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43
“아가씨, 왕가의 혈통은 부정한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 봤자 권력 승계하고는 거리가 먼 약한 핏줄일 뿐이다.
“어째서 고귀한 몸에 흙을 묻히시나이까.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협회장을 불러서 최고급 마법사 자격증을 달라고 하겠습니다.”
포니가 한심하다는 듯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마법사 자격증은 다 똑같아요.”
“그렇다면 따로 만들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왕족의 품격에 맞는 최고급 자격증입니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수행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욱 짜증이 났다.
현실 이상의 현실에서 사는 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신마저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
‘혈통 따위에 의지하지 않아. 나는 내 힘으로 최고가 되겠어.’
알프레드 포니(졸업반 최종 순위 11위).
전공 : 수력 마법의 급류 계열.
특이 사항 : 왕가의 혈통.
“하아, 짜증 나.”
두통을 느낀 포니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수행원들이 우르르 뒤를 쫓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불쌍하네.”
술잔을 들고 지켜보던 마야가 중얼거렸다.
“정해진 운명만큼 불행한 건 없으니까.”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케이든이 서 있었다.
여태까지 학교에 다니면서 그가 말을 건 적은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좋은 밤이야, 마야. 건배할까?”
마야는 케이든이 내민 술잔의 액체가 부르르 떨리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손이 떨리는 것 같은데.”
“그래? 나는 모르겠는데.”
말은 그렇게 했으나 머리로 의식하기 시작하자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이상하다. 떨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왜 내가 손을 떨겠어?”
술잔을 잡고 흔드는 듯한 케이든의 진폭에 마야가 잔을 가리켰다.
“술이 넘쳐서 쏟아지고 있잖아.”
“이상하군. 난 모르겠는데.”
“…….”
케이든이 술잔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을 바라보던 마야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그래. 그럼 좋은 시간 보내.”
그리고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이상한 성격이네. 날 놀리는 건가? 앞으로 마주치지 말아야겠다.’
떨림이 멈춘 케이든이 술잔을 내려놓고 슬픈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적십자성은 안되는 건가?”
“적십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에이미가 케이든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아야! 뭐야, 갑자기?”
“이제 보니 너, 완전 순둥이였잖아. 그런 식으로 대하면 어떤 여자가 너를 미친놈으로 안 보겠냐?”
아픈 옆구리를 비비며 케이든이 투덜거렸다.
“왜 남의 일에 간섭이야? 어차피 안된다는 거 알고 있잖아.”
“그건 네가 정상이라는 전제하에 시작하자. 뭐 해, 빨리 가. 마야에게 장난이었다고 사과하라고.”
케이든의 시선이 인파 속에 홀로 있는 마야를 찾아냈다.
“정말로…… 될까?”
“무슨 청혼하니? 그리고 술은 가져가지 마. 한 잔도 못 마시면서 멋 부리기는…….”
“좋아, 해 볼게.”
심호흡을 크게 하고 케이든은 다시 마야에게 다가갔다.
“저기…….”
겁에 질린 마야의 눈동자를 보고 나서야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미안해. 아까는 장난이었어. 그냥 말 좀 걸어 보려고.”
마야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아하, 어쩐지! 난 네가 이상한 성격인 줄 알았어. 그래도 재밌었어.”
상상했던 공포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자 케이든은 자신감을 찾았다.
“시험 준비는 잘 끝났어?”
“응. 뭔가 느낌이 좋아. 전반기에 이루키에게 들은 조언이 도움이 많이 됐어.”
마법적 재능은 떨어지지만 예술적 감각에 있어서는 적십자성의 케이든조차 엄두를 못 낼 정도의 천재였다.
“이번에는 내 방식대로 해 보려고.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겠지만, 지금은 졸업하는 게 목표니까.”
신비 부족의 미래가 마야의 손에 달려 있었다.
신비 마야(졸업반 최종 순위 28위).
전공 : 음향 마법의 가곡 계열.
특이 사항 : 노래에 있어 천부적인 전능의 소유자.
“그래. 반드시 합격할 거야.”
“응?”
단정 짓는 말에 마야가 되물었으나 케이든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
가장 뜨거운 곳 (3)
“보기 좋은 광경이군.”
피쇼와 함께 파티 테이블에 앉아 있던 피오르드가 말했다.
학교에서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시종 사악한 유희를 즐기는 음침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오늘만큼은 말끔한 차림새였다.
아마도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의 전공이 독성 중에서도 맹독 계열이라는 것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케이든은 이번에 졸업할 거야.”
스크럼블 로열에 참전하면서 케이든이 여성 인체 연구회의 회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피쇼였다.
하지만 이제 금화륜은 해체되었고, 케이든도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저지의 대가가 아니었다면 최종 순위 10위에는 충분히 들어갈 실력자였으나 피오르드 또한 여태까지 상위권을 놓쳐 본 적이 없는 실력자였다.
“상관없어, 케이든 따위.”
날카로운 엄지손톱으로 손목을 그은 피오르드가 술잔에 혈액을 떨어뜨렸다.
“……무슨 독이지?”
“케드라푸사.”
적도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에서만 자라는 식물로, 원액 한 방울이면 코끼리도 1분 안에 사망한다는 독극물의 주재료였다.
술잔을 빙빙 돌린 다음 한 모금을 맛보자 혀가 뒤틀릴 정도로 짜릿했다.
“크크, 바로 이 맛이야.”
“네 몸에는 독이 흐르는군.”
“인간의 간은 거대한 화학 창고지. 적응만 하면 독이라도 약이 되는 법이야.”
하지만 대부분 적응하지 못하기에 독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좋은 거 많이 먹어 두라고. 졸업 시험 때는 전부 간이 녹아 버릴 테니까.”
로스카스 피오르드(졸업반 최종 순위 9위).
전공 : 독성 마법의 맹독 계열.
특이 사항 : 피아를 구분하지 않는 대량 학살 마법.
“저기…….”
베르민 마법학교의 여학생이 다가왔다.
머리를 올려서 눈 밑의 다크서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입술은 보랏빛이었다.
“피오르드지?”
독성 마법의 바닥은 좁기에, 피오르드도 그녀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부패의 마녀 윈디아.”
그녀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혹시…… 조금 전에 술에 탄 거 케드라푸사야?”
“그런데?”
윈디아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케드라푸사를 해독시켰다고?”
“뭐…… 태어날 때부터 먹었으니까.”
로스카스는 왕국 승인하에 전쟁 화학무기를 개발하는 가문이었다.
눈을 깜박거리던 윈디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번 마셔 봐도 돼?”
“얼마든지.”
피오르드가 권하자 그녀는 살며시 잔을 들고 혀를 가져다 댔다.
“흐읍!”
혀가 닿는 순간 녹아 버릴 듯한 자극이 뇌를 강타했다.
그녀 또한 수많은 독극물로 간을 단련시켜 왔으나 이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와, 진짜 끝내준다.”
죽음의 끝자락에서 기어 나온 그녀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내 생애 이렇게 맛있는 독은 처음이야.”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피오르드의 손목에 난 상처를 바라보며 입맛을 쩝쩝 다신 윈디아가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내 것도 먹어 볼래? 타로파스칼이야.”
으득 소리를 내며 머리카락이 중간 부분부터 끊어져 나왔다.
“타로파스칼?”
피부가 썩어 버리는 독이었다.
머리카락을 비벼서 가지런히 정렬한 피오르드가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흐음, 이건…….”
“어때?”
“잘 만들었네. 약간 심심하기는 하지만.”
피오르드에게 케드라푸사가 자극적인 음식이라면 타로파스칼은 나물 반찬 정도였다.
“역시 그렇지? 여기에 뭔가 합성시키고 싶은데.”
“푸스탄 버섯의 액즙을 넣어 봐. 그러면 부패 시간도 줄어들 수 있고…….”
두 사람의 독극물 토론이 이어지자 피쇼가 숨을 길게 내쉬며 자리를 떴다.
마땅하게 쉴 곳이 없어 헤매는 그때, 뒤편에서 왕립 마법학교의 학생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사형, 오랜만입니다.”
곤충 마법의 권위자인 프란시스 케일러의 밑에서 함께 수학한 사제였다.
“그래. 졸업 시험은 잘 준비했나?”
“저에게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스승님께서는 결과보다 배움의 성취를 강조하시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큰 결심을 하신 것 같습니다.”
피쇼가 살짝 고개를 틀었다.
“무슨 말이야?”
“그만 졸업하고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너무 오래 계셨어요.”
사제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사용을 허가하셨습니다.”
투명한 호리병에 검붉은 색깔을 내는 기생충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럼. 내년에 수도에서 뵙겠습니다.”
사제가 멀어지고 피쇼는 호리병을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넣었다.
‘……졸업해야겠군.’
마라노프 피쇼(졸업반 최종 순위 24위).
전공 : 인섹트 마법의 진화 촉진 계열.
특이 사항 : 케일러의 수제자.
날이 어두워지고 파티가 무르익어 가자 여태까지 신경전을 펼치던 학생들 사이에서 하나둘씩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알페아스 마법학교 학생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고, 왕립 마법학교 학생들이 먹잇감을 물색하던 중 수아비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어이, 너. 학교에서 몇 위냐?”
원체 사교성이 떨어지는 수아비는 대뜸 시비를 거는 학생들을 보고 주춤 물러섰다.
“무슨 상관이야? 비켜. 너희하고 말하기 싫어.”
우회해서 빠져나가려는 수아비의 앞을 신장 2미터가 넘는 거구의 학생이 막아섰다.
“우리가 뭘 어쨌다고 말하기 싫어?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
“18위야. 됐지?”
그렇게 내뱉고 지나치려 했으나 몸집이 워낙에 커서 검은 벽이 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하하! 고작 유틸리티 마법이나 하는 주제에 중간 순위라고? 내가 뭐랬어, 스피릿 잡지에서 날조한 거라고 했잖아.”
왕립 마법학교의 학생들은 스카우트 바이칼을 알페아스 마법학교에 빼앗긴 이유가 올리비아 교감에게 있다고 보았다.
교사회의 감사에, 한때는 왕립 마법학교 교장까지 지낸 인물이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터였다.
“어이, 똑바로 들어 둬라. 너희가 아무리 날고뛰어도 왕립 마법학교 발끝에도 못 따라와.”
갑자기 수아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정신 통일이 완벽해도 모자랄 판국에 타 학교 학생에게 기세에서 눌리게 되면 시험에도 영향이 미칠 터였다.
“오오! 방금 나 째려본 거 봤어? 이거 무서운데?”
“야, 너희. 적당히 해라.”
수아비를 가두고 있던 학생들이 뒤를 돌아보자 스크리머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넌 뭐야?”
“굳이 말할 필요 있나? 얘기를 들어 보니 아주 스피릿 잡지를 달달 외우고 있는 것 같던데.”
왕립 마법학교의 서열 3위인 하이드 알렌이 걸어왔다.
“아랫물에서 노는 애들은 뭐 하나 심심풀이로 보기는 했지. 하지만 네 얼굴은 기억도 안 나는걸.”
“수아비, 이쪽으로 와.”
스크리머가 무시하고 손짓을 했으나 거구의 학생은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자신 있으면 와서 데려가 보는 게 어때?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면 험한 짓은 하지 않지.”
왕립 마법학교 졸업반이 폭소를 터뜨렸다.
“하아, 진짜…….”
스크리머의 성격이라면 진즉 뒤집어엎어야 마땅하지만 시기가 시기인지라 분을 참고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