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486
순백의 로브를 걸친 시로네의 모습은 단연 위압적이었다.
인공두뇌 외가 보랏빛 광채를 발하며 주위를 돌 때는 황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고급반 아이들의 기준에서는 손에 칼을 쥐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는지, 긴장했던 표정이 하나둘씩 풀렸다.
“뭐야, 깜짝 놀랐잖아? 사람 겁주고 있어.”
막다른 창고에서 검을 든 졸업반 선배를 지나가기란 아무래도 무서운 일이었다.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 슈아민이 윈드 커터를 시전하자 알트와 게레인이 지원사격을 했다.
‘이것들이……!’
시로네는 피할 생각조차 없이 걸음을 옮겼다.
팅팅 하고 철이 깨지는 소리에, 문으로 달려가던 슈아민 일행이 질겁하며 멈췄다.
“무슨 옷이 저래?”
윈드 커터에 맞은 자리가 금속질로 변해 있었다.
천국에서도 최강의 내구력을 자랑한다는 갑식광물종 링거의 갑피였다.
“너희들, 언제부터 이렇게 막나가게 된 거야?”
“뭐래? 꼰대가.”
고급반 통합 수업 시간에 마주쳤을 때만 해도 싹싹하고 예의 바른 아이들이었다.
‘확실히 뭔가 있군.’
심문의 필요성을 느낀 시로네는 아르망의 촉수를 공작의 깃털처럼 뽑아냈다.
“윽!”
생전 처음 보는 생물질에 슈아민 일행이 질겁했다.
“똑바로 불어. 누가 시켰어?”
“뭐, 뭐예요! 그런 흉물스러운 걸로 뭘 어쩌려고! 선배님 변태예요?”
시로네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건 너희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렸지.”
“얘들아! 진짜로 하자!”
슈아민의 신호에 일행은 각자의 장기를 발동했다.
파이어볼, 아이스 대거, 이럽션.
윈드 커터와는 상상력 자체가 다른 마법에 시로네도 처음으로 진심이 되어 움직였다.
바닥의 분자가 마찰하면서 화산처럼 폭발이 일어나고, 파이어볼의 화염이 피어오르는 곳에 얼음의 단도가 푹푹 꽂혔다.
하지만 이미 자리를 벗어난 시로네는 촉수를 휘둘러 세 사람의 목을 붙잡고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크윽! 괴물!”
“그러게 왜 이런 짓을 해? 이건 정당방위야. 그리고 너희들의 말처럼 마법도 쓰지 않았지.”
“닥쳐! 평가도 포기한 도망자 주제에!”
“닥쳐?”
시로네의 눈썹이 꿈틀했다.
자신이 고급반에 있을 당시 졸업반 선배들을 얼마나 우러러보았는지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건방짐이었다.
“으아아악!”
촉수의 압력이 높아지자 슈아민 일행의 얼굴이 붉어졌다.
“말해. 안 그러면 목이 부러진다.”
“죽여라! 절대로 말 못 해!”
어느 정도는 진심이겠지만, 여전히 얕잡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설마 진짜로 죽이기야 하겠냐는 마음이었고, 시로네 또한 살인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
잠시 고민하던 시로네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절대로 말 못 하겠다 이거지?”
“그래! 우리는 긍지 높은 마법사다! 신념은 꺾이지 않아!”
“좋아. 그럼 할 수 없지. 마크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윽!”
예상대로 효과가 있는지 슈아민 일행의 얼굴이 구겨졌다.
순간 이동 평가에서 패한 이후 시로네의 추종자가 된 마크는 단련에 단련을 거듭하여 클래스 포에 안착했고, 지금도 고급반의 주먹대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치사하게! 후배의 이름을 팔아요? 그러고도 졸업반이야?”
알트의 말에 다시 경어가 섞이는 것을 보니 마크가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하긴, 멀리 있는 법보다 가까이 있는 주먹이 강한 법이지.’
졸업반인 시로네보다는 앞으로 길면 몇 년이나 함께 지내야 하는 마크가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리라.
“그러니까 말해. 안 그러면 마크가 너희에게 묻게 될 거야.”
슈아민의 눈치를 보던 게레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는 숨바꼭질 연구회예요.”
네이드에게 이름은 들어 봤던 음지의 연구회였고, 그렇다면 이들이 방종한 것도 이해는 되었다.
음지의 연구회는 소속감이 대단하고 활동 영역도 치외교권이라 학교 내의 또 다른 사회나 마찬가지였다.
“숨바꼭질 연구회가 왜 나를 미행하지?”
“이유는 몰라요. 회장이 살펴보고 오라고 그랬어요.”
신념 어쩌고 할 때는 언제고, 술술 불고 있었다.
“회장이 누군데?”
하지만 이번만큼은 슈아민 일행이 한목소리로 거부했다.
“그건 절대로 말 못 해요!”
“그래? 그럼 마크에게…….”
슈아민이 울먹이며 사정했다.
“정말이에요, 선배님. 그걸 밝히면 마크가 아니라 회장에게 죽어요. 저희도 왜 여기를 탐문하는지는 몰라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아이러니하게도, 마크의 이름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에서 진심이 읽혔다.
촉수를 거두어들인 시로네는 바닥에 떨어져 컥컥대는 후배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시는 남의 연구회를 염탐하지 마. 다음에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너희들이야.”
“네. 네.”
“그만 돌아가 봐. 그리고 수업 빼먹지 말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슈아민 일행은 밖으로 달아났고, 시로네는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음지의 연구회가 움직였다. 내 초상감하고도 관련이 있을까?’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실제로 수업 시간에 연구회에 있었던 적은 처음이었으니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네이드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시로네는 점심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 식당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나저나 그 아이들, 나갈 수는 있으려나? 엄청 돌아야 할 텐데.’
***
오랜만에 찾은 식당의 정경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루 중에 유일하게 긴장을 풀 수 있는 시간인 만큼 분위기는 왁자지껄했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클래스별, 파벌별로 데면데면했던 초창기와 달리 관계의 구도가 많이 다채로워졌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루키의 맞은편에 4차원 소녀 도로시가 있다는 것에 눈길이 갔다.
‘도로시는 루만하고만 밥을 먹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루만을 상대해 주는 사람이 도로시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어쨌거나 지금도 그녀의 옆에는 루만이 앉아 있었다.
군중 제어의 달인이지만 이기적인 성격과 뚱뚱한 몸매 탓에 여전히 인기는 없어 보였고, 방학 중에 비둔한 몸이 1.5배는 더 불어 있었다.
소환 마법 전공의 보일이 음식을 와구와구 쑤셔 넣는 루만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먹고 배가 고픈 감각이 들기는 하냐? 대체 방학 중에 얼마나 많이 처먹은 거야?”
“흥, 얼마나 많이 특훈을 했냐고 물어야지. 난 스트레스 받으면 계속 먹거든.”
이루키가 짧게 일침을 날렸다.
“계속 먹으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거지.”
그러자 루만이 살쾡이 눈을 치켜떴다.
“뭐가 어째? 지는 못 먹어서 비실대는 주제에.”
“내가 알려 줄까, 손쉽게 살을 빼는 방법?”
“응?”
루만이 관심을 드러내자 이루키가 검지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밥을 먹거나 책을 볼 때 항상 이렇게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는 거야.”
“두드리라고?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데?”
“손가락이 움직인 만큼 칼로리가 소모되지.”
루만이 벌떡 일어났다.
“이게 진짜! 나 뚱뚱하다고 놀리는 거야?”
이루키는 짧게 답했다.
“그게 수학이야.”
보일과 도로시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수는 그것을 명확히 표현하지. 테이블을 두드리면 그만큼 칼로리는 소모되게 되어 있어. 아주 작은 열량이라도, 그만큼 살이 빠지는 거야.”
논리에 반박할 수 없었던 루만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으나, 감정은 상할 대로 상한 상태였다.
‘정신병자 같은 자식. 넌 언젠가 내가…….’
그때 옆자리에서 똑똑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도로시가 테이블을 검지로 두드리고 있었다.
“너, 뭐 하냐?”
“다이어트.”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시로네의 옆으로 어느새 네이드가 다가와 속삭였다.
“저것들 요새 수상하단 말이야.”
깜짝 놀란 시로네가 네이드인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누가 수상해? 이루키와 도로시?”
“어. 너도 느꼈지? 언제부턴가 도로시가 이루키에게 관심을 보이더라고. 그러니까 너랑 나랑 방해하자.”
“무슨 결론이 그래? 좋은 거 아냐?”
네이드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싫어.”
“왜 싫은데?”
시로네의 어깨에 팔을 걸친 네이드가 훈계하듯 말했다.
“잘 들어. 우리 나이에 여자와 어울린다는 것은, 정말로 엄청나게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이야. 우리에게는 완벽한 배신이지! 내가 죽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 꼴 못 봐.”
한심하게 쳐다보던 시로네가 네이드의 팔을 치우며 이루키가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죽으면 되겠네.”
“히잉!”
울상을 지으며 따라오는 네이드를 달고 시로네가 테이블에 도착하자 에이미가 의자를 빼 주었다.
“왔어?”
“응. 오늘 수업은 어땠어? 주특기 시험이었지?”
“딱히 어렵지는 않았어. 진짜 고비는 10주 정도 남았을 때부터거든. 아마도 아린 정도만 마스터 판정을 받을 거야.”
“오호, 그렇구나.”
시로네와 에이미가 담소를 나누자 네이드가 이루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둘이 잘 해결된 것 같은데? 시로네 없을 때는 너무 냉정해서 걱정했더니.”
“감정이야 자기들이 알아서 타협하겠지. 남 신경 쓰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하셔.”
“히잉! 다들 나만 미워해!”
네이드가 소리치기 직전에 갑자기 모두가 입을 다무는 바람에, 식당에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윽!”
네이드의 얼굴이 빨개졌으나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식당의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야다.”
평가를 거부한 이후 전반기부터 식당에는 얼씬하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행차한 상황이었다.
스크럼블 로열 (2)
마야가 식판에 음식을 담는 동안 남자들의 시선은 꾸준히 따라왔다.
아름다운 외모도 그렇지만 변화의 폭이 크다는 점이 신기함마저 불러일으켰다.
“진짜 예뻐졌구나. 빨간책에서 본 그림이 거짓이 아니었어.”
에이미가 네이드를 돌아보며 물었다.
“빨간책? 그게 뭐야?”
“응?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에이미에게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웬일이지? 시로네 때문인가?”
에이미가 생각하기에도 그 이유밖에 없을 듯했다.
시로네는 천국으로 떠났지만 마야는 학교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얼굴을 비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전보다 더 외로워 보였고, 시로네 또한 지금의 상황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생각을 읽은 것인지 에이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같이 먹자고 해.”
“하지만…….”
에이미가 용서해 주기는 했지만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정말로 괜찮아. 앞으로 15주나 남았는데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잖아?”
에이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한 네이드가 시로네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듯 소리쳤다.
“마야, 이쪽으로 와! 같이 먹자!”
밥을 깨작대던 마야가 식기를 내려놓고 시로네 일행에게 걸어왔으나 식판을 가지고 오지는 않았다.
“모두 오랜만이야.”
마야의 미소는 여전히 착했으나 외모가 변해서인지 분위기는 전과 완전히 달랐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네. 어떻게 지냈어?”
마야는 그저 고개를 젓더니 에이미에게 말했다.
“미안해.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래도 한 번은 만나서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우리끼리 인사치레는 무슨. 그러지 말고 이쪽으로 와. 예전에도 항상 같이 먹었잖아.”
“아니, 오늘이 마지막이야. 앞으로는 식당에 올 일이 없을 테니까.”
졸업반 모두가 마야의 말에 주목하고 있었다.
“오지 않는다고? 왜?”
“알고 있잖아, 에이미.”
에이미의 미간이 살며시 구겨졌다.
“그건 좀 불합리한데? 너도 성인이잖아. 그런 식의 발언은 우리에게 부담만 줄 뿐이야. 신경 쓰이는 게 있다면 부딪쳐서 해결하는 게 어때?”
오랜만에 만났어도 변함이 없는 에이미의 모습에 마야는 씁쓸하게 웃었다.
“부럽다, 에이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