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69
“여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도 그만해. 우리도 잘한 거 없어. 그래, 네이드. 마법사가 아니면 앞으로 뭘 할 거냐?”
한마디도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럼에도 입이 열리는 게 가족이었다.
“당장 그만두는 건 아니고, 비공인이라도 일단 자격은 되니까 일을 좀 할 거야. 그런 다음 돈을 모아서 연금술 상회를 열고 싶어. 웨스트가 아닌 내 이름으로.”
가문에 대한 부정과 불신으로 가득 찬 말이었으나 볼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안주머니에서 문서를 꺼냈다.
“받아라. 언젠가 너에게 주려고 남겨 둔 땅이다. 팔아서 가게를 여는 데 보태.”
네이드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으나 그보다 더 놀란 건 테리아였다.
“여보! 어떻게 나에게 상의도 없이……! 아니, 그 전에, 이런 돈이 어디서 난 거예요?”
“당신의 돈이 아니야. 내 돈도 아니고. 할아버지가 너에게 남기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받아.”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사는데!”
볼룸이 네이드의 손을 끌어다가 문서를 쥐여 주었다.
“사람에게는 기회라는 게 있지. 어쩌면 이게 부모 노릇을 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겠구나.”
할아버지의 서명이 적힌 봉투를 바라보던 네이드는 감정 없이 테리아에게 그것을 건넸다.
“받아요. 난 필요 없어요.”
예상 밖의 말에 테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앞으로는 혼자서 해 보고 싶어요. 그러니 어머니가 써요. 나에게 들어간 돈은…… 언젠가 갚을게요.”
급한 불을 꺼야 하는 테리아는 받을 수밖에 없었으나 자존심은 산산조각 박살 났다.
“연을 끊겠다는 거니? 다시는 안 보겠다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안정되면 찾아뵐게요. 살펴 가세요.”
네이드가 몸을 돌리는 순간 테리아가 작게 말했다.
“……가려고 했어.”
네이드의 걸음이 멈췄다.
“나도, 돌아가려고 했어.”
“알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네이드는 어머니 앞에서 웃는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제는 무섭지 않으니까.”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세상을 증오하지도 않을 것이다.
필사적으로 헤엄쳐서 육지에 도착하게 되면, 어쩌면 그때는 진심으로 웃을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게 네이드가 부모를 떠나보내는 동안 시로네는 리안과 오랜만의 재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고마워, 리안. 얘기는 들었어.”
리안의 무용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여전히 아포칼립스의 지옥을 헤매고 있을 터였다.
“하하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풍기는 기운만으로도 예전에 알던 리안이 아니라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안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검으로 한판 붙자. 예전의 패배를 설욕…… 아야!”
레이나가 참지 못하고 뒤통수를 후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마다 유치하니?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나에게는 중요한 문제라고! 시로네를 이겨야 한단 말이야!”
‘여전하구나.’
몸은 컸어도 리안은 리안이었다.
“리안, 나는 이제 검으로 너를 이길 수 없어.”
머쓱해진 리안이 헛기침을 했다.
“아니 뭐, 그런 대답을 바란 건…….”
“그러니까.”
시로네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물론이지, 시로네.”
시로네를 위협하는 자는 누구든지 베어라.
신념의 왕국에 새겨진 첫 번째 법 조항이었다.
떠나는 사람들 (2)
개인적인 인사가 끝나자 레이나가 오젠트 가문을 대표해 정식으로 손을 모으고 말했다.
“축하해, 시로네. 역시 해낼 줄 알았어.”
“감사합니다.”
시로네도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젠트 가문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마법사의 꿈을 이루기란 더욱 어려웠을 터였다.
“호호호! 감사하기는. 덕분에 오젠트의 이름도 세계에 알려지게 됐는데. 나중에 모른 척하면 안 된다.”
“당연하죠. 졸업하고 가주님께 인사드리러 갈게요.”
어쨌거나 수석을 차지했으니 다양한 조직에서 손을 내밀 것은 자명했고, 그곳이 어디든 리안과 함께였다.
“여기 계셨군요.”
이루키의 아버지 알비노가 다가오자 시로네가 긴장한 태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루키의 친구 아리안 시로네입니다.”
“시로네, 너무 격식 차릴 거 없어. 그냥 공기라고 생각해.”
굳이 시로네를 만나고 떠나겠다는 알비노의 말에 불안해진 이루키였다.
“이루키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다. 앞으로도 우리 아들을 잘 부탁하마.”
“부탁이라니요. 친구인데요.”
알비노가 손을 내밀자 시로네가 화들짝 맞잡았다.
“사회에 나가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지. 외교적인 문제도 생길 수 있고 말이야.”
“아, 그건 그렇지만…….”
“오늘은 큰 경사로구나. 앞으로 토르미아 왕국을 위해 열심히 해 다오.”
알비노의 말에는 시로네를 자국에 편입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다.
“아버지가 왜 남의 앞길을 정해요? 시로네 인생이니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둬요.”
계약은 마법부서가 전담하지만 용뢰의 수장으로서 이만한 인재를 타국에 빼앗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네 인생도 아니지. 시로네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구나.”
대놓고 말하기가 껄끄러운 상황임에는 분명하지만 시로네는 대놓고 말했다.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저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생각입니다.”
이루키가 안심한 표정으로 숨을 내쉬었다.
“통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머리가 녹슨 거 아니에요?”
‘그래서 너는 아직 멀었다는 거야, 꼬맹아.’
이루키는 알비노의 뒤를 이어 용뢰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왕국의 정책을 총괄할 두뇌로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말 중에 시로네가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일 터.
미리부터 아들의 옆에 시로네를 박아 두고 싶은 게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어쨌거나 친구라면, 너무 껄끄럽게 할 필요는 없겠지.’
일단 욕심을 접은 알비노는 경직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빈센트에게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아들을 훌륭하게 키우셨군요.”
최고 귀족이 예를 갖추자 빈센트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습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네?”
빈센트가 고개를 들자 알비노가 인자한 눈웃음을 지었다.
“가장 좋은 부모는 자식을 믿고 지켜봐 주는 부모니까요.”
“아, 그, 그런가요?”
그렇게 분위기를 푼 알비노가 몸을 돌리며 시로네에게 말했다.
“기회가 되면 언제든 찾아오거라. 멍청한 아들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야.”
“네. 감사합니다.”
시로네도 이번에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걸음을 옮기는 아버지를 따라가던 이루키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따가 올 거지?”
“당연히 가야지. 파티장에서 보자.”
졸업 시험이 끝난 밤에 합격자들끼리 조촐한 파티를 여는 전통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시로네, 언제 갈 거야?”
가족을 돌려보낸 에이미가 다가왔다.
“응, 이제 가야지.”
곧장 시로네를 지나친 에이미가 빈센트와 올리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허허, 그야 뭐…….”
신분의 차이에서 생기는 어색함에 빈센트가 너털웃음으로 무마한 반면 올리나는 소심함을 무릅쓰고 에이미의 손을 맞잡았다.
“정말 고생했어요.”
“헤헤, 시로네도 있는데요 뭐.”
여자만의 촉이 발동한 것이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레이나는 괜히 속이 쓰렸다.
누나의 감정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 리안이 반갑게 맞이했다.
“에이미, 정말 멋있었어.”
“리아아안.”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에이미를 끌어안은 리안이 어깨뼈가 으스러지도록 힘을 주며 들어 올렸다.
“으으으!”
장난스럽게 비명을 지른 에이미가 두 발을 동동 구르다가 내려오는데 케이든이 다가왔다.
“파티에 갈 거냐?”
합격의 기쁨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탈락자를 만나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이었다.
“응. 가야지. 너도 같이 갈래?”
합격자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탈락자들은 가지 않는 게 매너지만 케이든에게는 마야에게 고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가겠어. 대신 전해 줬으면 해서. 축하한다고.”
“그럴 거면 차라리 같이 가. 지금쯤이면 마야도 충분히 알고 있을 거야.”
졸업 시험 중에야 경황이 없겠지만 모든 게 끝나고 뒤를 돌아보면 케이든이 마야를 지켰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가지 않으려는 거야. 마야가……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상처 받지 않아. 마야가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 졸업인데. 오히려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거야.”
케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조차 잊어 줬으면 해.”
“하여튼 고집은.”
허리를 짚은 에이미가 콧김을 내뿜었다.
“앞으로 어떡할 거야? 내가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내년에는 분명 합격할 수 있을 거야.”
마야가 없기 때문이다.
간절히 원하지 않으면 적십자성은 뭐든지 해내고 마니까.
“아니. 가문으로 돌아갈 거야. 마야가 아니었다면 진즉 떠났을 학교였어.”
“흐음, 그럼 이제 뭐 할 건데?”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그리고…….”
케이든이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네 인생에 관여할 생각은 없지만 마야는 너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 아프게 하지 마라. 그녀를 울리면 내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용서하지 않는다고?”
마지막 말이 리안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건 내가 용납하지 못하겠군. 정황은 모르겠지만 어차피 시로네가 알아서 할 일이야.”
“정황 모르면 빠져. 넌 뭐야?”
리안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일어섰다.
“오젠트 리안. 시로네의 검이다.”
“시로네의 검?”
기사 서약을 떠올린 케이든은 그제야 리안의 면면을 살폈다.
“아, 오젠트.”
유명한 검술 가문이기에 케이든도 마법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들은 것들이 있었다.
“오젠트 가문에 재능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청발이 하나 있다더니, 그게 너였나 보군.”
짧은 대화만으로도 리안은 깨달았다.
살다 보면 이유 없이 미운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눈앞에 있는 이 비리비리한 놈이 그중의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마치 그의 형 라이처럼.
“그래, 내가 그 청발이다. 하지만 이건 모르나 보군. 내 앞에서 재능 운운한 놈들치고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없다는 것을. 너도 지금 여기서 꿇려 줄까?”
케이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덩치 믿고 까부는…….”
설령 오젠트라고 해도 왕국 최고의 검사 가문인 크로스가 접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케이든이 가볍게 프레스 기술을 걸자 몸이 곱아드는 기분을 느낀 리안이 눈을 부릅떴다.
기술이 파훼되면서 케이든의 등골을 타고 오싹한 전율이 치밀었다.
‘뭐야, 이건?’
검술학교에서 수많은 살기를 접했지만 지금처럼 선명하게 몸이 둘로 쪼개지는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이 녀석은…… 귀신이다.’
지금까지 그가 베어 온 수많은 자들의 생명이 통째로 밀려드는 듯했다.
‘나도 상당히 무뎌졌군.’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자신이 전장에서 멀어져 있었다는 뜻이었다.
‘검이라.’
어떤 경지에 오르기까지의 시간은 적십자성에게 중요하지 않았기에 딱히 초조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기억해 두마, 오젠트 리안.”
케이든이 자리를 떠나자 시로네가 리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제 졸업 파티에 갈 건데, 리안, 너도 같이 갈래? 내 친구들도 소개시켜 줄게.”
“아니. 오늘은 학교 친구들과 즐겨야지. 졸업하면 오젠트 본가로 와. 당분간 부모님도 거기서 지내실 거니까.”
시로네의 졸업으로 가족에게 외력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오젠트 가문도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고마워.”
그들의 배려가 따듯했고 철두철미한 사고가 든든했다.
리안이 가족들을 데리고 마차로 멀어지자 에이미가 시로네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도 가자. 신나게 즐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