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3
“일단 차부터 들어요. 좋은 건 아니지만 아내의 비법이 들어가서 입에는 맞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시로네 일행은 공손하게 찻잔을 받았다.
화가로 전향했다고 해도 무려 20년 전부터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사람이다.
불운한 운명을 탓할 수는 있어도 마법사 지망생인 그들이 아르민을 얕잡아 볼 수는 없었다.
캔버스로 돌아간 아르민이 뒤편의 자리를 권했다.
“그럼 일단 나도 작업을 해야겠는데. 손님들은 여기서 기다려 주면 안 될까요?”
“네, 물론이죠.”
시로네 일행은 찻잔을 들고 엉거주춤 자리를 옮겼다.
시이나가 다시 침대에서 자세를 잡자 잠시 눈치를 보던 네이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아까 들은 ‘오늘은 안 입고 하는 거야?’라는 말은 무슨 뜻이었나요? 혹시 누드화라면 자리를…….”
“하하! 제가 앞이 안 보이기는 해도 여동생에게 그런 부탁을 할 수는 없지요. 그러고 보니 오해를 살 만했군요. 시이나, 그것 좀 꺼내 줄래?”
시이나는 옷장에서 은박 코트를 꺼냈다. 햇빛이 반사되어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엄청 밝네요.”
“스피릿 존만으로는 사물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니까요. 인물이나 사물에 발광체를 입혀서 빛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 의미로 은박 코트는 아주 좋은 도구죠.”
“그렇군요. 빛을 느껴서 그림을 그리다니.”
“눈을 잃은 대신 다른 화가들이 그리지 못하는 걸 그릴 수 있는 거죠. 하지만 시이나를 그리는 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좋은 후원자가 나타나서 며칠 내로 이사를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시이나 본연의 느낌을 살려 보고 싶었어요. 코트를 입으면 아름다움이 퇴색되는 기분이라서요.”
시이나의 뺨이 붉어졌다.
“오빠도 참…… 주책없는 소리는.”
“하하! 뭐 어때? 내 기억 속의 너는 여전히 아홉 살짜리 꼬맹이라고.”
“알았으니까 빨리 그리기나 해. 케이라 씨 돌아오면 작업도 못 하잖아.”
시로네 일행은 미묘하고 간지러운 기류에 손가락과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오누이 같은 사이인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피가 통하는 혈육은 아니었다.
시이나가 불륜이라는 소리에 평소보다 과격하게 반응했던 이유에는 어쩌면 아르민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 시작할게. 느낌대로 그리는 거니까 평소보다 일찍 끝날 거야.”
시이나가 다소곳이 자세를 취하자 아르민은 목탄을 들고 윤곽을 따기 시작했다.
점차 시이나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자 시로네 일행은 감탄했다.
“우와, 진짜 빠르다.”
“쉿.”
이루키가 주의를 주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화가에게 치명적인 단점이니 평소보다 집중력이 많이 요구될 터였다.
물론 합당한 생각일 테지만, 시로네는 그렇기에 오히려 의아함을 느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발광체가 없는데도 아르민은 시이나의 세밀한 특징까지 정확히 잡아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스피릿 존이 그만큼 정밀하다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 디테일은…….’
스피릿 존의 밀도와 비중을 끌어올리면 공감각을 통해서 정밀 묘사가 가능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표정에 담긴 느낌까지 잡아내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림은 더욱 정밀해졌고, 시이나는 학교에서 볼 수 없는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아르민은 식빵을 지우개처럼 사용해 그녀의 미소를 완벽하게 구현했다.
시로네는 거의 확신했다.
‘그렇구나.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초상화에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입꼬리다. 미묘한 각도의 변화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저기, 아르민 씨.”
“……네?”
아르민이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틀자 시로네는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다.
만약 잘못 짚은 것이라면 엄청난 실례를 저지르는 셈이었다.
“혹시 아르민 씨는…….”
하지만 물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기에 시로네는 용기를 냈다.
“눈이 보이는 거 아닌가요?”
“…….”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는 아르민의 손이 우뚝 멈췄다.
목탄을 내려놓은 그가 몸을 틀며 말했다.
“네, 볼 수 있습니다.”
시로네는 말을 잃었다.
정말로 눈이 보인다는 것인가? 그런데 어째서 시이나 선생님은 모르고 있었을까?
“궁금한 게 많겠죠.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시로네를 향해 완전히 돌아앉은 아르민은 두 눈을 가리고 있는 헝겊을 풀었다.
감겨 있는 눈 주위로 수많은 상처들이 새겨져 있었다.
‘다친 건 분명한데, 어떻게 본다는 거지? 아니, 애초에 눈을 가리고 있었잖아. 그런데도…….’
그 순간 아르민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고, 시로네는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눈동자가 없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텅 빈 안와에 빛이 가득 차 있었다.
“네, 네이드. 저거 보여?”
시로네는 다급한 마음에 네이드의 허벅지를 때렸다.
그런데 손에 전해지는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금속을 만지는 것 같은 단단함.
고개를 돌려 친구들을 살핀 그가 경악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네이드가 눈꺼풀조차 흔들리지 않은 상태로 굳어 있었다.
턱을 괴고 있는 이루키와, 침대에 앉아 미소 짓는 시이나조차 밀랍 인형처럼 미동이 없었다.
혼란에 빠진 시로네의 등 뒤로 아르민이 다가왔다.
“제 방에 손님이 찾아온 건 오랜만이군요.”
“설마, 이거?”
“네, 마법입니다. 스톱이라고 하죠.”
시로네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돌아섰다.
스톱은 광속을 구사하는 마법사만이 가능한 마법으로, 역사를 통틀어도 이 경지에 도달한 자들은 손에 꼽았다.
한마디로 시간 마법의 절대적 경지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앉으세요. 차분하게 이야기해 보죠. 시간은 많으니까요.”
“하, 하하.”
시로네는 어색하게 웃었다.
확실히 시간이 멈췄다면 시간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아까부터 쭉 긴장하고 있었어요. 언제 시로네 군이 눈치챌지 모르니까요.”
“제가 눈치챌 거라는 걸 어떻게 아셨죠?”
아르민은 안와에 담긴 빛을 가리켰다.
“눈이라는 기관은 빛을 받아들여 시각적인 정보로 재구성하죠. 하지만 눈이 없는 저는 빛 자체로 세상을 느낍니다. 이건 꽤나 끔찍한 경험이에요. 보통 사람이 인식하는 사물의 형태가 저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이거든요.”
“이데아 같은 거군요.”
인간의 감각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벽돌은 젤리처럼 말랑할 수도 있다. 불은 차갑고, 연인의 키스는 고통을 수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소개하죠. 저는 광안의 아르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영겁의 성찰자라고 불리는 마법사입니다.”
‘영겁의 성찰자.’
그 말을 듣는 순간 시로네는 아르민이 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를 깨달았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이 방에 계셨죠?”
“이곳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얼마나 오래라는 말도 쓸 수 없죠. 다만 생각의 양으로 환산하자면, 대략 120년 정도가 되겠군요.”
시로네는 상상할 수 없었다. 천재적인 재능의 마법사가 120년에 맞먹는 사유를 했을 때의 결과물을.
“하지만 아르민 씨는 어릴 때 마법을…….”
“네, 불행한 사고였죠. 올리페르 학파를 떠나서 15년 동안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돌았어요. 한 줄기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흑의 세계를요.”
게이지 대칭성(4)
아르민은 당시를 회상했다.
“어둠에서 공간은 정의되지 않습니다. 공간이 사라지니 시간도 사라지더군요. 그러다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이미 시간을 벗어났다는 사실을. 그것이 스톱 마법을 구사하는 전능의 비결입니다.”
수많은 마법사들이 정복하지 못한 스톱 마법의 요체를 들은 시로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저에게 말씀해 주셔도 괜찮은 건가요?”
“괜찮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말한 것뿐, 실제로는 꽤나 복잡하고 깊거든요.”
물론 그럴 것이다.
“그리고 스톱이라고 해서 딱히 초월적인 마법은 아닙니다. 스피릿 존의 반경 내에서만 가능하고, 가장 큰 제약은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죠.”
아르민은 시이나를 돌아보았다.
“착한 동생이죠. 마음이 여린 아이입니다. 시로네 군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하하! 글쎄요. 여린 건 잘 모르겠지만, 정말 강한 분인 것은 확실하죠. 공인 6급인데요.”
“네. 그렇다면 어떨까요? 시간을 멈춘 상태라면 우리가 시이나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을까요?”
“아.”
시로네는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어떤 식으로 비유하든 물리력을 넘어선 상태였다.
“시간이 멈추면 에너지도 움직일 수 없다. 힘의 교환이 불가능한 상태군요.”
“네. 사건 자체가 흐르지 않아요. 폭발의 과정을 순서대로 도화지에 그린다고 해 보죠. 그런데 다음 장이 없으면? 폭발은 마지막 장에 그린 상태로 얼어붙는 겁니다.”
“마치 공간처럼 말씀하시네요.”
아르민은 미소 지었다.
“그게 바로 스톱 마법의 핵심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고, 가속과 중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톱 마법의 스피릿 존 안에서 마법사의 전능은 광속을 감각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실상 현실에서는 0.1초도 흐르지 않은 상태예요. 상대적으로 비유하자면 빛의속도로 움직이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죠.”
“빛의속도.”
시로네는 다시 네이드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네이드에게 간섭할 수 없는 거군요. 우리의 질량은 현재 0일 테니까요.”
질량을 가진 물질은 광속에 도달할 수 없다.
“전지는 그렇습니다. 물론 이건 마법이라, 전능이 반드시 결합되어야 하지만요. 스피릿 존 안에서 벌어지는 시간과 공간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시로네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이런 얘기를 해 주시는 거죠? 저는 그저 아르민 씨를 의심했을 뿐인데요.”
“바로 그 의심 때문입니다, 시로네.”
아르민은 헝겊을 팽팽하게 당겨 다시 두 눈을 가렸다.
“어떻게 눈치챌 것을 알았냐고 물었죠? 간단합니다. 저 또한 시로네 군과 같은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같은 경험이라면…… 설마?”
“네. 이모탈 펑션입니다.”
시로네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누구도 답을 내리지 못한 이모탈 펑션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눈앞에 있다. 그것도 시간 계열의 최고위 마법사가.
“이모탈 펑션은 전체에 대한 깨달음이에요. 전체는 하나이기에 시로네 군과 저의 파장이 공명하는 겁니다. 초상감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시로네 군이 저에게서 느꼈듯, 저도 시로네 군에게서 느끼고 있습니다.”
“……이모탈 펑션이라는 건 뭐죠?”
“무한으로 가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죠. 시로네 군은 그 관문을 연 것이고요. 마법사회에서는 이런 자들을 일컬어 언로커라고 부릅니다.”
잠시 생각하던 시로네가 고개를 들었다.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괜찮아요. 시로네 군이 여전히 이 세상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우려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다만…… 혹시 이모탈 펑션을 열었을 때 자아가 흩어지는 느낌을 받지 않았나요?”
“네, 맞아요! 정말 사라지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렇게 됐을 겁니다. 스피릿 존이 무한으로 커지면서 정신도 소멸하는 거죠. 언로커는 그 지점을 잡는 게 중요합니다. 정신이 확장되면 위력은 세지겠지만,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서면 주체할 수 없는 해방감 속에서 자아를 잃어버리고 말아요. 명심하세요. 그때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시로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따라서 언로커는 스피릿 존의 크기, 즉 자신의 가용 한계치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해요. 한계가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한계는 곧 소멸입니다.”
아르민은 열반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시로네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그의 말을 곱씹은 시로네가 물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문제가 있어요. 밤마다 꿈에서 우주를 봐요. 아르민 씨를 만났을 때 느꼈던 초상감도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고요. 그렇다고 주위에 다른 언로커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아르민은 미소로 안심시켰다.
“그것 또한 당연한 수순입니다. 이모탈 펑션을 개방했을 때 시로네 군은 잠시나마 무한의 영역, 우주의 전체에 닿았던 거예요. 거기에서 감각, 인지, 지적 능력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이죠.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아가 쇼크를 받은 겁니다.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게 되면, 저절로 사라질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죠?”
“저절로. 언제가 될지는 모릅니다. 빠를 수도, 평생이 걸릴 수도 있죠.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시로네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상태일 뿐이에요.”
“하지만…….”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말에 불안해하는 시로네의 모습에서 아르민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하긴, 지금 당장은 이런 말로 위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좋아요. 시로네 군이 깨달은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게이지 대칭성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게이지…… 대칭성?”
“인간은 자신이 완벽한 대칭 상태의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당연하죠. 사실은 팔이 2개인 게 비정상이고, 3개여야 정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절대적으로 정상이라는 뜻이 아닌, 그것이 존재의 방향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대칭성이 깨져 있는 것처럼 보이죠. 미지. 어쩌면 우리 인간의 감각으로는 영원히 밝혀내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 미지에 제가 닿은 거군요. 어떤 감각이라 부를 수 없는, 무언가를 통해서요.”
아르민은 시로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이나의 제자는 참으로 뛰어난 재목이었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지만, 결국 시로네라는 존재는 초상감의 정체를 밖으로 끄집어낼 테니까요. 모든 게 명확해지죠. 그때가 되면 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시로네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오늘의 만남이 자신의 미래에 거대한 분기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르민 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시이나 선생님 말대로 오버플로우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근래 좀 다툼이 있었는데, 죄송하네요.”
아르민은 짐작이 갔다.
“이해해 주세요. 어린 시절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 더 조바심이 났을 겁니다. 사실은 그렇게 고집이 세지도, 차갑지도 않은 아이예요. 겪어 보면 아실 겁니다.”
“당연히 알죠. 늘 도움을 받는걸요. 정말 좋은 분이세요.”
“……그래요.”
마치 자신의 일처럼 안도의 미소를 지은 아르민이 캔버스를 돌아보았다.
“슬슬 방을 나가죠. 시간 역장을 오래 유지하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그림을 끝내지 못할 수도 있어요. 꼭 완성시키고 싶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하셨죠?”
“네. 거창한 별호도 있지만 일단 본업은 화가니까요. 오늘 짐을 정리해서 빠른 시일에 떠날 생각입니다. 당분간은 시이나를 볼 수 없겠죠.”
“차라리 솔직히 밝히시는 게…….”
아르민은 고개를 저었다.
“시이나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요. 제가 마법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해도, 잃어버린 눈이 다시 생기는 건 아니죠. 게다가 이미 결혼까지 한 몸이에요. 시이나가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목숨보다 아끼는 동생이 과거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네. 저도 비밀을 지킬게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시로네.”
아르민이 다시 캔버스 앞에 앉고 시로네가 자리로 돌아가자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네이드와 이루키의 숨소리가 들리고, 시이나의 미소에 생기가 깃들었다.
시로네는 꿈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아르민과 대화를 나눴다는 것조차 믿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