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1
막다른 길에 몰린 네이드는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리고 시이나에게 매달렸다.
“선생님! 제발 기회를 주세요. 발표회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알고 계시잖아요, 저희 연구회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거. 논리만 신봉하는 마법사회에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연구회라고요.”
시이나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발 그 일침 좀 가해 보라는 얘기야. 여기까지 양보했으면 너희들도 증명을 해야지. 이미 교사회의에 올라간 안건이니, 모쪼록 올바른 판단을 내렸으면 한다.”
시이나가 자리를 박차자 모두 일어섰다.
“선생님! 잠시만……!”
철문이 쿵 하고 닫히고, 그것을 신호로 시로네 일행이 소파에 쓰러졌다.
마치 꿈을 꾸다가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멍했다.
“완전 망했어.”
철컹철컹, 이스타스의 기관 장치가 연구실을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기 시작했다.
게이지 대칭성(1)
한가로운 휴일.
여느 때라면 쉬는 날에도 도서관에 있을 시로네지만 지금은 음료수 한 잔을 들고 중앙 공원에 앉아 멍하니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이루키와 네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몇 시냐?”
“몰라. 어쨌든 밤은 아니야.”
“오, 천잰데.”
썰렁한 정적이 이어졌다.
시로네가 한숨을 쉬자 연달아서 두 번의 한숨 소리가 더 이어졌다.
결국 참지 못한 시로네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어떡할 거야, 연구회? 이러고 있을 시간에 발표할 주제라도 생각해 두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루키가 말했다.
“그래, 생각을 해 보자. 우리가 학교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연구 과제가 뭐가 있지?”
네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기로는 발표회 자체를 한 적이 없어. 물론 기발하고 독특한 일은 많이 했지만, 어차피 그런 것을 학교에서 공식적인 연구로 승인해 줄 리가 없잖아.”
초자연 심령과학이라는 주제를 전문적인 영역까지 끌어올릴 방법은 없다.
만약 그런 방법이 존재했다면, 이미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다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오가는 여학생을 따라 고개가 움직이기는 했지만 실상 머릿속은 백지상태였다.
“어? 얘들아, 저기 봐.”
네이드가 가리킨 곳에 학교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인이 정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트렌치코트에 힐을 신었는데, 펌을 먹은 보랏빛 머리가 허리에서 찰랑거렸다.
“생물학적으로 괜찮은 디자인이군. 누구지?”
“졸업반 선배님인가? 보통 우리 또래 애들은 저런 옷 안 입잖아.”
친구들이 품평하는 동안 시로네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여성을 살폈다. 어딘가 낯이 익었다.
“혹시…… 저분 시이나 선생님 아니야?”
“뭐? 시이나 선생님?”
이루키와 네이드가 동시에 살폈다.
확실히 그랬다. 안경도 쓰지 않고 단정하게 올린 머리도 풀어 헤쳤지만, 시이나가 분명했다.
“우와, 사람이 저렇게 변하나?”
“그러게. 화장까지 하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그런데 시로네, 너는 어떻게 알았어? 이제 보니 너, 은근히 여자 보는 눈이 밝은데?”
시로네가 시이나를 알아본 이유는 일전에 머리를 풀어 헤친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밤에 선생님이 찾아왔다는 얘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하하! 그냥 시력이 좋은 거지.”
“그런데 어디를 가는 걸까? 화장까지 한 걸 보면, 중요한 미팅이 있는 거 같은데.”
이루키가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여성 인체 연구회가 얻은 시이나 선생님의 월간 스케줄 표에 따르면 오늘은 비번이야. 학교 내외적으로 행사도 없어. 남은 건 데이트 정도인데…….”
“데이트라고? 설마. 선생님 성격 알잖아.”
“그래도 만나는 사람 정도는 있겠지. 여자 나이 스물여섯이면 가문의 압박이 장난 아니라고. 올리페르가 이름값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흐음, 그렇단 말이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네이드가 친구들을 돌아보며 눈을 빛냈다.
“우리 따라가 볼까?”
“가서 뭐 하게?”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여기서 죽치고 있는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솔직히 너희들도 궁금하잖아. 어차피 휴일이니까 해 지기 전에만 들어오면 될 거야.”
이루키는 회의적이었다.
“안 들키게 쫓을 수나 있고? 공인 6급의 마법사야. 스피릿 존이 아니라도 주변을 살피는 눈부터 다를 텐데. 금방 들키고 말걸.”
“그럼 이렇게 하자. 이루키 너는 선생님을 추적하고, 시로네는 중간 연락책을 맡아. 내가 연구실에 들렀다 올 동안 동선을 추적해 줘.”
시로네는 네이드의 생각을 간파했다.
“투명 망토?”
“바로 그거야. 투명 망토를 쓰고 미행하면 아무리 선생님이라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어때?”
이루키가 그제야 흥미를 보였다.
“공인 6급 마법사를 미행이라. 괜찮은 생각이군. 그럼 나는 지금 출발할게. 시로네, 너는 중간에서 네이드를 데려와.”
이루키가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정문으로 향하자 시로네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이런 쪽으로는 실행력이 발군인 친구들이었다.
네이드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럼 부탁한다, 시로네. 네가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야. 동선과 거리, 조절할 수 있지?”
도시의 방향성은 도로라는 인공 구조물로 분할되어 있기에 포인트만 체크하면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할 수 있다. 포인트는 중간 합류 지점을 정확히 잡는 것이었다.
시로네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미 머릿속에 계산이 끝난 자신이 싫었다.
“알았어. 대신 빨리 와. 10분 이상은 자신 없어.”
“하하! 역시 시로네! 너만 믿는다!”
네이드가 연구회로 떠나자 시로네는 7분 정도 이루키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다시 빠르게 되돌아와 정문에서 네이드를 픽업한 후, 기억해 둔 길을 따라 5분을 달리자 이루키가 그들을 마중했다.
네이드가 곧바로 물었다.
“시이나 선생님은?”
“베이커리에서 우로 꺾은 것까지 확인했어. 그렇다면 평민 구역으로 가는 거겠지.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평민 구역?”
예상과 다른 동선이었으나 일단은 시이나가 있는 곳까지 가는 게 먼저였다.
이동 중에 네이드가 물었다.
“왜 평민 구역이지? 데이트는 귀족 구역에서 하잖아. 만나는 사람이 평민인가?”
“모르지.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이상한 점이 있어. 주변 경계가 너무 심해. 이동하는 내내 주의를 의식하고 계셨다고. 안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어서 망정이지, 방심했으면 나도 걸렸을 거야.”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 혹시 우리처럼 금지된 물품으로 뒷돈을 챙기는 건 아니겠지?”
시로네가 한심하다는 듯 네이드를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그런 짓 하지 않아.”
“쳇! 누가 뭐래? 그런 현장이라도 발견해야 우리가 연구회를 지킬 수 있다고.”
이루키가 멀리 떨어진 시이나를 가리켰다.
“찾았다. 아슬아슬했군.”
평민 구역에서 세 사람은 투명 망토를 썼다.
꼭두새벽부터 장사를 하러 나온 사람들로 길목은 바글바글했고 덕분에 미행이 한결 수월해졌다.
시이나가 도착한 곳은 2층집이었다.
세 사람은 망토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누가 문을 열어 주나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시이나가 주위를 둘러보자 거북이처럼 얼굴이 쏙 들어갔다. 그들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너무 경계하는데? 누가 사는 집이기에 저러지? 그냥 평범한 가정 주택이잖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세 사람이 다시 얼굴을 내미는 그때, 금발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어색한 몸짓으로 시이나와 포옹한 그가 집 안을 가리키며 그녀를 안내했다.
문이 닫히고, 시로네 일행은 잠시 멍했다.
“어쨌든 남자네. 남자였지?”
“응.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아? 결국 데이트라는 건데, 왜 주위를 의식하셨지?”
“남자가 평민이라 그런가? 선생님은 올리페르 가문이잖아. 반대가 장난이 아닐걸.”
시로네는 생각이 달랐다.
“내가 봤을 때 연인 사이는 아닌 것 같았어. 뭐랄까, 어딘가 모를 어색함?”
듣고 보니 그랬다.
쉽게 발길을 떼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네이드가 제안했다.
“들어가서 확인해 볼까?”
“뭐어? 하지만 모르는 사람 집이잖아.”
“수상한 냄새가 나서 그래. 네 말대로 시이나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경계해야 할 이유는 없어. 학교에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 집요한 여성 인체 연구회에서도 특별한 기사가 없었던 걸로 봐서는 엄청나게 신중하다는 건데.”
투명 망토가 없었다면 그들도 포기했을 터였다.
“어떡하려고?”
“지하 창고를 통해서 들어가면 돼. 설령 걸린다고 해도 큰일이야 나겠어? 어차피 시이나 선생님이 들어갔으니 생판 모르는 남의 집도 아닌 거잖아.”
“그거…… 굉장히 우리 주관적인 생각 아니냐?”
“그렇다고 해도 포기할 수는 없어. 연구회의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니까. 지푸라기라도 잡아 봐야지. 여기서 기다려. 회장은 나니까, 내가 책임지고 갔다 올게.”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입구에 도착한 네이드는 철문을 살펴보았다.
하늘을 향해 수평으로 설치되어 있고 안에서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주머니를 뒤진 네이드가 와인 따개 크기의 장치를 꺼내자 시로네가 물었다.
“그게 뭐야?”
이루키가 대신 답했다.
“네이드의 특허 목록, 만능열쇠. 자물쇠 내부 기관의 요철을 압박하는 장치야. 홈 판의 스프링을 100분의 1센티미터까지 잡아내지. 장인이 만드는 베어링 방식이 아니면 어지간한 건 다 뚫을 수 있어. 베어링 방식은 구슬이 홈에 걸리는 형태라 조금만 힘이 과중되어도 볼이 미끄러져서…….”
“됐다.”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자물쇠를 해제한 네이드가 문을 열자 채소 냄새가 풍겼다.
“식료품 창고야. 여길 통해서 가면 되겠어.”
네이드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 시로네가 그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잠깐. 혼자 보낼 수는 없어. 나도 같이 가.”
네이드를 말릴 수 없다면 최소한 들키지 않고 빠져나오는 게 상책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루키가 창고 문을 닫는 동안 네이드는 1층 분위기를 살폈다.
“조용한데. 올라가 보자.”
투명 망토를 쓴 세 사람은 얼굴만 동동 떠다니는 모습으로 지하를 빠져나왔다.
거실과 주방이 일체형인 마루가 나오고 중앙에는 화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에 도착하자 모퉁이 바로 옆방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마저 조심한 시로네 일행은 문으로 다가가 귀를 쫑긋 세웠다.
시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빨리 안 하고.”
놀란 시로네와 네이드가 안면 근육으로 호들갑을 떨자 이루키가 입술에 손을 댔다.
“쉿.”
잠시 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아직 준비가 덜 됐어. 일단 옷부터 벗어.”
“아내는 언제 돌아와?”
“시장에 장 보러 갔어. 오늘 삼일장이라, 아마 2시간은 넘게 걸릴 거야.”
네이드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아니, 충격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이, 이게 뭐야?’
시로네도 느끼는 감정은 비슷했다.
시이나 선생님이 만나는 남자가 유부남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게이지 대칭성(2)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청렴결백의 상징인 시이나 선생님이…….’
그녀의 성품을 믿었던 만큼이나 상처도 컸다.
네이드는 애써 좋게 생각하려 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이걸로 연구회는 무사하다. 오늘 일을 빌미로 거래하면…….’
그때 시이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안 입고 하는 거야?”
“뭔가 감이 오거든. 조금 더 허리를 들어 봐.”
“이렇게?”
“응. 다리는 살짝 그쪽으로. 그렇지.”
시로네 일행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성인끼리 정을 통하는 건 상식이지만 이건 불륜이었다.
‘안 되겠다.’
입술을 깨문 네이드가 뒤를 돌아보자 친구들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할게.”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눈에 불똥이 튄 네이드가 문고리를 뒤틀며 진입했다.
“시이나 선생님! 정말 실망입니다!”
이어서 시로네와 이루키가 한쪽 눈을 찡긋 감은 채 뒤를 따라 들어왔다.
정적이 흐르고.
천천히 고개를 되돌리며 방의 풍경을 외곽부터 살핀 시로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시이나가 보였고, 맞은편에는 커다란 캔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어? 어어?”
시로네 일행은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모두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쳤다.
‘망했다.’
놀라기는 시이나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너희들이 여긴 어떻게……?”
딱히 죄를 지은 건 없지만 사적인 자리에서 우연히 제자와 마주치는 건 어떻게든 민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잠시였고, 이내 사태를 파악한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설마, 미행한 거니?”
“네? 아니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저희들은 그냥 공원에 앉아 있었거든요? 근데 시이나 선생님이 갑자기 지나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어쨌든 미행했다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