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17
자정이 넘어가는 종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책상에 앉아 품에서 작은 세필을 꺼냈다.
붓대는 가늘었고 붓촉은 더욱 가늘었다.
손가락 2개를 겹치면 딱 맞을 것 같은 두루마리 종이 위에서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붓촉이 흔들렸다.
손끝이 흔들릴 때마다 진천의 언어가 빼곡하게 적혀 나가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황제 폐하
저는 지금 ‘파편’의 비밀 앞에 와 있습니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임무의 어려움을 고려하건대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 우려스럽습니다.
하여, 위대한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가문의 명기 마정안의 봉인을 풀 생각이오니 미천한 제 실력을 꾸짖어 주십시오.
분골쇄신하여 반드시 ‘파편’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진천 제국 만만세.
세필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안찰은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두루마리 종이를 말았다.
“홍규야.”
이름이 불리자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 천장에 거대한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네, 국장님.”
안찰.
진천 제국 대외감찰부에서도 극비를 취급하는 ‘진천우주국’의 국장.
또한 발키리의 리셋 시스템 분석 기관의 자문을 맡고 있는 세계적인 기밀 보유자이기도 했다.
“네가 직접 전해야겠다.”
“맡겨 주십시오.”
안찰이 머리 위로 두루마리 종이를 던지자 천장의 입에서 혓바닥이 튀어나와 그것을 붙잡고 꿀꺽 삼켰다.
“무례한 말이지만, 부디 조심하십시오. 국장님의 손에 진천의 미래가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알았다.”
천장의 그림이 먹물이 마르듯 사라지고, 안찰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생각에 잠겼다.
‘이스타스.’
지금쯤이면 스크럼블 로열이 종료되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 승리해도 상관없는 경기가 되어 버렸지만 안찰은 시로네 팀이 이기는 게 조금 더 낫다고 생각했다.
‘시불상폭매의 능력을 이용하면…….’
처음부터 시로네를 끌어들일 생각은 아니었으나 시간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는 스크럼블 로열 자체도 의미가 없어졌다.
‘페르미도 조만간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아마도 그는 이스타스의 설계도를 얻었을 거야.’
양쪽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어느 쪽도 내칠 수 있는 안찰이었다.
생각을 끝마치고 침대로 걸어가는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노크했다.
“안찰, 안에 있니?”
‘올리비아 교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안찰은 순식간에 표정을 고치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문을 열었다.
“교감 선생님? 이 시간에는 무슨 일이시죠?”
“면담 좀 하려고. 들어가도 되겠어?”
사소한 실수조차 남겨 두지 않은 방이지만 상대가 공인 제2급의 대마법사라면 들이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니면 밖에서 이야기할까?”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꾀꼬리처럼 아름다웠으나 오늘만큼은 심금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네. 밖에서 들을게요. 바람 좀 쐬고 싶어서.”
건물을 나서자마자 올리비아는 다짜고짜 공간 이동을 시전하여 날아가 버렸다.
보통의 학생이라면 황당한 느낌이 먼저 들겠지만 안찰 또한 군소리 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도착한 곳은 학교를 둘러싸고 있는 산맥의 반대편, 그것도 깊은 골짜기의 밑바닥이었다.
“무슨 일이죠? 학생을 이런 곳까지 불러내서 뭘 어쩌시려고요?”
“안찰, 너 몇 살이냐?”
“…….”
이미 끝장을 볼 생각으로 찾아온 것이라면 안찰도 더 이상 속일 이유가 없었다.
“서른두 살입니다.”
“그럴 줄 알았지. 동방의 사람들은 정말 어려 보이는군.”
“동방에서는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그래서 알고 싶은 게 뭐죠? 이스타스의 비밀? 내 정체?”
“가능하다면 전부 다.”
안찰은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관심을 두지 않는 게 당신에게도, 학교에도 좋을 것입니다.”
진천을 지배하는 자는 다름 아닌 삼황계였다.
“제국 간의 알력에 말려들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스타스는 엄연히 사적 소유물이거든. 그리고 나는 소유자에게 전권을 위임받아 관리하는 사람이고.”
“학교에는 피해 안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내가 들어 보고 판단할 일이야.”
“죄송합니다. 당신에게 해 줄 말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
살며시 입술을 벌린 올리비아가 초음술을 시전하자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소리로 음절들이 튀어나왔다.
절벽에 반사되는 소리들이 증폭되면서 안찰의 고막을 괴롭혔다.
‘굉음. 이래서 이곳을 택했군.’
안찰의 정신이 어지러운 사이에 전문 서적 한 권 분량의 언령을 읽어 낸 올리비아가 마법을 시전했다.
‘그레이트 익스펜션.’
공기가 팽창하면서 높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골짜기가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우르르르릉!
장관의 산사태가 끝나고, 인간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더 이상 골짜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골짜기를 메워 버린 암석들 위에 착지한 올리비아의 눈이 순간 번쩍였다.
진천요술-거인.
몸을 날리는 순간 20미터 신장의 거인이 나타나 주먹을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거인의 팔이 암석을 뚫고 들어가 어깨 언저리까지 파묻히자 올리비아도 식은땀이 날 수밖에 없었다.
‘환영으로 물체를 파괴했다는 것은…….’
마치 흙 속에 파묻힌 반지를 찾듯 거인이 팔을 휘젓더니 지하 깊은 곳에서 안찰을 끄집어냈다.
한쪽 눈을 가린 가죽 안대가 찢어져 있고 그 안에 담긴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드러나 있었다.
“그게 마정안인가?”
안찰을 지상에 올려놓고 거인이 사라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정말로 나와 싸워 보겠다는 건가?”
“학교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지.”
“건방 떨지 마라, 올리비아. 나는 군인이다. 대마법사라고 해도 교사에게 당할 내가 아니야.”
안찰이 가죽 안대를 뜯어내자 올리비아가 말을 덧붙였다.
“제국의 기밀은 상관하고 싶지 않아. 다만 이건 학생의 문제야. 왜 시로네인지, 페르미는 어째서 이스타스에 관심을 갖는 것인지를 납득시켜. 이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최대야. 만약 이마저도 거부하겠다면…….”
올리비아가 입술을 풀고 말했다.
“얼마든지 상대해 주지.”
“…….”
한참을 생각하던 안찰은 마정안의 빛을 소멸시키고 암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진천우주국 요원이다.”
올리비아가 두 손을 내리며 암벽에 기댔다.
“우주적 초기화, 리셋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임무지. 현재까지 우주는 세 차례의 초기화를 겪었다. 시작은 거핀이라는 자로부터.”
안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9년 전, 거핀이라는 자가 천국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미로에게 임무를 맡기고 사라졌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안찰이 손가락을 들었다.
“어째서 거핀은 자신을 말소시킬 수밖에 없었는가? 미로를 후계자로 삼은 것으로 보아 이 세계에 대한 그의 애정이 식었다고 보기에는 무리야.”
“흐음.”
“발키리의 가설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거핀은 자신이 직접 할 수 없는 일을 미로를 통해 마무리 지었어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에 어떤 식으로든 시로네가 연루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시로네라고?”
안찰은 기밀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다음 건으로 넘어갔다.
“거핀 말소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재앙이었을 거야. 천국의 군대를 막아 주던 방파제가 사라져 버린 셈이니까.”
“반발이 심했겠군.”
“기억은 못 하지만 예측은 가능하지. 그리고 그 반발의 핵심에 페르미의 어머니인 욜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로네와 페르미라.”
“이 정도면 납득할 이유가 됐을까? 이스타스를 조사하려면 반드시 그 두 사람이 필요해.”
“좋아. 하지만 어째서 이스타스지?”
여기서부터는 보안 등급이 훌쩍 뛰지만 올리비아의 의문도 당연했다.
“균열장 검증 실험에 대해 알고 있나?”
“대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시간과 에너지의 총량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거 아냐?”
“맞아. 앙케 라 말소기, 대정화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계속 균열장을 계산했어. 그런 와중에 거핀 말소기의 균열값이 언제나 고정적이라는 것을 찾아냈지. 리셋이 거듭될수록 균열은 더욱 복잡해져야 마땅한데 말이야.”
“그게 어떤 의미야?”
“3차의 리셋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건이 존재하고 있다는 거지.”
안찰이 시공간의 십자가를 허공에 그렸다.
“왜 이스타스인가? 그곳에 설치된 거핀의 문은 다른 유적과 달리 시공간의 한 좌표에 고정되어 있어. 시간을 멈추지 않으면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좌표. 진천우주국은 균열장값을 통해서 그 좌표를 시간과 공간으로 분리시켜 보았다.”
안찰이 실을 잡는 듯한 손짓을 취하더니 좌우로 벌렸다.
“공간적인 정보를 시간으로 연결한 결과 대략 3시간 남짓의 사건이 진행되었다는 결론에 도달.”
그 사건이 거핀 말소에서 발생한 균열의 정체였다.
“한마디로 거핀은 특정 사건을 고정시켜 버린 거야. 왜 그래야 했을까? 2차, 3차의 리셋과는 다른 점이지.”
“그 사건이 이스타스의 상층부라는 거야?”
“상층부의 루머는 알고 있겠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 이건 어떤 사건을 지칭하는 말이야. 그리고 그 사건은 리셋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정말로 가능한 거야, 세상이 초기화되었음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건이라는 게?”
“가능해.”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물론 정상적으로는 어렵지. 단, 사건 자체가 하나의 세계가 되어 독립된 상태로 우리의 세계와 연결되었을 경우.”
“이를테면 또 다른 우주 같은 건가?”
안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우주국은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이스타스 상층부의 세계를 미리 시뮬레이션했어. 어떤 세계인지 알아야 잠입의 난이도를 알 수 있을 테니까. 놀라운 결과가 나왔지.”
“놀라운 결과라면?”
“처음과 끝이 없어.”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안찰이 손가락을 휘돌렸다.
“이스타스의 상층부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 그 3시간 남짓의 사건이 영원히 반복되고 있다는 거야.”
그날의 사건 (1)
지중해의 열두 번째 섬, 로블랑 왕국.
인구 70만의 이 작은 나라는 국민의 70퍼센트가 관광업에 종사할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세계적인 휴양지이자 거부들의 조세 피난처인 이곳의 호텔에서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정치인들의 비밀 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마리카 호텔, 지하 2층 선술집.
“빠레이!”
테이블 6개를 붙여 두고 14명의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자 그럼에도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여성, 미로가 있었다.
“한 잔 더!”
“도전하는 거야?”
“물론이지. 아직 멀었어!”
미로가 호기롭게 손을 들자 사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아가씨 보통 주당이 아니구먼. 좋아! 카둔, 한 잔 더 말아 줘.”
“맡겨 달라고!”
1천 시시 글라스를 세워 두고 카둔이라는 남자가 테이블 위로 올라가 양손의 술병을 기울여 폭포수처럼 술을 들이부었다.
두 종류의 액체가 거품을 일으키며 채워지고 미로가 비어 컵을 움켜쥐자 순식간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꿀떡꿀떡 미로의 목이 움직일 때마다 관중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마지막 한 모금이 넘어가는 순간 모두가 벌떡 일어섰고, 쾅 하고 컵을 내려놓은 미로는 의자 2개를 밟고 올라가 주먹을 옆구리로 끌어당겼다.
“빠레이!”
14명이 동시에 외치는 소리가 선술집을 쩌렁쩌렁 울렸다.
“팔자 좋군, 미로.”
“어?”
고개를 돌린 미로는 어느새 선술집에 들어와 있는 세인을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이야, 내 친구! 여긴 어쩐 일이야?”
술에 취한 듯, 미로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 있었다.
“빠레이!”
누군가가 또다시 독주를 들이켰나 보다.
벽을 사이에 두고 전해지는 환호성을 들으며 미로는 침대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 취한다. 폴카를 너무 마셨나 봐.”
폴카가 무엇인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일은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거야?”
세인의 물음에 미로가 천장을 가리켰다.
“14층에 있어. 얘기가 길어지나 봐. 결론이 나려면 2일은 더 걸릴 것 같은데.”
세인이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즐기는 건 좋지만 조심해. 너를 노리는 자들이 많으니까.”
“후후, 감히 누가 나에게 덤비겠어?”
천하의 미로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것이지만 오늘따라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을 보자니 노파심이 들었다.
‘하긴, 20년을 갇혀 있었으니.’
본래부터 자유분방한 미로의 끼가 주체하지 못하고 폭발해 버린 듯했다.
‘어쩌면 세계 최고의 악동이 풀려난 것일지도 모르지.’
미로가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직접 찾아오고.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
“조금. 페르미가 나에게 다녀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