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72
“에이미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아. 따지고 보면 마법사가 되는 거잖아. 마법협회에도 취직할 수 있을 거고.”
지금도 첫 키스의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시점에서 그 모든 행복을 망쳐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 진짜! 성질나 미쳐 버리겠네!”
울화통을 터뜨리는 네이드와 달리 시로네와 에이미는 그저 미안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왕성의 결정에 반발한다는 것은 앞으로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기에, 먼저 말을 꺼내면 상처를 받을까 봐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조금 불합리해도 괜찮아. 에이미와 함께라면…….’
슬픈 날보다는 행복한 날이 훨씬 많을 테니까.
그때 누군가가 문을 쿵쿵 두드렸다.
“아리안 시로네! 왕령이다! 왕성 마법부서 행정집행관님을 맞이하라!”
“지금 나가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끝낸 시로네가 문으로 걸어가며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이따가 보자. 협상할 때는 조언 좀 부탁할게.”
중앙 광장에는 이미 전교생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었고, 황금 마차가 호위를 받으며 서 있었다.
마법부서 행정집행관 라이만의 옆에는 핏기가 말라 버린 포니가 고개를 숙인 채로 서 있었다.
‘야위었구나.’
총명했던 마법사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영혼이 빠진 듯 공허한 눈동자였다.
이번 왕성의 결정에 포니는 할 수 있는 모든 저항을 했으나 그녀 또한 수많은 왕족의 일원일 뿐이었다.
‘나는 꼭두각시. 혈통의 꼭두각시.’
포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만이 카랑카랑하게 공문을 읽었다.
“왕령 제2467호! 왕족모독이라는 중범죄를 저지른 아리안 시로네의 졸업 시험 결과를 전면 무효화한다!”
수많은 죄목이 나열되는 와중에도 시로네는 그저 담담하게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이루키의 예상대로 반전이 있었다.
“자애로운 포니 왕족께서 천한 자의 어리석은 실수로 치부하시겠다고 했으니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
공문을 접은 라이만이 삿대질을 했다.
“어서 무릎을 꿇고 빌어, 이 미천한 것아! 땅에 이마를 대고 조아리란 말이다!”
싹수부터 길들이겠다는 국가의 의지였으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포니는 차라리 죽고 싶었다.
‘나는…… 도대체 뭐지?’
차라리 발가벗고 있는 게 이보다는 덜 수치스러울 듯했고, 시로네의 무릎이 굽혀질 때는 현기증마저 났다.
‘흐음, 의외로 순순하군. 이미 판단이 끝났다는 얘기. 그렇다면 1억은 너무 세고, 8천만부터 시작해 볼까.’
2천만을 아낄 수 있다면 50만 정도는 떨어질 테고 그 돈을 딸의 유학비에 보탤 생각이었다.
‘싫어. 이런 건 싫단 말이야.’
시로네의 손이 땅을 짚기 위해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며 에이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당장이라도 말리고 싶지만, 자신이 시로네를 원하는 만큼 시로네도 그럴 것이기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귀한 왕족이시여.”
그렇게 운을 띄운 것과 다르게 한참을 생각하던 시로네가 천천히 무릎을 펴더니 학생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에이미. 나…….”
에이미가 왈칵 눈물을 쏟으며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 시로네.”
오직 그녀의 동의만이 중요했던 시로네가 라이만을 똑바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 명은 받들 수 없습니다. 저는 포니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라이만이 황당한 듯 눈을 치켜떴다.
“뭐, 뭐야?”
수치를 견디지 못한 포니가 눈물을 쏟아 내고, 이루키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저질러 버렸군.”
막다른 길 (2)
모두들 침묵했지만 마치 생각이 튀어나온 것처럼 무겁게 공기를 짓눌렀다.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왕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국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었고, 분노한 라이만의 어깨는 부들부들 떨렸다.
“네까짓 게 감히! 왕족모독죄가 무엇인지 아느냐! 사형에 처해도 마땅치 않거늘!”
에이미에 대한 승낙이 떨어진 지금 시로네는 거칠 것이 없었다.
“건방진 것도, 왕국에 대항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제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
라이만이 폭발하기 직전, 포니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포니 님!”
사과를 받아야 할 당사자가 떠나 버리자 라이만도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다만 사태를 이렇게 만든 시로네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선택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어라!”
당장이라도 시로네를 능지처참하고 싶지만 왕성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라이만이 사라지자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시로네 선배님! 정말 괜찮겠어요?”
시로네는 그저 에이미를 돌아보았고, 미소를 지어 주는 그녀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에이미.’
육체를 떠나서 정신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 더 멀어지게 될 터였다.
***
알페아스 마법학교 회의실에 모인 교사들이 눈치를 보는 가운데 사드가 벌떡 일어났다.
“욕먹을 각오 하고 말하죠. 시로네의 졸업을 1년 미루는 안건을 통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으나, 시이나의 감성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시로네는 왕국 역사에 남을 높은 성적을 냈습니다. 이대로 졸업을 취소시킨다면 알페아스 마법학교 또한 역사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왕령이에요. 자칫하면 알페아스 마법학교에 심각한 피해를 끼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학생을 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을 수는 없어요! 교사에게는 학생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겁니다!”
시이나가 책상을 내리치자 사드도 언성을 높였다.
“어차피 시로네라면 내년에 졸업할 수 있어요! 폭풍우가 오면 배는 피해야 하는 겁니다. 뚫고 가려다가는 전부 바다에 잠긴다고요!”
알페아스가 긴 신음성을 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가.’
왕국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으나 너무 뛰어난 게 오히려 독이 되어 버렸다.
올리비아가 말했다.
“평민은 기반이 약해서 흔들기 쉬운 것도 있지만,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 귀족보다 높지 않아. 그게 왕성을 불안하게 만든 거야. 차라리 귀족이었다면 정상적인 협상 절차를 밟았겠지.”
“그래서 지켜보자는 쪽인가?”
“어쩔 수 없잖아. 합리성이라는 것도 시스템하에서 만들어지는 거야. 왕령이 떨어진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알페아스가 독단적으로 시로네를 졸업시키는 것도 가능하지만 후폭풍은 정말로 어마무시할 터였다.
“머리가 아프군.”
한숨을 내쉰 알페아스는 온갖 설전이 벌어지는 회의장을 조용히 나섰다.
***
“시로네는 어디 있어?”
숙소에 도착한 네이드가 문을 열었으나 에이미와 이루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싶다고 나갔어.”
“설마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예를 들어 학교를 떠난다든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어. 왕성에서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지 기다려 보자고. 더 좋은 협상안을 제시할지도 모르니까.”
시로네의 이야기로 가득했던 하루가 저물 무렵, 포니는 물조차 입에 대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법사가 되고 싶었을 뿐이야.’
그 자격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것이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삶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책상에 앉아 펜을 든 포니는 유서를 써 내려갔고, 마지막에 시로네의 졸업을 허해 달라는 문구를 추가했다.
의자에 올라가 천장 기둥에 밧줄을 걸고 올가미 매듭을 지은 다음 목걸이처럼 얼굴을 밀어넣었다.
마지막으로 과연 이 방법이 최선인지 되돌아본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의자에서 뛰어내리자 모든 체중이 가녀린 목에 집중되었다.
‘뭐지?’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포니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뇌에서 보낸 죽음의 신호에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잠시 후에야 누군가가 다리를 붙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포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시로네?”
시로네가 미소를 지으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건 좋지 않아, 포니.”
정말로 시로네인가?
어쩌면 이미 죽어서 환영을 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살짝 몸을 틀어 보자 현실적인 고통이 목을 조였다.
“윽!”
하중이 가해지기 직전 윈드 커터가 밧줄을 끊었고, 포니의 몸이 인형처럼 털썩 바닥에 내려앉았다.
“괜찮아?”
두 손으로 땅을 짚은 그녀가 시로네를 외면했다.
“왜 왔어?”
“네가 이럴까 봐 걱정돼서.”
“그러니까 왜 왔냐고! 죽으려고 했단 말이야. 내가 죽으면 너도 졸업할 수 있을 텐데, 왜 나를 구하는 거야?”
시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가. 아직 한 번은 더 죽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 기회를 놓치면 네 인생은 끝장이야.”
“네 잘못이 아니야, 포니.”
포니의 얼굴이 굳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런 거짓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솔직히 말해.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내가 죽어서 이 모든 게 되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화가 나지 않는다고는 안 했어.”
시로네는 포니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나도 모든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죽을 필요는 없어.”
생명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사실도, 시로네에게 위로를 받고 있는 지금의 상황도 비참했다.
“원하는 게 뭐야?”
포니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돈? 권력? 작위? 다 가져가. 전부 뺏어 가도 괜찮으니까, 제발 이걸로 끝내 달란 말이야!”
“너에게 원하는 것은 없어. 내가 원하는 건 누가 줄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리고 이미 얻었어.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나 말이야.”
시로네가 어깨를 짚자 포니의 입술이 삐죽 내려왔다.
“그러니 죄책감 느끼지 마. 누가 자격 따위 주지 않아도 나는 이제 마법사니까.”
“미…….”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 튀어나오면서, 그녀는 시로네의 품에 와락 안겼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시로네! 나는…… 난……!”
포니의 등을 다독이며 시로네가 속삭였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어떻게 됐었나 봐. 미안해!”
원한다면 언제든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납득할 수 없다면 정말로 얻은 게 아니야.’
그때 포니의 목소리를 들은 마법협회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야!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한 직원이 전투태세를 갖췄다.
“제길! 외곽 경호는 뭐 하는 거야!”
“멈춰라.”
시로네의 품에서 벗어난 포니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포니 님! 시로네는 협회에서 절대 엄금을 지시한…….”
“지금 내 앞에서 협회의 간판 따위를 들먹이는 것이냐?”
“윽!”
전과 달라진 분위기에 협회 직원들이 목을 움츠렸다.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이 발산하는 기운은 수련이나 학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포니가 다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로네, 그만 돌아가.”
“하지만 너…….”
“괜찮아.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테니까. 나는 학교에 남을 거야. 그리고 반드시 마법사가 될 거야.”
포니의 의지를 깨달은 시로네는 그제야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창문으로 향했다.
“건투를 빈다, 포니.”
“너도.”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시로네가 뛰어내렸다.
협회 직원들이 반사적으로 달려갔지만 시불상폭매를 시전한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아리안 시로네를 졸업시켜라! 왕국의 부당 처사를 학생들은 용납할 수 없다!”
학생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비상대책위원회의 인물들이 교사 건물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였다.
이번 안건의 당사자인 포니까지 위원회의 편에 섰기에 파괴력이 상당했고, 교사들 또한 넌지시 학생들의 의견에 따라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여러분의 뜻은 알겠습니다. 현재 필요한 서류를 준비 중에 있으니…….”
교사회의 감사인 올리비아가 교사들을 대동하고 나와 학교 측의 입장을 전달하는 그때.
“이게 무슨 소란이야!”
라이만이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아리안 시로네를 졸업시켜 주십시오!”
“왕령이다! 너희들 모두 반역죄로 체포당하고 싶어?”
몇몇 학생이 움찔하자 포니가 고개를 쳐들고 나섰다.
“체포하려면 나부터 해야 할 겁니다.”
“포니 아가씨!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라이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입만 다물고 있으면 시로네의 졸업은 무산되고, 어쩌면 그녀가 티오의 한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