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26
시간 : 1시간 48분.
공간 :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
거핀의 문을 통해 이스타스로 돌아온 미로의 품에는 카즈라의 왕자가 잠들어 있었다.
뒤를 따르는 시로네의 마음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결국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시로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미로가 말했다.
“너에게 현재는 나의 미래야. 상층부의 비밀을 가지고 돌아가. 그곳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그때 문이 열리며 욜가가 들어왔다.
‘결국 일어나는구나.’
시로네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나게 될까 긴장했지만 그녀의 곁에는 동료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건이 다시 뒤틀렸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욜가를 이곳으로 보낸 것일까?
“미로, 지금 안고 있는 아이는 누구지?”
미로의 눈썹이 꿈틀했다.
‘알고 있다. 대체 누가?’
다른 시간대에서 만났더라도 욜가에게는 절대로 발설할 사안이 아니었다.
“카즈라의 왕자야. 헥사는 더 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아. 그러니 언니도 그만 포기해.”
“아니.”
욜가의 시선이 거핀의 문으로 향했다.
폐곡선이 완전히 닫히기 전까지 차원은 연결되어 있을 터였다.
“지금이라면 되돌릴 수 있어.”
“되돌릴 수 없어. 내가 있는 한.”
“미로, 단지 몇 사람의 희생이라고 말하지 마라. 이건 인간 전체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야. 우리가 우리의 미래를 선택하지 못한다면 결국 멸망하고 말 거야.”
욜가의 통찰력은 100년, 1천 년을 지나 1만 년 이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1명의 초월자에게 모든 것을 의지했다는 역사를 인간에게 만들어 주면 안 돼.”
“거핀은 인간을 위해 싸웠어.”
“하지만 그는 우리의 신이 아니야. 우리가 선택하게 해 다오. 그것만이 인간이 무한해지는 길이야.”
“지금 막지 못하면 미래는 없어. 거핀의 의지를 대신해서 내가 모든 걸 희생하면 돼.”
역시나 타협점은 찾을 수 없었고, 욜가가 눈에 힘을 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다.”
미로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거핀의 문을 지켜.”
욜가의 동료들이 움직이는 순간 시로네와 안찰이 문을 가로막았다.
‘과연 옳은 일일까?’
시로네는 두 사람 모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보았다.
어차피 삶이란 그런 것이고, 그렇기에 선택은 형벌일지도 모른다.
‘흔들리면 안 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 되는 거야.’
가올드가 그랬고, 줄루가 그랬으며, 플루가 그랬다.
‘그것이 바로 마법사.’
미로를 믿어 보기로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헥사를 차원의 벽에 가두지 않고 본래의 세상으로 보내 주었다.
그것만이 시로네를 이끄는 유일한 희망의 빛이었다.
“너무 늦었어, 언니.”
미로는 카즈라의 왕자를 허공에 띄운 다음 구석에 내려놓았다.
“죽일 테면 죽여 보라는 거니?”
헥사와 바꿔치기가 끝난 지금 미로가 목숨을 걸고 카즈라의 왕자를 지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게 희생이니까.”
미로의 눈에 광채가 일렁거리며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거대한 관음의 화신이 피어올랐다.
“이제부터는 다를 거야.”
욜가의 몸에서도 마리아의 화신이 피어올랐다.
“설령 관음이라도 내 화신을 깰 수는 없어.”
“성 마리아라면 그렇지.”
미로의 손이 교차되자 관음의 두 손바닥이 수백 장으로 중첩되어 욜가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계속 얻어맞고 계시든가.”
쿠쿠쿠쿠쿠쿵!
창고가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욜가의 동료들이 거핀의 문으로 돌진했다.
“내가 여자를 맡을게. 문을 지켜.”
안찰이 무스탕을 유인하고, 에드가와 나인이 홀로 남은 시로네의 좌우에서 쳐들어왔다.
아르망의 예민한 신경으로 동선을 파악한 시로네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후우우우!”
인류의 미래를 위해 하나의 의견을 더한 마법사의 정신은 더 이상 흔들림이 없었다.
‘안티테제!’
인공두뇌 외가 아카마이의 눈으로 변하자 지척까지 다가온 에드가와 나인의 몸이 굳었다.
“크윽!”
순간적으로 행동의 의지가 구속되고 시로네의 스피릿 존에 경계선이 사라졌다.
엘리시온-소나 익스플로전.
에드가와 나인의 몸속에서 빛이 탄생하더니 급격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어떤 스피릿 존도 고유의 정신을 가진 생물체의 내부에 현상을 일으킬 수는 없다.
하지만 시로네는 정신의 경계선이 없기에 공간 그 자체에 시전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이건 걸리면 즉사다!’
천하의 뭐가 됐든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나면 버틸 재간이 없었기에, 에드가와 나인은 필사의 스키마를 발동하여 간신히 안티테제를 벗어났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실력이라고 할 수 있으나 폭발하는 질량파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두 번의 폭음성이 연달아 터지면서 두 사람의 몸이 벽까지 날아갔다.
몸이 폭발하는 것은 면했지만 에드가의 기계 팔은 박살이 났고 나인은 극심한 내장 손상을 입었다.
안찰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무스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시로네를 돌아보고, 욜가 또한 성 마리아의 상태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떻게…….”
전혀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익숙한, 하지만 누구도 모방할 수 없었던 현상이 눈앞에 펼쳐진 충격이었다.
“거핀의 울티마 시스템을?”
미로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저 아이가 미래의 헥사야.”
시로네를 바라보는 욜가의 눈이 충격에 흔들렸다.
***
페르미에게 배신당한 라이컨이 행동 양식을 바꿈에 따라 루캉은 다시 미로에게 하체가 으스러진 채로 죽음을 맞이했다.
욜가의 키스는 덤이었다.
그렇게 루캉의 시신을 뒤로하고 다시 미로를 찾아 길을 나서는 그들의 앞에 페르미가 나타났다.
시간 : 1시간 10분.
공간 : 65번 창고.
“당신은?”
“장사꾼입니다. 이곳에서 돈 냄새가 나서요.”
욜가는 그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청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장사꾼은 어디에나 있지요.”
무스탕이 말했다.
“페르미를 닮았네.”
뼈가 있는 말에 욜가가 물었다.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공교롭게도, 제 이름도 페르미네요.”
페르미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와 물었다.
“당신에게도 아는 페르미가 있나 보죠?”
“네. 저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랍니다.”
페르미는 남몰래 아랫입술 안쪽의 살점을 씹어서 뜯어냈다.
욜가가 흔들리지 않는 한 그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돈이 될 것은 좀 찾았나요?”
페르미는 주머니에 담아 온 수십 개의 를 꺼냈다.
“네, 제법. 이 정도면 수천억 골드는 금방이겠어요.”
욜가는 페르미의 미소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곳에 얼마나 오래 있었죠?”
“시계가 없는 곳이라서. 생물학적 시간으로는 꽤 된 것 같지만.”
욜가의 질문은 아닌 듯해도 언제나 핵심을 찌르기에 페르미는 황급히 화제를 전환시켰다.
“받으세요. 거래입니다.”
오브제를 담은 주머니를 통째로 내밀자 욜가는 순순히 받아 들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좋은 물건이네요. 복제품이군요.”
페르미가 굳이 상층부로 가지고 갈 물건을 로 고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욜가 또한 이미 알고 있을 터였고, 그녀는 난감하게 고개를 저었다.
“수십 개의 생명을 받은 셈인데, 저에게는 그 정도의 가치를 지불할 능력이 없답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있으니까. 이래 봬도 수완이 좋은 편이거든요.”
욜가는 즐겁다는 듯 웃었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렇다면 저에게 뭘 원하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위대한 마법사에게 조언을 받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요.”
욜가의 고개가 고양이처럼 갸우뚱 기울었다.
“제가 답변할 수 있는 것이라면.”
페르미는 미소를 거두고 물었다.
“저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요?”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억만금을 주고서도 살 수 없었던 질문이었다.
시간의 큐브 (5)
페르미는 하염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사건을 뒤틀면 어머니는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페르미에게 욜가는 어머니 그 이상의 존재였기에 그녀의 죽음을 부정하는 것조차 모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알고 싶었다.
어째서 욜가가 상층부로 들어가야 했는지, 그토록 뛰어난 어머니가 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는지.
“살다 보면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죠.”
욜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페르미,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괜찮은 일이에요. 그것을 고민하지 않게 되었을 때 인간의 존재 가치는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제가…… 천하의 악당이라고 해도 그럴까요?”
욜가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인간이 선악을 선택하는 것이지 선악이 인간을 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훌쩍 큰 페르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항상 기억하세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런다면 설령 길을 잃더라도 다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모든 부모는 자식을 감싸지만 욜가의 말에는 페르미의 인격 전체를 보듬는 인자함이 있었다.
‘나의 어머니. 나만의 어머니.’
아니, 온 세상의 어머니였다.
“답변이 되었나요? 좋은 물건을 받은 것에 대한 보상이 될지 모르겠네요.”
“차고 넘칩니다.”
페르미가 돌아서자 욜가가 황급히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나요?”
“앞으로요.”
고개를 돌린 페르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택했거든요.”
시간 : 2시간 13분.
공간 : 초자연 심령과학 연구회.
처절한 공방전이었다.
불, 냉기, 공기의 세 가지 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무스탕은 독자적으로 개발한 듯 세상에 없는 마법을 펼쳤고, 진천우주국의 국장 안찰 또한 가능한 모든 환영을 끌어내어 방어하고 있었다.
시로네의 엘리시온은 목표물이 아닌 공간 그 자체에 마법을 시전함으로써 에드가와 나인을 압박해 나갔고, 미로의 관음은 이제 광기에 휩싸인 듯이 욜가의 몸에 난타를 퍼붓고 있었다.
‘역시 강하구나, 미로.’
단지 경지의 문제가 아니라 미로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을 초월하고 있었다.
‘거핀이 너를 선택한 것도 이해가 가.’
욜가가 세상의 가장 낮은 위치에서 반야의 경지에 올랐다면 미로는 인간의 생각보다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
‘의지하고 싶다.’
미로의 곁에 있으면 안심이 된다는 것은 욜가가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끌어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질이었다.
‘내가 인류의 어머니라면…….’
미로는 인류의 아버지.
위기의 최전선에서, 어떤 고통도 내색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지키는 자.
‘그래, 미로야. 우리들은 틀리지 않았어.’
하지만 세상은 둘 중 하나만 남으라 한다.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인간에게 필요한 건 아버지일까, 어머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