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85
“여기까지 오면서 열네 구의 아인종 시체를 봤지. 물론 오른쪽 위팔뼈에 새긴 골각 문신도 확인했고. 라둠에 처박혀 있어야 할 놈들이 자꾸 이쪽으로 흘러드는 건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하네만?”
브룩스는 거래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에 앉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스펙트럼의 수장, 베네치아를 우리에게 넘겨.”
“왕국 내부적으로 불가침 아니었습니까? 협회에서 관여한 것을 ‘스펙트럼’이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계실 텐데요?”
라둠의 모든 테러 단체가 바슈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릴 터였다.
“그래서 용병이 필요한 거지. 공식적으로 협회는 움직이지 않는다. 사조직을 꾸려서 섬멸할 거야.”
“왜요? 여태까지 잘 지내 오지 않았습니까?”
“여태까지는 그랬지. 하지만 이번에는 왕국만의 사정이 아니라서 말이야.”
브룩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루피스트가 검지를 겨누었다.
“베네치아. 너희가 잡은 게 아니야. 그녀가 직접 온 거지. 내 목숨을 걸어도 좋아.”
사실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자네가 오래 데리고 있을 인물이 아니야. 그녀를 붙잡아 두면 결국 자네마저 파멸시킬 거야.”
“누가요? 라둠의 세력들이?”
“아니. 라 에너미가.”
시로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라 에너미라고요? 그 베네치아라는 여자가 라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요?”
루피스트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숨을 골랐다.
“너는 알고 있겠지, 앙케 라가 직접 스스로를 말소시키고 대정화기를 연 것을.”
“당연히 알고 있죠.”
“제국이 가장 빨랐겠지만, 케이지B팀의 정보를 통해서 토르미아도 발 빠르게 라를 찾기 시작했다. 가급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
“라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나요?”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라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지.”
시로네가 미간을 찌푸리자 루피스트가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라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어. 수많은 사람들이 라를 목격해고, 라와 대화했고, 심지어는 마법학교도 졸업했다. 하지만 찾을 수가 없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추적했지만 끝없이 순환할 뿐이야.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나?”
독한 술을 넘긴 루피스트가 말했다.
“라 에너미는 오직 ‘사건’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사건으로만,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인류 쪽에서도 라 에너미를 탐색할 능력자들은 넘치고 넘쳐. 그걸 알면서도 순순히 화신 전생을 했을 리가 없다는 걸 빨리 파악했어야 했어.”
“라는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그 해답이 베네치아에게 있다. 그녀는 과거, 현재, 미래를 따로 인식하는 3개의 뇌를 가진 유일한 삼뇌족. 라의 사건이 자신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를 구속한 거지. 어쩌면 우리가 이곳에 오는 미래를 읽었을지도 모르고.”
“우리라면, 저를 포함하는 건가요?”
루피스트가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시로네. 세계 각국이 너를 주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하지만 우리도 너만큼은 너를 알지 못해. 그래서 묻는 거다. 뭔가, 짚이는 게 있지 않냐?”
“짚이는 거라면…….”
시로네가 눈을 번쩍 떴다.
“샤갈이 그랬어요, 내가 라 에너미를 만났다고.”
“흐음, ‘사건의 향수’로군. 상당히 골치 아픈 능력이지만, 놈이 그렇게 말했다면 사실일 공산이 크지.”
리안 또한 샤갈의 말을 듣기는 했으나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너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잖아. 사건으로만 존재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든 기억은 남아야 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이것이 당연한 거야. 라는 나에게 어떤 사건도 각인시킬 수 없어.”
거핀의 말을 떠올린 시로네가 확신을 담아 내뱉었다.
“나는 원인이 없으니까.”
삶의 공기 (5)
원인은 없고 결과만 있다.
그것이 바로 헥사.
“그렇군.”
루피스트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시로네와 함께 이스타스를 조사했던 안찰이 정보를 공유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헥사에 대한 보고서는 ‘성전’을 통해 이미 접한 그였다.
시로네가 헥사라면 라 에너미의 천적이 되고, 그렇다면 접촉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리고 샤갈이 그 냄새를 맡았다는 거로군.”
브룩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사건은 뭐고, 라 에너미는 또 누구예요?”
루피스트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지금 베네치아를 만나러 간다. 안내해.”
“잠시만요. 이거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무리 협회장님이라고 해도 남의 것을 막 내놓으라고 하면 곤란하죠.”
라둠은 토르미아 최대의 골칫거리이고 베네치아는 그곳에서 가장 큰 세력의 수장이었다.
“액수를 제시하면 맞춰 주지.”
브룩스가 피식 웃었다.
“너무 얕보시는군요. 저도 엄연히 사업가입니다. 눈에 보이는 돈은 얼마가 되었든 푼돈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처음부터 베네치아의 가치에 금액을 상상한 적도 없었다.
“급해.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
역시나 말이 통하는 루피스트였지만, 그렇기에 잡다한 언변은 통하지 않았다.
“아까 라둠을 폐쇄한다고 하셨죠.”
브룩스가 정색하며 물었다.
“그랬지.”
“제가 관리하고 싶습니다.”
“흐음”.
“어차피 테러 조직이 소탕되면 왕국에서도 따로 관리 부서를 신설해야 합니다. ‘브룩스 용병 중개사’를 사설 협력 업체로 지정해 주시면 아인종 관리에 필요한 용병들을 대겠습니다.”
라둠을 독점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 했던 사업과는 차원이 다른 판이 열린다.
리안은 시로네가 실버링 지부에서 정보 카드를 모두 구입한 것을 떠올렸다.
‘눈에 보이는 건 뭐가 됐든 푼돈이라.’
검도 마찬가지.
눈에 보이는 검보다 무서운 것은 그 검이 담고 있는 수많은 가능성.
그렇게 따졌을 때 라 에너미는 세상을 겨누고 있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좋아, 라둠은 브룩스 용병 중개사가 독점한다.”
“거래 성립이군요.”
브룩스는 잔에 따른 술을 한꺼번에 들이켜고 문으로 향했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베네치아가 구속되어 있는 곳은 저택의 지하에 마련되어 있는 징벌방이었다.
1평 남짓한 방 안에는 횃불조차 걸려 있지 않았고, 허름한 나무로 만든 의자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이 여자가 삼뇌족.’
말로 들었을 때는 머리가 3개 달린 괴물이 떠올라 적잖이 긴장한 시로네였으나 막상 확인한 그녀는 인간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정상적이었다.
다만 눈동자는 흰자가 없는 푸른색이었고 이마에는 장식이 아닌 신체 기관으로서 물방울 형태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스펙트럼의 수장, 베네치아인가?”
루피스트의 물음에 그녀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당신은 루피스트로군요.”
루피스트가 기억하기로 베네치아를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나를 어떻게 알고 있지?”
루피스트는 입을 다물었고 베네치아가 말을 이었다.
“그래요. 단기 예지능력입니다. 과거를 토대로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거죠.”
수많은 테러 조직을 통합시키고 왕국으로부터 아인종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였다.
리안이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음 말을 예측하는 게 가능한가요?”
“그건 당신이 인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분석하는 건 사건이 아닌 시간입니다. 과거와 현재를 구별할 수 있기에, 현재와 미래도 구분이 되는 거예요.”
루피스트가 물었다.
“내가 여기에 온다는 걸 언제 알았지?”
“당신들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1분 전에요.”
“그럼 내가 왜 왔는지도 알고 있겠군.”
“라 에너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죠.”
“그를 만났나?”
베네치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참으로 모호한 질문이군요. 만약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면 스스로 저를 가둘 일도 없었겠죠.”
시로네가 나섰다.
“라 에너미가 사건으로만 존재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베네치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누구죠?”
“저는 아리안 시로네라고…….”
“아뇨. 언제부터 여기에 와 있었죠?”
루피스트의 눈이 반짝였다.
“예지하지 못한 건가?”
시로네의 시불상폭매는 시간을 파괴하는 것으로 완벽하게 열린 미래를 제공한다.
삼뇌족의 뇌가 인식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가 여기에 온 이유, 바로 당신이었군요.”
“아니, 저는…….”
루피스트가 시로네의 말을 끊었다.
“알아듣게 설명을 해. 라는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라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세계에 아무도 없을 거예요.”
베네치아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삼뇌족은 과거, 현재, 미래를 따로 인지하는 3개의 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라는 수많은 자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각인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다만 그 사건이 ‘과거에만’ 존재할 뿐이죠.”
“이미 지나간 현실이라는 거군.”
“네. 시간의 흐름 속에 사는 인간은 구별이 불가능하죠. 하지만 저의 뇌 구조는 다릅니다. 현재 제 과거를 인식하는 뇌에는 라 에너미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하지만 현재의 뇌에서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죠. 가장 큰 문제는, 그럼에도 미래의 뇌가 예지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시나요?”
시로네가 말했다.
“현재가 없다는 거군요.”
“바로 그거예요. 삼뇌족의 입장에서 현재의 분석을 거치지 않고 과거가 미래를 바꾼다는 것은 저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의지대로 바꿀 수 없다는 뜻이에요.”
인간의 의지는 현재의 전유물이다.
따라서 인류에게 현재를 박탈시켜 버리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라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욜가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미로를 설득시킨 이유였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저 자신을 가두어 라에게 이용당하지 않게 하는 것. 하지만 라둠의 다른 동지들은 그럴 수 없어요. 그들은 분명 존재했던 사건에 대한 인과를 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라의 설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임에도, 자신들의 의지로 판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라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지?”
“체제의 전복.”
베네치아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레지스탕스들은 자유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라는 수많은 동지들과 접촉했어요. 누군가에는 힌트를, 누군가에게는 분노를, 누군가에게는 희망을 주입시켰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라의 의지로 통합되었을 때, 토르미아 왕국은 아인종의 국가로 다시 세워지게 될 거예요.”
시로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천국과의 전쟁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던 상아탑이 라 에너미를 찾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라는 공기다.
인류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공기.
“명심하세요. 라와 접촉한 모든 자들은 결국 라의 특별한 설계하에서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루피스트가 시로네를 돌아보며 물었다.
“라 에너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적이 있겠지?”
“네. 길드에 들러서 정보 카드를…….”
“그렇다면 얘기가 쉽겠군. 협회 또한 수많은 정보를 입수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공통적인 게 없었어.”
“저도 그랬어요. 누구는 맹인이라고 하고, 누구는 귀머거리라고 하고.”
“그래.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야. 협회가 추적한 정보 제공자들 전원이 사망했거나 행방불명됐다. 그중에 열두 건은 자살이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 말인가요?”
시로네는 내뱉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는 없겠군요.”
“그래. 라의 설계겠지. 어떤 식으로 자살에 이르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문득 깨달은 루피스트가 브룩스를 돌아보았다.
“샤갈은 지금 어디에 있지?”
질문과 동시에 저택 1층에서 경비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국지성 소나기처럼 우르르 밀려들던 비명이 순식간에 그치자 단단히 사달이 났음을 깨달은 브룩스가 계단을 뛰어올라 가고 루피스트가 뒤를 따랐다.
“시로네, 라 에너미를 막으세요.”
막 몸을 돌리려는 시로네에게 베네치아가 말했다.
“그는 인류의 비극입니다. 인간의 뇌로 라의 사건을 비판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예요.”
어지간한 카르가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당신은 인과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 방법을 찾으세요. 당신이 해내지 못하면 세상은 파멸을 향해 치닫게 될 겁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시로네는 리안을 데리고 1층으로 올라갔다.
이미 사건은 종결되어 있었고, 수많은 시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브룩스가 발로 땅을 구르며 침을 뱉었다.
“젠장. 23명을 죽이는 데 3초도 안 걸렸어.”
비명 소리가 유언의 전부였다면 과장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이들은 도적단과는 비교가 안 되는 강자들이었다.
‘이것이 샤갈의 진짜 실력인가.’
리안은 시체들을 살피며 살인자의 지문이라는 것을 확인해 보았다.
전부 찌르기에 당한 상태였고, 구멍에서 정상치보다 높은 압력으로 피가 분사되고 있었다.
“출혈 상태가 이상한데?”
“속사검의 전매특허지.”
루피스트가 벽에 기대어 쓰러진 시체에게 다가갔다.
피가 뿜어지는 곳에 천천히 손을 내밀자 비로소 반투명한 칼날이 보였다.
“그게 놈의 무기입니까?”
“나도 보는 건 처음이다. 샤갈이 사용하는 무기는 지금 보는 것처럼 수십 개의 얇은 껍질이 겹쳐 있는 단도지. 한 번 찌를 때마다 껍질이 빠지는 구조야. 이런 식이면 단도가 박히는 순간 근육이 조인다고 해도 껍질을 놔두고 알맹이만 빠져나오기 때문에 연격을 넣기가 쉬워져. 하지만 이 박막 칼날의 무서움은 따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