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91
“속사검의 라이덴. 그게 풀잎 서커스 단장이 되기 전에 불렸던 내 이름이다.”
라이덴은 세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암살자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시기는 이미 지났지만 샤갈에게는 그것조차도 충격이었다.
“단장님…….”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 나는 이미 검을 접었고, 남은 삶을 이곳에 바칠 셈이니까. 여기에서 뼈를 묻는 것도 좋겠지. 하지만 너를 보고 생각을 좀 바꿨다. 너의 재능은 이대로 끝나기에는 아쉬운 감이 있어.”
“재능……이라고요?”
“방금 보았다시피 저글링조차도 사람을 죽이는 기술로 탈바꿈할 수 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너에게 달렸으나, 옳은 선택을 할 것이라 믿는다.”
샤갈은 티아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샤갈의 마음을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내색은 하지 않지만 결국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단장님처럼 할 수 있죠?”
라이덴이 오직 하나라는 듯 검지를 세웠다.
“스키마.”
***
“응?”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번쩍 뜬 시로네는 허리를 숙이고 있는 아리아를 발견하고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뭐, 뭐예요!”
황급히 리안을 찾았으나 이미 일어난 그는 침대에 발을 올려 두고 팔굽혀펴기에 여념이 없었다.
“후후, 너, 자는 모습 되게 귀엽다?”
아리아가 얼굴을 들이밀자 시로네가 이불을 끌어와 벌거벗은 상체를 가리며 말했다.
“매너를 좀 지켜 주세요. 남자 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왜에?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의뭉스럽게 되묻는 그녀의 얼굴을 보아하니 리안만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시로네, 빨리 씻어. 밥 먹자, 밥.”
리안이 엄지로 입구를 가리키자 그의 불끈한 근육을 빤히 바라보던 아리아가 시로네의 이불을 낚아챘다.
“에잇!”
“으악! 뭐 하는 거예요?”
황급히 몸을 가린 시로네였으나 이것이 더 이상하다는 생각에 두 팔을 내렸다.
“와! 너 정말 말랐다. 운동 좀 해야겠어.”
리안도 걱정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래, 시로네. 앞으로 나랑 운동하자. 마법사라고 해도 신체 능력이 떨어지면 안 되잖아.”
시로네는 거울 앞에서 몸을 비춰 보았다.
‘내가 그렇게 말랐나?’
여태까지 신경을 쓴 적이 없었지만 리안이 가슴근육을 모으며 힘을 주자 확실히 대비되는 체구였다.
마법학교를 다닐 때는 단련할 시간이 없었다고 해도, 실제로 마법사 중에서는 마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정신을 집중하면 하늘을 날 수 있는데 굳이 뛰어다녀야 할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남자는 힘이야. 자, 때려 봐, 때려 봐.”
리안이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쳐 보라는 시늉을 하자 시로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째려보았다.
포톤 캐논을 날려 버릴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보면 애당초 근육이 붙기는 그른 일이었다.
“됐어. 여행하다 보면 좋아지겠지. 나도 산에서 살 때는 이렇게 마르지 않았다고.”
토라진 표정으로 세면도구를 챙기는 모습에 아리아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무튼 빨리 씻고 내려와. 오늘은 비공개 평가니까 어제보다 시간이 걸릴 거야.”
273명 중에서 1차 평가에 통과한 사람은 고작 54명이었고 오늘은 다시 절반 이상을 추려야 했다.
세안을 끝내고 홀에 도착하자 이미 합격자들 전원이 사방에 흩어져 대기하고 있었다.
‘협회장님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는 루피스트와 제인이 구석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에텔라는 창가 쪽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맞은편에서는 쿠안이 아침을 먹는 중이었다.
1차 평가를 통과했다는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
화살촉을 다듬는 여자, 아령을 들고 운동하는 무투가, 주특기 평가에 쓸 트랩을 준비하는 사람 등 저마다 2차 평가를 준비하는 가운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자가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시로네 씨.”
자유로운 영혼답게 편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 있던 청년이 계단에 있는 시로네에게 손을 들었다.
‘대기 번호가 147번이었지.’
질풍의 위그.
나이는 스물세 살, 주특기는 쌍검이었고 마하의 기사로 알려진 리안과 함께 현재 주목받는 신진 중의 한 사람이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준비는 잘하셨나요?”
“하하! 긴장해서 그런지 한숨도 못 잤어요. 상아탑 후보와 일을 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위그의 몸짓에서는 일말의 긴장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심사관 중에 그를 평가하는 건 리안임에도 굳이 시로네를 지목했다는 것에서 묘한 라이벌 의식이 느껴졌다.
“마하의 기사. 저 사람이 당신의 검인가요?”
위그는 허겁지겁 고기를 먹어 치우고 있는 리안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네. 그렇기도 하지만, 제 둘도 없는 친구예요.”
“흐음, 그렇게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혹시 스키마 중첩도가 몇인지 알고 계시나요?”
흔히들 스키마를 인체 도식으로 설명하지만 머릿속에 그려지는 설계도 같은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육체에 대한 통제권을 느끼는 것.
예를 들어 세 장의 스키마를 운용한다면 특정 행위를 하는 중에 세 가지 영역의 신체 변화를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몸치라도 훈련을 통해서 공중제비의 운동성을 암기할 수 있지만, 체조 선수들은 찰나의 순간에 손끝의 위치나 근육의 밸런스까지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결국 육체는 하나지만 뛰어난 자들의 도식은 상대적으로 많게 되는 것인데, 그런 기준으로 봤을 때 리안의 운동성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시로네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거리자 위그가 퍼뜩 깨달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아, 죄송합니다. 응시생이 심사관을 평가하다니. 제가 너무 주제넘었죠?”
“아뇨. 궁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위그 씨도 통과하면 든든한 아군이 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따 2차 평가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위그는 바닥에 내려놓은 쌍검을 챙기고 홀의 구석으로 걸어가 또다시 바닥에 앉았다.
당황해서 얼버무리기는 했으나 막상 대화가 끝나고 보자 괜히 죄책감이 드는 시로네였다.
‘왜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리안은 어떤 검사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만큼 강하고 시로네 또한 그의 성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스키마를 열지 못하면 재능이 없다는 세간의 기준으로 친구가 평가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리라.
‘미안해, 리안.’
고기를 우물거리던 리안이 시로네와 눈을 마주치더니 음식을 가리키고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하하!”
리안이 최고라고, 시로네는 생각했다.
***
아침을 먹은 시로네와 리안, 아리아는 길드의 공터에 자리를 잡고 2차 평가를 기다렸다.
생존과 직결되는 주특기를 선보이는 자리인 만큼 응시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출입할 수 없었다.
“시작하겠습니다. 들어오세요.”
아리아의 말에 문이 열리고 1차 평가 최초 합격자인 28번과 29번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전과 달리 깍듯한 인사는 없었고, 시로네가 눈을 흘기며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이 가면을 벗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시로네가 쏘아붙이자 루피스트가 피식 웃으며 테이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놀랐다면 미안하군.”
“놀란 게 아니라, 이럴 거면 미리 말씀을 해 주셨어야죠. 저에게 용병단을 꾸리라고 하셨잖아요.”
“달라질 것은 없어. 네가 대장이다. 우리가 들어갈 곳은 라둠의 상류가 지배하는 철의 탑, 생화生花. 어지간한 전력으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아.”
철의 탑에 대해서는 아미 아리아에게 들었기에 시로네도 더 이상 루피스트를 몰아붙일 수 없었다.
“그나저나 213번은 어떻게 된 거예요?”
규정외식자 아세트 메이레이.
1차 평가 때는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묻지 못했지만, 분명 라 에너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첩보에 의하면 4년 전 갈론 왕국에 대대적인 이단 심판이 행해졌다. 그들의 주교인 테라포스 교단에서 신탁을 받아 행해진 일이지. 목적은 단 하나, 신의 목소리를 엿듣는 자를 찾아내 제거하는 것이다.”
“그게 213번이란 말인가요?”
제인이 말했다.
“메이레이의 규정외식, 신의 주파수는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전기적 신호를 잡아내는 능력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특정 구간의 주파수에서 라 에너미의 목소리를 들은 거죠. 이단 심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어요.”
수많은 우주를 파괴했다고 알려진 악신 테라포스와 라 에너미가 어떤 식으로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루피스트가 말했다.
“그녀의 능력은 라둠에 스며들어 있는 라 에너미의 역사를 제거하는 데 나침반 역할을 할 것이다. 어쨌거나 네가 알아 둬서 나쁠 것 없는 정보야. 2차 평가 때도 합격시켜.”
제인과 함께 몸을 돌린 루피스트가 뒷문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데 시로네가 불렀다.
“잠시만요. 어디 가세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루피스트가 돌아보자 시로네가 다시 오라는 듯 앞을 가리켰다.
“주특기는 보여 주고 가셔야죠. 엄연히 테스트인데.”
“지금 바쁘다. 농담할 기분 아니야.”
“농담 아니에요. 아무리 협회장님이라도 편법은 안 돼요. 빨리 와서 평가받으세요.”
시로네의 고집은 졸업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루피스트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럼…….”
쿠구구구구구궁!
실버링 길드 건물이 흔들리자 홀에서 대기하고 있던 응시자들이 겁에 질린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그리고 잠시 후, 가면을 쓴 28번과 29번이 짜증스럽게 문을 열고 나타나 구석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오감불충분 (2)
“쳇,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테이블에 앉은 루피스트가 투덜거리자 제인이 웃었다.
“지금이라도 제안을 해 보는 건 어때요? 상당히 아쉬워했잖아요.”
시로네를 상아탑에 빼앗겨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가장 심하게 왕국을 욕한 사람이 루피스트였다.
“제안을 받아들일 놈이면 진즉에 했어.”
마법학교 5대명문이 협회에 집결했을 때 손에 들어온 합격증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 광경이 아직도 아른거렸다.
“차라리 잘됐어. 타국에만 빼앗기지 않으면 되니까.”
루피스트가 행동에 나서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였다.
한편 28번과 29번의 평가가 끝난 뒤에도 시로네는 다음 참가자를 부르지 못했다.
리안과 아리아도 마찬가지로 조금 전에 봤던 마법의 시연에 넋을 잃은 상태였다.
“이것이…….”
리안은 말조차 꺼내지 못했으나 시로네는 마치 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1급 대마법사의 마법이야.”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위력에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상황은 그의 파괴력과 섬세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게다가 제인 씨의 마법도 대단했지.’
주특기 평가이기 때문에 어떤 마법은 심사관에게 직접 구사할 수밖에 없고, 시로네는 그녀의 정신 마법이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똑똑히 깨달았다.
아리아가 말했다.
“일단 다음으로 넘어가자. 아직 52명이나 남았으니까.”
정신을 차린 시로네가 문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리안만큼 기골이 장대한 대머리 남자가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응시자 59번 마그하르트입니다!”
나이는 43세, 20년 동안 권법을 수련했고 현재는 무투가 길드에서 용병을 업으로 살아가는 베테랑이었다.
1차 평가에서 딱히 두각을 드러내는 점은 없었지만 기본기가 탄탄했고 괴력이 강점이라는 소개에 시로네가 합격시켰다.
“네.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 장기를 보여 주세요.”
마그하르트는 등에 짊어진 거대한 배낭을 내려놓더니 안에서 단단한 벽돌을 꺼냈다.
‘격파 시범이구나.’
보통 격파라 하면 충격이 잘 전달되도록 지지대를 세우지만 그는 무려 열다섯 장의 벽돌을 차곡차곡 포갠 형태로 쌓아 올렸다.
허리께까지 올라오는 벽돌의 탑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던 마그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호랑이 권법에서 가장 강력한 기술인 맹호 박치기. 이 벽돌을 한 방에 격파해 보겠습니다.”
격파, 소년의 로망.
심사관의 본분을 잠시 접어 둔 채 시로네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우우우!”
마그하르트가 기마 자세를 취하고 두 손을 휘돌리는 동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마침내 그가 아래턱을 앞으로 내밀며 기합을 질렀다.
“으라차차!”
펄쩍 뛰어오른 그가 마치 거꾸로 떨어지듯 이마를 앞세워 벽돌의 탑을 내리찍었다.
돌이 깨지는 소리가 연거푸 둘리면서 그의 얼굴이 벽돌을 깨고 땅바닥까지 내려갔다.
“우와! 다 깨졌어!”
자리에서 일어난 시로네는 흙먼지에 파묻혀서 절을 하고 있는 마그하르트에게 박수를 쳤다.
“대단해요! 그런데 괜찮으세요? 머리가 아플 텐데.”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저기…… 마그하르트 씨?”
땅에 이마를 박은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자 슬슬 불안해진 시로네의 언성이 높아졌다.
“마그하르트 씨, 제 목소리 들리세요?”
그때 마그하르트의 허리가 풀리면서 땅에 퍼지더니 사지가 통통 튀듯 경련을 일으켰다.
“큰일이야! 의식을 잃었나 봐!”
아리아가 벌떡 일어나 문에 대고 소리쳤다.
“마스터! 마스터! 응급 환자예요!”
실버링 길드원이 공터로 들어와 마그하르트를 들쳐 업고 밖으로 냅다 뛰었다.
순식간에 장내가 정리되었으나 시로네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그들이 나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리안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너무 긴장했어. 평소보다 몸이 굳어 있으니까 힘이 분산된 거야. 박치기를 하는 순간 의식을 잃어버린 거지.”
시로네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해프닝이 있기는 했으나 역시나 1차 평가를 통과한 만큼 대부분의 응시자들이 만족스러운 주특기를 보여 주었다.
‘흐음, 애매한걸. 보류 판정을 적용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