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4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그림을 완성시킨 아르민이 시이나에게 보여 주었다.
“어때, 잘 나온 것 같아?”
“응. 예쁘다.”
“그동안 고마웠어. 너를 그릴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오빠는. 우리가 무슨 남도 아니고…….”
시이나의 눈에 아쉬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아래층에서 발소리가 들리자 작별의 정을 나눌 새도 없이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벌써 아내가 돌아올 시간인가?
다른 때보다 빨랐지만, 깊게 생각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너희들도 어서 나와.”
시이나가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모습에 시로네 일행은 속이 상했다.
아르민의 아내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겁을 먹는다는 것은 속마음을 들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이나가 문고리를 잡기 직전, 문이 열리면서 아내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여보, 그림 그려?”
아르민의 성격만큼 차분한 사람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20대 초반의 발랄한 여성이었다.
시이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시이나 씨? 그러고 보니 오시는 날이었네.”
“안녕하세요, 케이라 씨. 오랜만이네요.”
“그러게요.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혹시 일부러 저 피하는 거 아니죠? 호호호!”
시이나는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아, 오빠랑 작업은 끝났어요. 이만 가 보려고요.”
“이왕 왔는데 급할 게 뭐 있어요? 저녁 먹고 가요.”
“말씀은 고맙지만 약속이 있어서…….”
“흐음, 수상한데? 여보, 혹시 나 없을 때 시이나 씨랑 이상한 짓 한 거 아냐?”
“케이라, 말조심해.”
아르민이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으나 케이라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른 시이나가 코트를 입는 둥 마는 둥 하며 방을 나서자, 속이 상한 시로네 일행도 케이라를 흘겨보며 뒤를 따랐다.
눈치가 없는 건지 속이 좋은 건지, 케이라는 눈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가, 꼬마들아.”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들의 냉랭한 태도에 케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표정들이 왜 저래? 설마 자기, 진짜로 이상한 짓 한 거 아냐?”
“장난 그만 치고 내려와. 작별 인사만큼은 제대로 하고 싶으니까.”
“치. 하여튼 여동생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아르민이 달리듯 계단을 내려갔다.
시이나도 이대로는 개운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시로네 일행과 함께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 시이나. 워낙에 왈가닥이라.”
“괜찮아.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네. 편지해. 건강 조심하고.”
“그래, 너도 열심히 해. 그래도 제자들과 사이가 좋은 모습을 봐서 오빠는 안심이 된다. 솔직히 네가 선생님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는데. 하하하!”
시이나는 피식 웃었다.
자신을 아이 취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르민밖에 없을 것이다. 철없던 시절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시로네는 가슴이 뭉클했다.
어째서 시이나가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는지, 오버플로우에는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빙결의 시이나라는 악명까지 얻으면서 남자들을 멀리했는지,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럼…… 진짜로 갈게. 잘 지내.”
“그래. 자리 잡으면 기별할게. 시로네, 네이드, 이루키. 열심히 해라.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한 너희들의 이름을 멀리서나마 듣고 있을게.”
“네. 오늘 죄송했습니다.”
시로네 일행은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아르민의 배려가 아니었다면 일이 이토록 무사히 끝나지는 못했을 터였다.
시이나가 제자들을 데리고 멀어지는 모습을 아르민은 마지막까지 지켜보았다.
그때, 어느새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고 있던 케이라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르민, 그만 정신 차려. 감상에 젖어 있는 모습을 상부에서 보게 되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언짢은 표정의 아르민이 돌아섰다.
3년 동안 부부로 위장하며 살았지만 정말이지 정이 안 가는 여자였다.
“내가 어떤 감정을 갖든 그건 내 마음이야. 보고나 해. 조사는 끝났나?”
“완벽하게. 크레아스에는 이제 더 이상 볼일 없어. 앞으로 15일 안에 캘버라로 가야 돼. 위험한 지대를 지나야 하지만, 광안의 아르민이라면 별문제 없겠지?”
“쓸데없이 말 늘릴 필요 없어. 약속은 지킬 테니까.”
케이라는 안심하지 못했다.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런 만큼 방심해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설마 시이나에게 말한 건 아니겠지?”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자에게 품을 수 있는 당연한 의심일 테지만 아르민은 입을 다물었다.
케이라가 쏘아붙였다.
“당신에게 해코지하고 싶지 않아. 물론 어떤 방법으로도 영겁의 성찰자를 붙잡을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 봤자 당신도 인간일 뿐이야. 조직을 배신하는 순간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이 지옥을 경험하게 될 거야. 시이나는 물론 올리페르 학파까지도.”
섬뜩한 협박이었고 또한 사실이었다.
케이라가 속한 조직에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힘과 권력, 잔혹함이 있었다.
아르민은 무슨 일이 닥쳐도 시이나를 지킬 생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시로네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비록 그녀의 곁을 지킬 수는 없지만, 훌륭한 인품을 가진 언로커가 옆에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시로네의 얼굴을 떠올린 아르민이 미소 지었다.
“시이나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달빛 아래 시이나(1)
아르민의 집을 나와 학교로 돌아가는 내내 시로네 일행은 불안한 표정이었다.
집에서는 분위기가 괜찮았으나 언제 시이나의 마음이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살짝 눈치를 살피자, 시이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땅만 보며 걷고 있었다.
의기소침한 모습에 시로네는 마음이 무거웠다.
어린 날의 사고만 아니었어도 아르민과 좋은 사이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렇다고 덜컥 결혼을 한 아르민을 탓하기도 싫었다. 여동생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그가 스스로 시이나를 떠났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네이드가 투덜거렸다.
“쳇, 남녀 사이는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할 수 없지. 세상 모든 일이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니까. 그냥 그렇게 되어 버린 거겠지.”
“솔직히 저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고. 차라리 학교에서처럼 화를 내든가.”
네이드는 빠른 걸음으로 시이나를 따라잡았다.
“선생님.”
“어, 응?”
“저희들 배고파요. 기왕 나왔는데 밥이나 사 주세요.”
시이나의 표정이 황당해졌다.
징계를 받아도 모자랄 일을 벌여 놓고 태연하게 밥을 사 달라니.
“넌 참 속도 좋다. 이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니?”
“뭐 어때요?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요. 돌아가서 징계를 받더라도 일단 배는 채워야죠.”
시로네가 끼어들었다.
“그래요, 선생님. 밥은 먹고 들어가요. 배고파요.”
이루키가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안하자면, 우선 귀족 구역으로 빠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어차피 그곳이 학교하고도 가깝고, 아주 맛있고 비싼 식당을 알고 있거든요.”
시이나는 짜증 낼 의욕조차 없었다.
제자들의 태도가 의뭉스럽기는 했지만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도 이런 기분으로 학교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오늘은 비번이니까.
“좋아, 알았어. 나쁜 짓 하느라 피곤했을 테니 밥은 먹자. 하지만 학교로 돌아가면 각오해야 할 거야.”
“히히! 네!”
고개를 돌린 네이드가 윙크했다.
시이나를 달래 주려는 게 1차 목적이지만, 그런 와중에 선생님의 분노가 가라앉는다면 금상첨화였다.
귀족 구역에 도착한 이루키는 휘황찬란한 조명이 켜진 가게로 시이나를 데려갔다.
6층 높이의 건물 앞에서 시로네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입구부터 남달랐는데, 백상아를 통째로 깎은 기둥이 발코니를 떠받치고, 환상의 신수를 표현한 조각상들이 기도처럼 좌우를 지키고 있었다.
레스토랑, 골드 큐피드.
모든 음식에 프리미엄이 붙는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우와! 여기는 나도 안 와 봤는데. 오늘 완전 호강하겠네. 시로네, 빨리 들어가자.”
“어? 그게…….”
시로네는 시이나를 살폈다.
예상대로 퀭한 눈으로 간판을 쳐다보고 있었다.
가근방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이니 그럴 만도 했지만, 무엇보다 선생님을 등쳐 먹을 생각이 아니고서야 이런 음식점을 고를 리가 없는 것이다.
한숨을 내쉰 시이나가 말했다.
“그래, 여기서 먹자.”
“오오! 역시 우리 선생님! 배포가 남다르셔!”
네이드의 아부에 이루키가 동참했다.
“어리석긴. 이 정도로 선생님의 배포를 평가하면 곤란하지. 공인 6급의 마법사라면 이딴 가게야 집 부엌처럼 드나들 수 있으니까. 안 그런가요, 선생님?”
“됐으니까 빨리 들어가기나 해. 대신에 밥만 먹고 바로 학교로 가는 거다.”
귀족 전용 레스토랑이 처음인 시로네는 밖에서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큰 내부에 놀랐다.
공간 낭비라고 생각될 정도로 테이블이 드문드문했고, 한쪽에는 각양각색의 수정들로 장식된 바가 자리했다.
당연히 손님들은 전부 귀족이었고 장신구만 봐도 크레아스의 유지인 게 분명했다.
“시로네! 이쪽이야!”
넋을 잃고 살피던 시로네는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테이블로 향했다.
네이드와 이루키도 이따금씩 주위를 구경했지만 긴장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직원이 주문을 받았다. 제비 머리를 한 느끼한 인상이었는데, 시이나를 향하는 시선이 자주 포착되자 시로네 일행은 적잖이 불쾌했다.
아무리 눈길이 가는 여성이라도 동행이 있는 곳에서 이런 무례는 저지르지 않는다. 일행이 학생들인 것을 보고 가볍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골드 큐피드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나 이런 아름다운 분이 친히 가게를 찾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네이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쳇, 최고급 음식점이라더니 직원 서비스가 왜 이래? 완전 우리를 애송이 취급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메뉴판을 펼쳤다.
가장 비싼 음식을 시켜서 직원에게 한 방 먹여 줄 심산이었다.
네이드가 코스 요리를 주문하자 이루키도 별다른 생각 없이 다른 코스 요리를 시켰다.
반면 시로네는 고심 중이었다. 하나같이 모르는 메뉴였기 때문이다.
올라리스조림이라는 것이 고기인지 생선인지 몬스터 혓바닥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래도 눈치라면 빠지지 않기에 태연하게 네이드와 같은 것을 주문했다. 아무래도 이루키가 시킨 메뉴는 불안하다는 생각이었다.
VIP 전용의 메뉴가 줄줄이 나오자 비로소 직원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들이 지불할 능력이 되는가였다.
모든 음식에 프리미엄이 붙지만 최저가와 최고가의 메뉴도 3배 이상 차이가 난다.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들이 착각한 것이라면, 예상가의 12배를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직원이 불안한 눈초리로 시이나를 살폈으나, 그녀 또한 자신의 메뉴를 고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저는 다스코 코스로 주세요. 리무네스 한 병하고요.”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그녀는 가끔씩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코냑을 마셨다.
리무네스는 바닐라 향이 풍기는 증류수로, 여성에게 인기가 좋았다.
“어? 선생님, 술 드시게요?”
“왜? 안 될 거 없잖아? 너희들은 남의 집에 자물쇠도 따고 들어가는데, 나는 술도 못 마셔?”
네이드는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하하, 그건 그렇죠. 아, 선생님 오늘 비번이셨죠?”
직원이 말했다.
“그럼……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혀를 내두르며 돌아가는 직원을 보고 시로네 일행은 히죽 웃었다.
하지만 이내 네 사람 모두 코스 요리를 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절로 머릿속에 가격표가 떠올랐으나, 시이나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맞다. 공인 6급 마법사시지.’
공인 6급의 수입은 귀족 사회에서도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어갈 정도였다.
더군다나 왕국 5대 명문 중의 하나인 알페아스 마법학교에 근무하고 있으니 올리페르 학파의 재력에 손대지 않고서도 멋지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엄청 성공하셨구나, 우리 선생님.’
물론 시이나는 돈이 아니라 꿈을 좇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산꾼의 자식인 시로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코스 요리가 네 가지나 되는 바람에 음식이 끊이지 않고 테이블에 올라왔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가끔 황당한 듯 힐끔거렸다.
시로네와 친구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음식을 맛보는 데 혈안이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게 귀족이라지만, 친구 사이에서 품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르자 날아다니던 포크와 나이프도 점잔을 되찾았다. 대신에 마법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학생들의 일상 대화를 직접 듣는 건 처음이었기에, 시이나도 흥미롭게 귀를 기울였다.
웃음이 떠나지 않고 우울했던 분위기도 풀어졌으니, 네이드의 작전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헤헤헤. 선생님, 이 불초 제자가 존경하는 스승님에게 한 잔 올리겠습니다.”
“흥! 그런다고 내가 봐줄 것 같아? 먹는 자리라서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거야. 돌아가면 각오해.”
“네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자, 받으시지요.”
네이드의 붙임성은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시이나도 딱히 싫지는 않은 듯 주는 대로 술을 받았다.
독한 술이었기에 시로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렴요. 공인 6급의 마법사이신데 고작 술 따위에 지실 분이 아니죠.”
네이드의 틈새 공략에 시이나가 웃었다.
“어쭈? 아주 필사적이네. 하지만 정말로 괜찮아. 이래 봬도 나, 술 센 편이거든.”
독한 술이 스트레이트로 넘어갔다.
1시간 후.
“야, 너! 너 말이야, 너! 네이드.”
“넵, 선생님.”
식기가 치워진 테이블에 팔로 기대어 있는 시이나가 빨개진 얼굴로 흐느적거렸다.
반면 시로네 일행은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식은땀을 흘렸다.
1시간 만에 술병은 텅 비고 시이나의 눈은 초점이 살짝 풀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