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42
“가장 유능한 학생을 뽑았을 뿐이야. 어쨌거나 왕립 수석이었으니까.”
짧은 대화에서 로비라는 것 자체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졸업 순위와 스카우트 평가는 별개잖아요. 어쨌든 이번에는 알페아스 마법학교를 맡기로 하셨으니까 시로네 너도 눈도장을 찍어 둬서 나쁠 건 없을 거야.”
“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솔직 담백하게 내심을 드러내자 바이칼도 고까운 표정을 풀었다.
“그래. 특별히 지켜보겠다. 열심히 해라.”
스카우트의 기대치를 올린다는 것은 분명 평가에 도움이 되겠지만 미치지 못했을 경우 실망감도 큰 양날의 검이었다.
“10년 넘게 왕립 마법학교를 맡으셨다고 했는데 어째서 이번에는……?”
시로네의 물음에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올해 토르미아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니까요. 경쟁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고, 학생들의 실력도 전부 졸업반 평균을 상회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평가관님이 직접 협회에 건의를 해서 바꾼 것이랍니다.”
시로네 개인이 아닌, 알페아스 마법학교 졸업반 전체의 영광이었다.
“서류만 보고 결정한 일이다. 하지만 서류의 숫자가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는 않지.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엘리자베스가 권한 자리에 앉은 시로네는 테이블에 있는 프로필 서류를 가리켰다.
“1년간의 성적인가요?”
“아뇨. 입학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기록입니다. 왕국의 미래인데 허투루 판단할 수는 없지요.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혹시 졸업 시험을 관람한 적이 있나요?”
“네. 작년에요.”
“그러면 스카우트가 하는 일도 알겠군요.”
“아, 그건…….”
당시에는 졸업 시험의 치열한 싸움에 몰입되어 있었고 에이미의 조기 탈락으로 충격도 컸을 때였다.
“괜찮아요. 스카우트가 어떻게 평가를 하는지 알아 두는 것이 도움이 될 거예요. 우선 졸업 시험이 시작되면 저 같은 분석관은 참가자의 세부적인 능력치를 눈으로 보게 됩니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푸르게 빛나더니 망막에 화살 과녁처럼 생긴 표식이 드러났다.
“……문신인가요?”
“네. 마법적 문신이죠. 분석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의 능력치를 세부적으로 판단하는 것. 순간 이동의 반복 강박의 거리가 10미터인지, 10미터 1센티미터인지, 10미터 1센티미터 1밀리미터인지 파악하는 거죠.”
“……아, 네.”
그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에 시로네는 멍해졌다.
“그렇게 분석된 수많은 정보는 여기 계신 평가관님에게 곧바로 전달됩니다. 그러면 평가관님이 상황과 재량에 따라 학생들의 능력치에 등급을 매기는 거죠. 판단력 B등급, 신경 전달 속도 A등급, 이런 식으로요. 그러면 여기 있는 라라 씨가 30명 전원의 평가를 기록하게 됩니다.”
라라가 브이 자를 그리자 옆에 쌓여 있던 수십 권의 노트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펄럭거렸다.
이어서 같은 개수의 펜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노트에 무언가를 쓰는 시늉을 했다.
서른 권의 노트에 동시에 기록할 수 있는 집필 능력자.
시로네가 감탄하며 쳐다보자 라라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실력만 뛰어나다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바이칼이 처음으로 조언을 건넸다.
“국가가 요구하는 인력은 주어진 임무를 100퍼센트 수행할 수 있는 마법사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위력에 목을 매지만 왕국의 입장에서는 1명으로 부족하면 10명을 보내면 되는 일이다. 돈은 좀 들겠지만 대체 가능한 수치라는 거야. 우리가 원하는 건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재능이다.”
바이칼은 플루를 가리켰다.
“졸업 시험에서 플루의 최종 평가는 종합 A였다. 물론 범위를 타국까지 확장하면 A플러스도, S등급도 있었지. 하지만 왕국에 국한했을 때 플루는 토르미아 최고의 학생이었던 게 맞다.”
“그거 칭찬 맞죠?”
플루가 따졌으나 바이칼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플루를 높게 쳤던 이유 중의 하나는 낭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 정신, 심리, 행동 등 모든 부분에서 최적의 효율을 내는 쪽으로 의식을 움직였어. 이건 엄청난 마법을 시전하거나, 누군가를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돈이나 인원수로 대체할 수 있는 요인이 아니기 때문이야.”
“그렇군요.”
개인의 성취와 왕국에서 요구하는 부분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했다.
‘나 또한 수많은 마법사 중의 1명일 뿐이니까.’
바이칼이 말을 이었다.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싶다면 낭비를 줄여라. 네가 스카우트보다 똑똑하다고 해도 스카우트는 너를 평가할 수 있다. 판단에 따른 결과를 측정하기 때문이지.”
시로네는 플루가 바이칼을 소개시킨 이유를 깨달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라라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시간도 됐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죠. 어쨌든 먹자고 하는 일이잖아요?”
엘리자베스가 시로네에게 권했다.
“시로네 군도 점심은 안 먹었죠? 우리와 같이 먹어요.”
“아뇨. 저는 친구들이랑 같이 먹을게요. 저만 따로 밥을 먹는 건 특혜 같아서요.”
라라가 멍한 표정을 짓더니 폭소를 터뜨렸다.
“왜, 왜 그러세요?”
시로네의 얼굴이 빨개지자 입을 가리고 웃던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역시 숫자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네요. 서류로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 달라요.”
“저기…… 무슨 말인지.”
“순수하다는 얘기예요. 마법사가 되면 진짜 특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자, 가죠.”
스카우트를 따라 회의실을 나선 시로네는 직원 전용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예전에도 자주 이용했던 곳이기에 긴장은 금세 풀렸고, 엘리자베스에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 식당 문이 벌컥 열리면서 정복을 입은 사내가 나타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장 시로네에게 다가왔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지레 겁을 먹은 시로네가 식기를 내려 두고 말했다.
“아, 죄송해요. 지금 돌아갈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남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기 말고, 18층으로 가.”
“네? 18층요?”
남자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
“협회장님이 보자고 하신다.”
가장 뜨거운 곳 (2)
***
마법협회 18층으로 올라간 시로네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복도를 걸었다.
달라진 건 딱히 없었지만 협회의 주인이 바뀌어서인지 조금 더 엄숙한 분위기였다.
협회장실에 도착해 노크를 했으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차마 먼저 문을 열 수 없어 기다리는데 직원이 다가와 말했다.
“들어가 있어. 협회장님은 지금 회의 중이시다. 끝나면 바로 오실 거야.”
“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루피스트의 방이 보였다.
강철의 대마법사라는 별칭답게 기재는 물론 장식품까지 철로 되어 있었다.
마법에서 전능이라는 요소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의자에 앉은 시로네는 초조하게 손바닥을 비비며 기다렸다.
그로부터 2시간 뒤에야 문이 열리고 루피스트와 비서실장 제인이 들어왔다.
가올드와 강난이 눈에 겹치는 건 당연했고, 그들보다 훨씬 차갑다는 게 첫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아리안 시로네입니다.”
루피스트가 시로네를 무심하게 지나치며 말했다.
“나가 있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몰라서 가만히 서 있는데 제인이 문을 닫고 나갔다.
“앉아라. 구면이지?”
광장에서 루피스트의 시선을 깨닫고 있었던 시로네였다.
“네.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럴 필요 없어. 네가 가올드의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함께 천국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나 가올드와 동맹자적인 감정 교환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뇨, 편까지는…….”
“그래, 가올드에게 편은 없지. 뭐든지 혼자서 하려고 드니까. 하지만 나보다는 가올드에게 감정적으로 더 가까운 것은 사실일 테지.”
이미 모든 걸 파악하고 있다면 굳이 시로네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 졸업 시험, 자신 있나?”
“최선을 다할 겁니다. 반드시 마법사가 될 것이고요.”
암기한 것 같은 답변이었으나 루피스트의 앞에서는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의 적이라고 생각하는군.”
“그럼 아닌가요?”
이미 가올드와 한판 붙었던 적도 있는 만큼 협회장의 앞이라도 기죽지 않았고, 루피스트도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너는 가올드의 편이고, 나는 세계 각국과 파워 게임을 해야 하는 협회장이니까. 협회가 너를 품는 순간 토르미아는 강대국의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협회장의 입에서 듣자 속이 타들어 갔다.
“이용당하지 않을 겁니다. 제 미래는 제가 결정할 거예요.”
“물론 그래야겠지. 하지만 어떤 선택도 자유로운 건 없다. 빨간색과 파란색 중에 하나를 선택해 놓고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거지. 그 빨간색과 파란색을 제시한 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그게 시스템이다.”
부분은 전체를 능가할 수 없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부르신 것 아닌가요?”
불쾌한 진실 앞에서 시로네의 언성이 높아졌다.
“거래를 하자. 너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마. 또한 안전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제가 해야 될 일은 뭐죠?”
“졸업 시험에서 조기에 탈락해라.”
“네?”
“물론 너도 나름대로 해법을 찾아 궁리하고 있겠지. 하지만 내 제안만큼 쉬운 건 없을 거다. 탈락해. 그것도 형편없이. 네가 사실은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거다. 물론 쇼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차피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법이야. 그것만으로도 일단 위험 요소는 상당히 제거될 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후의 일은 내가 전부 보장하마. 마법사 자격증은 물론 국왕께 고하여 공인도 취득시켜 주겠다. 그런 다음 협회에 들어와 왕국을 위해 일하면 되는 거야. 나는 플루도, 이자벨도 복권시켰다. 너의 처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졸업 시험에서 탈락하면, 오히려 모든 걸 얻게 된다.
“잘 선택해.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걸로 끝이다. 시험이고 뭐고, 집에 돌아가서 한숨 푹 자고 짐 싸서 올라오면 되는 거야. 단언하건대, 졸업 시험에서 네가 얼마나 활약하든 이만큼의 대접은 받지 못할 거다.”
루피스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시로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너는 분명 세계의 비극을 초래할 수 있는 시한폭탄이야. 하지만 어차피 터질 거라면 곁에 두고 관리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 그리고 나에게는 관리할 능력이 있다. 단, 네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말이지.”
졸업 시험을 형편없이 탈락하는 것이었다.
“거절하겠습니다.”
루피스트는 놀라지 않았다.
“이유는?”
“어떤 선택도 자유로운 건 없다고 하셨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또 하나의 선택이 아닐까요?”
“그건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와 싸우겠습니다.”
루피스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반쯤 눈을 감았다.
“……승산이 있다고 보냐?”
“승산은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행하는 것, 그게 마법사 아닌가요?”
시로네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생각이 바뀌면 주저하지 말고 탈락해라. 아직 졸업 시험은 시작도 하지 않았으니까.”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흐트러진 자세를 보이지 않고 시로네는 문을 나섰다.
“휴우.”
복도에 서서 한숨을 내쉬자 비로소 현실감이 들었다.
‘잘한 일일까?’
만약 졸업 시험을 엉망으로 본다면 기분은 더욱 비참해지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후회는 없을 터였다.
“얘기는 끝났니?”
비서실장 제인이 다가왔다.
“네.”
“그럼 1층에 있는 별관으로 가라. 5시 반부터 디너파티가 열릴 테니까.”
그녀는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가 보겠습니다.”
시로네가 모퉁이를 도는 것까지 확인한 제인은 협회장실로 들어갔다.
표정만 봐도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 될 거라고 했잖아요.”
루피스트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단일로서 전체를 능가한다. 가능한 일일까?”
제인은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울티마니까요.”
“하지만 가이아는 실패했다.”
루피스트가 몸을 일으키자 제인의 고개가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하실 거죠? 타국에 뺏기기에는 아까운 인재예요.”
“급할 것 없어. 소화시키기 어려운 음식이야. 일단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문으로 다가간 루피스트가 제인을 돌아보았다.
“지금쯤이면 시작했겠군. 영상 기록기는?”
“사각지대 없이 설치해 두었어요. 큰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생각이 있다면요.”
“어디로 가면 볼 수 있지?”
“중앙통제실에 가서 말해 보세요. 그런데 학생들 노는 걸 봐서 뭐하려고요?”
루피스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고생해서 왔는데 그냥 보내면 섭섭하잖아.”
***
명칭은 별관이지만 협회 건물이 워낙 넓은 탓에 150명의 학생들이 모두 들어가고도 중앙이 허전할 정도였다.
수백 개의 샹들리에가 내리쬐는 빛 아래에서 세계 각국의 진미들이 반지르르 빛났다.
누군가는 먹었고 누군가는 즐겼으나, 왕국 명문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타 학교의 학생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느라 정신을 쏟고 있었다.
감정의 화살표들이 복잡하게 얽힌 와중에 가장 많은 화살표를 받는 건 역시나 알페아스 마법학교였다.
“올해는 바이칼 씨가 크레아스로 간다는데 사실이야?”
“나도 그렇게 들었어. 10년 넘게 왕립 마법학교만 전담하신 분인데.”
소문은 빠르게 퍼져, 몰랐던 학생들도 알페아스 마법학교의 졸업반을 흘끗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는 건 다름 아닌 포니였다.
“아가씨, 연회복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부디 제 청을 들어주십시오. 귀족들하고 똑같은 의복으로 파티라니요.”
‘귀찮아.’
왕성에서 파견 나온 수행원들이 포니를 둘러싸는 바람에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만 돌아가세요. 저는 왕족이 아니라 마법학교를 대표하는 자격으로 참석한 것입니다. 특권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