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5
잔뜩 긴장한 시로네와 친구들이 눈만 움직여 시선을 주고받았다.
‘어떡하지, 선생님 취하셨는데?’
“……음, 그래…….”
작은 목소리로 무슨 말을 웅얼거리던 시이나의 고개가 갑자기 푹 떨어졌다.
의자에서 넘어지려는 그녀를 네이드가 황급히 붙잡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이제 돌아가야죠.”
“이 말썽꾸러기!”
고개를 번쩍 쳐든 시이나가 네이드의 볼을 꼬집더니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으나 네이드는 차마 그녀의 손을 떼어 내지 못했다.
“아야야야! 아파요!”
“말 좀 잘 들으란 말이야! 나도 에텔라 선생님처럼 착한 선생님 되고 싶거든? 그러니 제발 이상한 데 정신 팔지 말고 공부 좀 열심히 하라고!”
“네네! 알았어요, 선생님! 진짜 아파요!”
“그리고 시로네, 이루키.”
“넵.”
시로네와 이루키가 곧은 허리를 더욱 펴고 바짝 각이 잡힌 자세를 취했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재능만 믿고 설렁설렁 하려고 들면 용서 안 해. 나쁜 선생님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내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선생님 나쁘다고 생각 안 해요.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 보세요.”
“후우우. 그래, 나도 알아. 내가 왜 사서 이런 고생을 하는 거지. 으음.”
시이나의 눈꺼풀이 반쯤 감기더니 팔을 베개 삼아 그대로 얼굴을 파묻었다.
네이드가 당황하며 말했다.
“선생님, 정신 차리셔야죠? 선생님? 우리 아직 계산도 안 했는데요!”
“잠 와. 잘 거야.”
새근새근하는 숨소리에 네이드는 얼빠진 얼굴로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대책이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떻게 이 난관을 타개할 것인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그때, 건너편 테이블에서 지켜보던 2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이런. 숙녀분께서 많이 취하신 모양이군요. 제가 도와 드리죠. 마차를 대기시킬까요?”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었고, 뒤편에는 호남형의 남자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시로네 일행의 눈빛이 동시에 싸늘해졌다.
주변 경계가 습관이 된 그들이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은, 가게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들이 시이나 쪽을 가리키며 매너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로 올 줄은 몰랐지만.
‘이 자식들이…….’
오늘만큼은 사고를 치기 싫었기에 네이드는 화를 삭이며 시이나를 흔들었다.
“선생님? 선생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응?”
시이나가 벌떡 몸을 세웠다. 그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풀린 눈빛으로 되돌아갔다.
“벌써? 더 마실 수 있는데.”
달빛 아래 시이나(2)
남자가 급히 끼어들었다.
“아, 교육자셨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코사인 실버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크레아스의 사무관으로 계시지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에게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시로네 일행은 황당했다.
‘최악의 자기소개네. 저런 말에 누가 넘어가?’
하기야 백인백색이라고, 귀족들의 사교계에서는 당연한 절차일지도 모른다.
시이나는 별다른 대꾸가 없었다. 그저 두 손으로 이마를 지탱하고 한숨을 쉴 뿐이었다.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시이나의 마음은 지옥 불이 붙은 듯 타들어 가고 있었다.
케이라의 시선을 떠올리자 가슴이 철렁했다.
‘날 혐오하고 있겠지. 가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처음부터 연락하지 말았어야 했어.’
물론 어릴 때의 기억이다. 아르민이 케이라와 함께 나타났을 때도 딱히 배신감은 없었다.
하지만 일말의 기대감은 있었던 모양이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느낌.
가슴이 뛰고, 시간을 되돌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끝없이 밀려드는 그런 감정.
‘하지만…… 이런 게 사랑일까? 그날의 사건 이후로 누군가를 원했던 적은 없는데.’
실버가 말을 이었다.
“이런, 제 소개를 너무 거창하게 했군요. 죄송합니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은 여성분을 만나는 바람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나 봅니다. 결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괜찮아요. 피곤하니 그만 가 주세요.”
시이나는 정말로 피곤했다.
물론 공인 6급 마법사의 정신이라면 술을 강제로 깨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아직까지는 알코올이 주는 비현실적인 몽롱함이 필요했다.
다 잊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더 많은 술로 기억을 씻어 내고 싶었다.
“으음.”
취기에 마음을 맡긴 시이나가 휘청거리자 실버가 그녀를 황급히 부축했다.
“여성을 혼자 두고 가는 건 기사도가 아니지요. 제가 마차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네이드가 노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선생님에게 함부로 손대지 말아요.”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나는 모셔다 드리려는 거야. 너희들은 그만 돌아가라. 마차를 부를 테니까.”
네이드의 만류에도 실버가 시이나를 일으키려고 하자 시로네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마음이 급한 상황에서 어린 학생에게 제지당하자 실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장 빠르게 처리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어른의 손목을 잡는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배웠지? 좋게 말할 때 이 손 놔.”
시로네는 물러서지 않았다.
“괜찮다고 하시잖아요. 그만 가 주세요. 선생님은 저희가 모셔다 드릴 테니까요.”
“사람을 우스운 놈으로 만드는군. 아까 보니 술을 먹인 것도 너희들이던데. 학교가 어디야? 전부 퇴학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어?”
이루키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나 정신 차리시지. 아버지가 사무관이면 더욱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식으로 나오면 누가 더 피해를 입을까?”
실버의 눈이 부릅떠졌다.
“당신? 너, 지금 나한테 당신이라고 했냐?”
“그럼 당신을 당신이라고 하지 뭐라고 불러? 아, 사무관 아들내미라는 정식 호칭이 있었지.”
“이런 싸가지없는 자식이!”
실버는 알큰한 취기를 분노로 바꾸어 이루키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옆구리에 찌릿한 충격이 퍼지면서 손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헉 하고 숨을 토한 그가 옆구리를 움켜쥐고 뒤로 물러섰다.
“뭐, 뭐야?”
네이드가 손에 전기를 띄우고 있었다.
“적당히 해라. 우리도 학교 바깥이라 참고 있는 중이니까. 꼬우면 사람 없는 곳으로 가든가.”
실버의 동료가 말했다.
“어이. 저 녀석들…… 마법학교 학생들이야.”
“마법학교? 알페아스 마법학교?”
실버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마법학교는 일반 귀족 학교와 위상 자체가 달랐고, 더군다나 알페아스 마법학교라면 최고의 귀족만 모이는 5대 명문이다.
‘제길, 하필 알페아스 마법 학교라니. 저긴 전국구라 아버지도 손을 쓸 수 없는데…….’
실버가 눈을 굴리는 모습에서 생각을 읽은 이루키가 코웃음을 치며 다가갔다.
“우리를 퇴학시키겠다고?”
“아니, 그게…….”
“나는 메르코다인 이루키다. 뭘 하든 상관없지만, 볼일이 있으면 학교로 찾아와.”
“메, 메르코다인…….”
실버는 마신 술이 전부 깼다.
크레아스가 지방이든 수도든 상관없다. 토르미아 왕국의 귀족 중에서 메르코다인이라는 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귀족 서열 제1계급이자, 국왕 자문기관인 ‘용뢰’의 수장을 수백 년 동안 빼앗긴 적이 없는, 왕국 최고의 지성이자 식자 가문이 그들이었다.
실버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이루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딜 가나 소위 ‘가문팔이’ 귀족들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혐오하는 방식으로 실버를 위협한 이유는, 시이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수작을 부릴 강단도 없는 놈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혹시라도 교사라는 약점을 이용해 해코지를 할 수도 있기에 싹수를 잘라 버린 것이다.
물론 올리페르 학파인 그녀가 일개 귀족에게 당할 리는 없겠지만.
호남형의 남자가 실버의 소매를 툭툭 잡아당겼다.
“가자고, 실버. 어이, 실버.”
외마디 악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결국 실버는 입을 다문 채 가게를 나섰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네이드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분위기 다 깨졌네. 역시 간판만 보고는 모른다니까. 우리 다시는 오지 말자.”
시로네가 말했다.
“그래. 아무튼 그만 나가자. 날도 어두워졌어. 선생님, 괜찮으세요? 이제 돌아가요.”
“음.”
여전히 술이 깨지 않은 시이나는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녀도 분위기가 깨져 짜증이 났으나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든든하게 곁을 지켜 주는 제자들을 보니 교사가 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쾌히 밥값을 계산한 시이나는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채로 문을 나섰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아.”
시이나는 탄성처럼 숨을 내뱉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술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오늘 새로운 도약을 한 게 아닐까? 아르민이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 때문이겠지만.
“아아, 기분 좋다. 오늘 너무 좋다.”
달빛에 홀린 듯 시이나는 하늘을 쳐다보며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가게에서 나온 시로네 일행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달빛 아래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웠고, 트렌치코트가 우산처럼 펼쳐져서 도는 모습 또한 멋졌다.
밤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보고 혀를 차지 않은 이유는 오직 그 때문이리라.
시로네 일행은 흥미진진하게 쳐다보았다.
“술에 취하면 춤을 추시네. 선생님이 저런 성격이셨구나. 진짜로 의외인데?”
“혹시…… 이거 특종 아냐?”
네이드의 말에 이루키가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이걸로 거래할 수 있다는 거지? 시이나 선생님의 주사를 입 다무는 조건으로 말이야.”
음지의 연구회와 다년간 충돌해 온 시이나였으니 코웃음 치며 넘기지는 못할 터였다.
“도의적으로 좀 그렇긴 하지만……. 뭐, 저 정도는 큰 비밀도 아니잖아. 우리도 살아야 하고.”
그들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겨 있던 시로네가 정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얘들아, 저기!”
같은 자리를 맴돌던 시이나의 발걸음이 꼬이더니 구심력이 흔들리고 있었다.
조만간 쓰러질 듯한 모습에 일행이 튀어 나갔다.
“잡아!”
시로네가 등을 떠받치고, 네이드와 이루키가 양쪽에서 팔을 붙잡았다.
“선생님, 정신 차리세요. 선생님이 멀쩡하셔야 저희들이 학교에 들어가죠.”
“으음, 어지러워.”
1시간 만에 코냑 한 병을 비우고 수십 바퀴를 돌았으니 세상이 흔들릴 만도 했다.
“야, 안 되겠다. 시로네, 네가 좀 업어 봐.”
“뭐? 왜 나야?”
“그래도 우리들 중에서 네가 제일 힘이 세잖아.”
“하아.”
시로네는 부정하지 못했다.
남자 3명이 모였지만 마법 수련에 전념하느라 다들 못 자고 못 먹어 체력은 평범한 또래보다 떨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시로네는 어릴 때부터 산을 타고 나무도 했기에 친구들보다 완력이 나은 편이었다.
“할 수 없지. 그럼 선생님 좀 내 등에 업혀 줘.”
“너무 싫은 티 내지 마. 선생님을 업을 수 있는 기회가 흔할 거 같아? 난 오히려 부러운데.”
네이드는 부러운 감정과는 거리가 먼 가느다란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쳇, 말이나 못하면.”
시이나를 등에 업고 귀족 구역을 벗어나자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근데 시이나 선생님 의외로 작다. 막상 업어 보니까 되게 아담하네. 평소에는 내 키랑 비슷한 줄 알았는데.”
“심리적인 요인이지. 원래 선생님들은 실제보다 더 커 보이잖아.”
“그런가? 근데 의외로 또 무거워. 점점 힘들어진다고.”
이루키가 킥킥 웃었다.
“아무렴 사람인데 안 무겁겠어? 여자도 다 뼈와 근육, 살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마 깃털처럼 가벼울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없지만 막연하게나마 가벼우리라는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여자를 업기는커녕 손도 잡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킬 수는 없었다.
“흥,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근데 나 진짜 힘들어. 이대로 학교까지는 못 가.”
“마법을 사용하면 어떨까? 에어 마법으로.”
“아무리 그래도 선생님인데 그건 좀…….”
결국 꼼짝 없이 가마 노릇을 하게 된 시로네는 새삼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했다.
“뭐가 이래? 남자가 3명인데 여자 1명 못 들고. 차라리 검술을 배울 걸 그랬어. 내 친구라면 시이나 선생님을 업은 나를 업고 갈 수도 있을 텐데.”
친구란 다름 아닌 리안이었다.
그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네이드와 이루키도 본인들의 저질 체력에 새삼 자괴감에 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이나는 정말이지 생각보다 무거웠고, 책밖에 모르는 그들에게 완력은 요만큼도 없었다.
“어쩌겠냐, 운동이라고는 숨쉬기밖에 안 하는데. 머리 쓰는 일이라면 자신 있는데 말이야.”
이루키가 손가락을 튀겼다.
“그럼 머리를 쓰면 되잖아. 검사에게는 스키마가 있지. 지금 당장 익히는 거야. 시로네, 어때?”
“그게 말이 되냐? 갑자기 스키마를 어떻게 해?”
“그래도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나 같은 경우 스피릿 존도 한 번에 했거든. 너희들은 아니야?”
네이드가 말했다.
“나도 한 번에 성공하기는 했어. 대충 감 잡고 시작하니까 바로 되던데. 시로네 너는?”
낑낑대던 시로네가 고개를 들었다.
“응? 아, 나도 한 번에 하긴 했어. 사실 당시에는 그게 스피릿 존인지도 몰랐지만.”
네이드가 황당하게 물었다.
“스피릿 존인지도 모르고 스피릿 존에 들어갔다고?”
이루키가 킥킥 웃었다.
“확실히 너답네. 아무튼 불가능한 건 없잖아. 어차피 기본 원리는 똑같지 않아? 스키마.”
듣고 보니 이루키의 말이 그럴듯했다. 해 보지도 않고 지레짐작하는 건 늘 손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