제 열심히 할 거라고. 시로네도 돌아왔으니까.”
이상한 쪽으로 추진력이 강한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으나 사건의 당사자로서 할 말은 없었다.
“좋아. 내친김에 지금부터 시작해 볼까?”
시로네가 손을 들어 말렸다.
“아니, 그건 안 되겠어. 오늘은 좀 가 볼 데가 있어서.”
“응? 이 시간에 어딜 가?”
“에이미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너희보다 늦게 들었다는 것을 알면 서운해할 테니까.”
또한 친구들이 너무 이쪽으로 빠지게 되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는 시로네였다.
“하긴, 어차피 맞을 거라면 일찍 맞는 게 낫지. 하루가 지날수록 매가 배로 늘 테니까.”
“하하! 맞아. 그리고 이스타스 문제는 가급적 주말에 해결하자. 졸업 시험까지 15주 남았으니까 시간은 충분해.”
이루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해산하자. 평가장은 출입 못 해도 어차피 식당에서 볼 수 있을 테니까.”
일단락을 지은 세 사람은 이스타스의 창고를 나섰고,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방으로 돌아온 시로네는 잠시 갈등했으나 왠지 그녀가 자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가 봐야겠지.”
결정을 내린 시로네는 코트를 걸치면서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곧바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시로네만큼이나 놀란 얼굴의 에이미가 서 있었다.
“…….”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마주치는 것도 기묘한 우연이었으나 에이미의 눈빛은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다.
“방에 있었네. 어디 가는 길이었어?”
“어? 아니, 사실은…… 너를 만나러 가려고 했어.”
“그래.”
예상과 다른 반응에 시로네가 말을 꺼내지 못하자 에이미가 방을 가리켰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물론이지.”
에이미에게 의자를 내주고 침대에 앉은 시로네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입을 열 타이밍을 기다렸다.
“저기…….
두 사람이 동시에 말을 꺼냈고, 에이미가 선수를 쳤다.
“먼저 말해.”
“응. 해명하고 싶어서. 어째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러니까 나는…….”
“잠깐만. 그냥 내가 먼저 말할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 시로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하게 해 줘.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확실히 해 두고 싶으니까.”
마음이 약해지기 전에.
아직 아무것도 밝히지 않은 에이미지만 시로네는 그 말만 듣고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시로네, 네가 어떤 해명을 한다고 해도, 나는 너를 용서할 생각이 없어.”
“에이미…….”
“오해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지만 확실히 해 둘게. 앞으로 너를 보지 않겠다거나 절교하겠다는 게 아냐. 단지 나는…….”
머뭇거리던 에이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네가 그렇게 사라져 버리고, 나에게는 어떤 선택권도 없었어. 이대로 너를 계속 기다려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잊어야 하는지.”
“이해해.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생사의 문제를 확률로 따질 수는 없지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떠난 여정이었다.
에이미가 애써 웃음기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다는 거야. 만약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다거나, 떠나기 전의 시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해명할 필요 없어. 너는 여전히 좋은 친구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갑자기 말을 멈춘 에이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돌린 그녀였으나 이것은 예상에도 없던 상황이었다.
또 다시 강철문 (4)
“시로네……?”
훌쩍훌쩍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서럽게 눈물을 쏟아 내는 시로네의 모습에 에이미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이미.”
시로네가 턱을 떨며 말했다.
“페오페가 죽었어.”
에이미에게도 심장이 내려앉을 만한 사건이었다.
천국에서 시로네와 리안, 테스를 도왔던 작고 귀여운 요정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다는 것은, 시로네가 천국에 다녀왔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나 때문에 죽었어. 나를 살리려고 수명을…….”
미로에게도, 이루키나 네이드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틸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에이미는 페오페를 알고 있었다.
“이카엘을 찾아갔는데, 내 손에 있었는데…….”
끔찍하게 말라비틀어진 페오페의 모습을 떠올리자 두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녀의 나약한 무게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너무 작아서…… 나는…….”
에이미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이래서 듣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시로네가 아무 이유도 없이 유서만 남겨 두고 떠나 버릴 리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너무 화가 나서 발할라 액션을…… 그런데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알았어, 시로네. 아픈 기억은 굳이 끄집어낼 필요 없어.”
고개를 숙인 시로네의 얼굴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며 울먹이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페오페…….”
에이미는 슬픔과 분노가 교차하는 심정이었다.
‘멍청아, 울고 싶은 건 나란 말이야.’
침대에 앉은 에이미가 시로네의 어깨를 끌어당기자 그의 얼굴이 쓰러지듯 가슴에 파묻혔다.
시로네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목소리가 에이미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잠겨 있던 강철의 빗장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하아, 진짜…….”
시로네의 등을 토닥거리며 에이미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 번만이야. 다음에 또 그러면, 다시는 안 흔들릴 테니까.’
그렇게 에이미는 시로네의 슬픔을 가슴에 파묻었다.
***
다음 날 아침.
시로네는 기상과 동시에 이스타스로 향했다.
간밤에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으나 그보다 부끄러운 것은 따로 있었다.
“아아! 내가 왜 그랬지?”
에이미의 단호한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울렁거렸고, 그때부터는 그저 서러울 뿐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화해했으니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페오페를 생각하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지지만, 슬픔을 나눌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때로는 울면서, 그렇게 또 살아가는 것이다.
‘괜히 긴장되네.’
이스타스에 도착한 시로네는 어제 느낀 초상감을 회상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스타스.
89채의 창고로 이루어진 다목적 복합 구조물.
명문 학교라면 어디나 하나쯤 갖추고 있는 시설이지만 알페아스 마법학교의 이스타스는 역사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특별했다.
‘거핀의 문이 이곳에 있다.’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를 원점으로 잡은 건 세인이지만 문은 그들이 만든 게 아니었다.
‘아마도 당시에 있었던 어떤 사건일 가능성이 높아.’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이스타스의 출입구가 설치된 창고에 도착했다.
‘점심시간 전까지 조사해 봐야겠어.’
여태까지는 연구실에서 시불상폭매를 발동했지만 이번에는 소리가 들린 곳으로 직접 가 볼 생각이었다.
“천장에서 소리가 들렸으니까…….”
마스터 방정식을 통해 좌표를 계산한 시로네는 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흐음, 여기라는 거지.’
막상 혼자서 해 보려니 겁이 났지만 조금이라도 조사를 해 두는 게 자신을 도와주는 친구들에 대한 예의였다.
‘시불상폭매.’
광천사의 화신이 폭발할 듯 치솟았다가 몸으로 빨려 들자 여지없이 환청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