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594
시로네는 상상해 보았다.
“사실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아. 핵심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달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지. 뇌가 느끼는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과연 이 컵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뇌의 착각에 불과한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라를 상대하면서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는 짓이야. 라 에너미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실제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구나. 라를 찾으라는 것은…….’
시로네는 상아탑이 출제한 문제의 의도를 깨달았다.
-당신은 존재와 비존재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별들의 후보가 풀어야 할 문제였다.
쿠안이 물었다.
“오감의 기억을 현실로 끌어내 라를 죽인다. 발상은 좋지만, 어떻게 현실로 끌어내지?”
“제인.”
루피스트가 손을 내밀자 제인이 상자를 건넸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것은 왕국 재정으로 특별히 공수한 오브제다. 이 상자 안에 라의 능력에 관한 힌트가 들어 있지.”
여태까지 백치처럼 멍한 상태였던 리안이 처음으로 눈을 빛내며 관심을 드러냈다.
“어떤 오브제죠?”
“.”
루피스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시로네가 무릎을 쳤다.
“아, !”
일전 친자 확인 소동으로 카즈라 왕국에 갔을 때 우오린에게 들었던 A급 오브제였다.
“알고 있나 보군. 이쪽 계통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물건이다. 네메시스와 접촉하면 사용자의 상상이 반경 20미터 내에 현실로 구현되지.”
욕망에 잡아먹힌 인간의 말로가 비참하기에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오브제 중의 하나였다.
“어떻게 상상한 것이 현실이 될 수 있느냐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 없을 테지. 어쨌든 협회에서는 라의 능력이 의 기제와 비슷할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에텔라가 말했다.
“라의 능력을 역이용한다는 것이군요. 하지만 의 현실 구현 능력은 접촉한 대상에만 한정되지 않나요?”
“그래서 부쉈다.”
루피스트가 상자를 열자 옥처럼 매끈한 재질에 분홍빛을 띠는 8개의 반지가 나왔다.
시로네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반지를 가리켰다.
“그게…… ?”
“그래. 처음 이것을 구했을 때, 두 사람이 동시에 에 접촉하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지. 실험 결과, 상상은 공유된다. 오감이 느끼는 한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이야.”
루피스트가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또한 의 능력은 광석에 담긴 특수한 성분의 함유량으로 결정되는 것 같다. 총중량의 10분의 9를 버리면서까지 반지 형태로 가공한 이유는 운반력과 소지력이 좋기 때문. 반지를 착용한 이후부터는 마음을 통제해라.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만이 여기에 모여 있다. 임무가 끝나면 물건은 다시 회수해 갈 거다.”
쿠안이 말했다.
“메이레이의 능력으로 라를 현실로 끌어낸다는 것은 납득했어. 하지만 감각이 너무 부족해. 오로지 귀에 의지해서 추적하는 것은 제쳐 두고, 대체 어떻게 라를 베라는 거야?”
시로네가 퍼뜩 떠오른 듯 중얼거렸다.
“시불상폭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루피스트가 시로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바로 너다.”
시로네의 시불상폭매는 과거를 현재로 인식할 수 있고, 그렇기에 라 에너미를 만질 수 있는 촉각이 될 터였다.
“메이레이가 찾아내면, 네가 죽이는 거야.”
라둠으로 (1)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 라둠의 뒷문으로 한 마리의 들개 같은 남자가 접근하고 있었다.
“킁킁. 킁킁.”
아니, 사건의 향수를 따라 배회하는 샤갈은 진정 들개라고 할 수 있었다.
무려 일곱 장의 스키마를 운용할 수 있는 천재적인 신체 능력은 일화의 술 1단계에 해당하는 거인의 운동성과 맞먹는다.
현재 그가 운용하는 스키마 베이스는 감각 계열이었고 그중에서도 시각, 후각, 청각을 강화시키는 원감각 빌드였다.
4회의 ‘접기’를 통해 16배나 증폭시킨 감각에 스키마의 부분을 접어 특정 능력을 강화하는 ‘접지’까지 더해지자 라 에너미의 향수가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있는가?’
“멈춰라. 민간인 출입 금지 구역이다.”
라둠의 뒷문을 지키고 있는 왕성 경비대가 횃불을 들이밀며 샤갈을 멈춰 세웠다.
마치 듣지 못한 사람처럼 샤갈이 가까이 다가오자 심각성을 느낀 경비대가 무기를 뽑아 들었다.
“멈춰! 정체를 밝혀라.”
“킁킁. 킁킁.”
개처럼 냄새를 맡는 모습에, 처음에는 정신이 이상한 놈인가 싶었다.
커다란 가방을 질질 끌며 다가오는 모습도 그렇고, 무엇보다 긴 머리카락이 베일처럼 얼굴을 가린 상태에서도 제정신이 아닌 눈빛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죽여. 내가 책임진다.”
경비대장의 지시에 병사들이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어 샤갈을 덮쳤다.
10명이 넘는 부하들이 샤갈을 그대로 지나쳐 바닥에 쓰러지자 경비대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 어떻게…….”
약하지 않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은, 지금 등장한 광인이 여태까지 본 적 없던 스키마의 초고수라는 것이었다.
‘지원을……!’
반격을 포기한 채 경비대장은 호루라기를 물고 강하게 숨을 내뿜었다.
몸을 날린 샤갈이 팔부터 내밀어 단도를 찔렀고, 푝푝푝 소리를 내며 세 번의 칼질이 거의 동시에 목에 들어갔다.
숨결이 입에 도착하기도 전에 목덜미에 박힌 칼날로 쉭쉭 빠져나갔고, 퍽 하고 엄청난 핏물을 구멍으로 토해 내며 경비대장의 몸이 넘어갔다.
단도가 들어 있는 묵직한 가방이 쿵 하고 땅에 떨어졌으나 라둠의 정적을 깨우지는 못했다.
“라 에너미.”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 간 존재.
“죽여 주지. 몇 번이고.”
라둠의 뒷문이 개방되었다.
***
자정을 앞둔 무렵, 시로네 용병대 20인이 실버링 길드의 공터에 모였다.
고르고 고른 자들답게 지옥에 떨어져도 버틸 수 있을 만한 위용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루피스트와 제인은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었고, 라둠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체를 밝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대장은 시로네였기에 병력을 통솔하는 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시로네 용병대의 대장을 맡은 시로네입니다. 출발에 앞서 용병대가 해야 할 임무를 말씀드리죠.”
1만 골드의 보상이 걸린 임무가 무엇인지 궁금한 대원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이제부터 우리는 라둠에 잠입할 겁니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정확히 어떤 임무를 수행하게 되죠?”
질풍의 위그가 손을 들고 물었다.
리안과의 대결에서 패한 뒤로 서열 정리는 끝났고 그도 납득했으나, 전보다 의기소침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우리는…….”
잠시 적합한 단어를 고민하던 시로네가 말했다.
“라둠을 점령할 생각입니다.”
“뭐?”
비로소 몇몇 대원들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라둠은 왕국에서도 손대기를 꺼리는 바슈카의 음지.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지만 어중이떠중이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면 쓸어도 진즉에 쓸어버렸을 터였다.
“라둠을 점령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브룩스 용병 중개사가 후원하고 상아탑 후보가 이끄는 용병대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설 군사 조직, 고작 20명으로 라둠을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설득시켜야 하지?’
마법협회장 루피스트가 용병대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소수만 알고 있는 사실, 또한 라둠의 핵심부인 철의 탑 ‘생화’의 존재에 대해서는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발설할 수 없는 국가 기밀이었다.
“라둠이라면 몇 번 가 본 적이 있지.”
회복 마법사로 용병대에 합류한 카르긴이 말을 꺼냈다.
70대의 나이에도 용병대의 여성들에게 추파를 던지는 음흉한 마법사였다.
“라둠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지. 최외곽 빈민 구역, 안쪽의 은폐 시설 구역, 중앙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핵심 구역. 아인종의 지배자들이 핵심 구역에 산다는 설이 있지만 누구도 거기까지 가 본 적이 없어. 수많은 조직들의 은폐 시설물이 핵심 구역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지.”
은폐 시설 구역에는 왕국의 추격을 받는 아인종 조직과, 민간 조사 차원에서 잠입한 인간의 조직들이 뒤섞여 있다.
그들의 기술력이 은폐 시설 구역을 미로로 만들면서 핵심 구역으로 들어갈 길을 차단하는 천연의 방어막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라둠을 정복한다는 것은 결국 핵심 구역에 들어가겠다는 얘기. 방법은 있나? 뚫어야 할 은폐 시설의 숫자만도 100개는 넘을 거야. 더 큰 문제는, 그 많은 보안장치들이 전부 다른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거지. 어떤 정보 전문가도 그 모든 걸 뚫고 들어갈 수는 없어.”
카르긴의 말에서 위험의 냄새를 맡은 바이콘이 벌떡 일어섰다.
중장갑으로 무장한 그는 장검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정통파 검사였고, 세 장의 스키마를 운용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래! 그냥 싸우고 죽고 하는 문제가 아니야! 적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쳐들어간다는 거야? 설마 보안 시설을 하나하나 깨면서 나가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하나하나 깨면서 나갈 거예요.”
시로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핵심 구역으로 가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으니까요.”
“흥! 보안장치는? 그건 누가 다 해제할 건데?”
“저와 29번이 합니다.”
시로네의 말에 카르긴이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작 둘이서? 마법인가?”
“네. 저는 어떤 보안장치도 해독할 수 있어요.”
울티마 시스템의 위력이었다.
“제가 해독하면 29번이 해제할 겁니다. 승산은 충분해요.”
할 말이 없어진 바이콘이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으나 모두가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누군데? 저 두 사람 말이야.”
생존 및 함정 전문가인 브로마크가 28번과 29번을 가리켰다.
“하겠다고 해 놓고 태클을 거는 건 내 취향이 아니지만 아무래도 찝찝해. 용병단이 조직되었는데 어째서 정체를 숨기는 거지?”
모두가 대답을 기다렸고, 시로네도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하긴, 목숨을 거는 일인데,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지.’
“10만 골드 주지.”
28번의 돌발적인 제안에 용병대 전원이 고개를 돌렸다.
“현물로 가져가도 좋고, 길드의 은행에 입금해도 상관없다.”
실버링 길드의 마법사 콘이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10만 골드를…….”
“하기 싫으면 빠져라.”
28번이 좌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와 29번이 가면을 쓰는 것을 조건으로 용병단 전원에게 즉시 10만 골드를 지급하겠다. 동의하지 않겠다면 용병단에 있을 수 없다. 대장과 협의가 끝난 사안이야.”
각자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흐음, 왕성 쪽 인물이군.”
카르긴은 눈을 가늘게 뜨고 28번과 29번을 살폈다.
확신은 하지 못해도 분명 저 둘의 실력은 자신을 포함한 다른 자들과 차원이 다르다.
‘라둠 점령, 가면, 테시야 아리아, 10만 골드. 이제야 아귀가 맞아떨어지는군.’
대부분의 용병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왕성의 비공식적 임무다.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라둠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야.’
따라서 폐쇄할 생각이다.
‘하지만 실패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기에 정체를 숨긴다는 건가?’
왕성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이 물증으로 밝혀지면 분명 존재하고 있을 은밀한 협상 자리에서 천문학적인 손해를 보게 될 것이고, 심각할 경우 수도가 테러당할 수도 있었다.
‘일개 관료가 책임질 수 있는 사안이 아니군. 그리고 남자와 여자. 저것들, 루피스트와 제인이었어.’
협회장과 비서실장이 동시에 출격했다.
용병의 체질상 왕성의 딱딱한 사고방식은 싫어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안도감이 든다고 할 수 있었다.
‘정말 협회장이라면, 우리가 이미 눈치챘다는 것도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가면을 벗을 수는 없다.
심증과 물증은 정보의 영역에서 가짜와 진짜만큼의 차이가 있는 법이고, 대원들에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당하느냐 합법적으로 제거당하느냐의 차이이기도 했다.
‘가면은 벗기지 않는 게 좋겠군.’
“나는 하겠어.”
모두가 브로마크를 주목했다.
“오늘 내로 10만 골드를 가족에게 입금시킨다면 가면이 누군지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상관하지 않겠어.”
브로마크가 두 팔을 펼치며 좌중에게 말했다.
“다들 고민할 필요 있어? 언제는 우리가 사람 보고 일했나? 우리에게 돈을 주는 순간 가면도 고용주가 되는 거야.”
어차피 사지로 들어갈 거라면 전력 약화는 피하는 게 좋다.
브로마크에게 설득당한 것은 아니지만 돈과 생존의 균형을 계산하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나도 동의.”
화살통을 메고 있는 여자가 손을 들었다.
용병대의 유일한 궁수인 조슈아라는 여성으로, 신속 정확한 사격과 눈의 기술이 일품이었다.
“단, 현물로 받겠어. 그것도 지금 당장.”
카르긴이 물었다.
“10만 골드를? 최상급으로 받아도 100개나 되는데?”
“상관없어. 큐브릭에 넣으면 되니까.”
조슈아가 반지를 보였다.
“큭큭, 사람을 못 믿는 여자로군. 그러다가 손가락 잘린다고.”
“할 수 있으면 해 봐.”
조슈아의 눈이 고양이처럼 빛났다.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캐츠아이라는 눈의 기술이었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죽여 버릴 테니까.”
“끌끌, 성질머리 하고는…….”
카르긴은 혀를 찼으나 내심 싫지 않은 눈치였다.
‘마음에 든단 말이야.’
루피스트가 말했다.
“모두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진행하겠다.”
반론은 없었고, 시로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10만 골드에 대한 지불이 끝나고 다시 모이죠. 자정에 출발할 예정이니 가급적 빨리 처리해 주세요.”
루피스트는 제인을 통해 핵심 멤버를 제외한 단원들 전원에게 10만 골드를 각자의 방식으로 지급했다.
가족이 있는 자들은 입금을 원했고 홀몸인 자들은 조슈아와 마찬가지로 큐브릭을 선호했다.
왕성 쪽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이 칠 무렵, 시로네 용병대는 마차를 타고 실버링 길드를 빠져나왔다.
30분가량을 달려 라둠의 뒷문에 도착하자 조슈아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