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천민이었고 효심이 깊은 데다 영민함도 갖추고 있었다.
발품을 판 보람을 느끼며 테무란이 몸을 돌렸다.
“일주일 후에 데리러 오지. 그사이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거절해도 좋아. 하지만 일단 저택에 들어가면 일이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는 걸 명심하게.”
테무란은 홀로 문을 열고 나갔으나 가족들도 살펴 가라고 입을 뗄 기분이 아니었다.
목숨보다 값진 기회(2)
빈센트가 시로네의 어깨를 붙잡고 소리쳤다.
“시로네! 어째서 허락한 것이냐? 이건 정말 위험한 일이야! 아니, 내 책임이다! 이 애비가 무지해서 그런 거야! 그러니 거절하자!”
“괜찮아요, 아빠. 유출만 안 시키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사람이 하는 일에 어떻게 비밀이 있을 수 있겠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야! 이 애비가 책임지고 거절하마!”
시로네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좋은 부모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버지.”
처음으로 높여 부르는 말에 빈센트는 멍했다.
하지만 그보다 충격적인 건 시로네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었다.
“시, 시로네.”
“감사합니다.”
두 팔을 벌린 시로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주셨어요.”
“흐윽!”
빈센트는 체면도 잊은 채 울어 버렸다.
살아오면서 이토록 환희에 차오른 아들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걱정하지 마라, 시로네! 무슨 일이 있어도 애비가 너를 지켜 줄 거야! 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열심히 해! 내가 반드시 너를 지켜 줄 거야!”
“아빠, 열심히 할게요.”
“그래, 우리 아들! 내 보물!”
아빠와 아들의 감동적인 포옹에 엄마인 올리나 또한 행복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일주일 후.
오젠트 가문의 평집사들이 시로네를 데리러 왔다.
2년이 넘게 걸리는 작업이지만 소박하게 살았던 시로네의 짐은 고작 배낭 한 보따리였다.
테무란은 시로네를 데려가는 조건으로 한 달에 20골드를 주기로 했다.
여태까지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4골드였으니 사냥꾼에게는 굉장한 거금이었다.
다시 돌아오면 이 집도 조금은 호화롭게 변해 있을까?
부모님의 성품은 알고 있지만 시로네는 애써 즐거운 상상을 하며 아쉬움을 떨쳐 냈다.
평집사들은 일사천리로 계약을 진행시켰고, 정신이 없는 빈센트는 작별의 정도 충분히 나누지 못한 채 아들을 마차에 태워야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걱정과 달리 시로네의 마음은 차분했다.
부모님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감정이 아닌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시기였다.
스피릿 존에 들어간 시로네는 초조해하는 부모님을 공감각을 통해 느꼈다.
‘걱정하지 마세요.’
진심을 다해 생각하자 빈센트와 올리나는 갑자기 마음이 따스해지는 경험을 했다.
“시로네…….”
마법은 아니었다.
단지 아들의 마음이 전해진 것일 뿐.
“출발!”
마차가 덜컹거리는 순간 스피릿 존에서 튕겼으나 감긴 눈은 열리지 않았다.
‘흔들리지 말자.’
오젠트 가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일생일대의 기회이자 최악의 위기인 양날의 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2년을 무사히 버틸 수 있을까?
‘집중하는 거야.’
알 수 없는 미래에 몸을 맡긴 채, 시로네는 다시 스피릿 존으로 빠져들었다.
***
오젠트 가문은 장군에 해당하는 국가 공인 3급의 검사를 배출한 무가였다.
“가주인 오젠트 비쇼프 님은 국가 공인 4급의 기사야. 현재 크레아스 도시의 군사장을 역임하고 계시지. 한마디로 이 도시 군사력의 실세라는 거야.”
평집사의 설명을 들으며 도착한 시로네는 오젠트 가문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우와.”
압도적인 규모의 저택 중심부를 거대한 도로가 섬광처럼 시원하게 질주하고 있었다.
‘오젠트 가문의 명물, 대직도구나.’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뻗어 나가는 대직도야말로 가문의 기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헤헤, 겁먹었냐? 벌써부터 놀랄 필요 없어. 식구들은 더 괴물이니까.”
“말조심해. 목 달아나고 싶어?”
나이 지긋한 집사가 쏘아붙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되었기에 더 말하지 않고 정문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와라.”
대직도는 집사를 위한 길이 아니었다.
시로네는 도로의 옆에 조성되어 있는 정원의 오솔길로 빠져 저택을 우회했다.
집사가 머무는 곳은 4층의 원형 건물이었고 집무실에 부집사 테무란이 있었다.
“왔느냐? 작업을 설명할 테니 따라오도록.”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사조차 받지 않은 테무란은 두꺼운 서류를 챙겨 도서관으로 향했다.
낡은 철문이 열리는 순간 시로네가 꿈에 그리던 감동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책의 세계.
2층에도, 3층에도, 4층에도, 눈에 보이는 것은 빼곡하게 차 있는 책들뿐이었다.
“후우.”
물씬 풍기는 종이 냄새를 맡으며 시로네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목숨을 걸 가치가 충분했다.
“이곳에 있는 서적을 신도서관으로 옮길 것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도서 분류다. 일주일마다 목록을 전할 테니 너는 그 책들을 찾아서 모아 두어라. 작업은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그 이외에는 자유 시간이다. 밖에는 나갈 수 없고, 특별한 지시 없이 저택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집사 수칙은 평집사가 알려 줄 것이다. 이해했나?”
“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죠?”
“내일부터. 오늘은 짐을 풀고 쉬어라. 그동안에 집사 수칙을 전부 숙지하도록.”
다음 날부터 시로네는 도서관에 출근했다.
막상 작업을 시작하자 어째서 이 일을 1명이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테무란이 건넨 서류에는 수백 권의 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분류 기준이 주관적이었다.
이를테면 ‘검술의 역사’라는 책을 역사서로 분류해야 할지 검술서로 분류해야 할지 애매했다.
‘어차피 큰 틀은 테무란 씨가 정해 주었다. 내가 정한 기준에 어긋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시로네는 우선순위를 정했다.
역사는 포괄적이고 검술은 전문적이므로, 검술의 역사는 검술서로 분류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기준을 정하는 데에만 무려 2주가 소요되었다.
물론 이런 작업조차 유익했다.
분류 체계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전에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은 연결되어 있다.
작업은 점차 수월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량을 시간에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슬슬 책을 읽어야지.’
이곳의 지식은 훗날 엄청난 무기가 될 것이니만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고 싶었다.
자, 눈앞에 1만 권의 서적이 있다.
2년 가까운 시간이 남아 있다고 해도 모든 서적을 읽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냥 닥치는 대로 읽는 게 가장 빠른가?’
그 순간 생각이 번뜩였다.
“그렇구나!”
모든 지식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 가지 분야를 먼저 파고든 다음 차후에 다른 분야를 보강하면 된다.
‘그럼 어떤 분야를 공부해야 할까?’
생각을 거듭하던 시로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사.”
인류의 모든 사건들이 시간의 순서에 따라 기록되어 있는 지식의 척추.
시로네는 역사라는 개념을 수평선으로 상정했다.
그 선을 확대하면 그 안에 종교, 과학, 마법, 신화, 문학, 예술, 정치, 전쟁, 경제 등 인류의 모든 지식이 시간 순으로 담겨 있을 터였다.
“역사를 익히면 다른 지식을 보강하는 시간이 훨씬 단축된다. 역사야말로 지식의 척추야.”
직접 작성한 분류 목록에 따르면 대도서관에 비치된 역사 서적은 대략 팔백쉰 권.
시로네는 결심했다.
‘2년 동안 이 팔백쉰 권의 서적을 모두 읽는다.’
지식의 척추를 세우는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시로네는 일과가 끝나도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책을 읽었다.
야근을 명목으로 점호를 빠질 수 있었다.
사실 부집사 테무란을 제외하면 임시직인 시로네를 신경 쓰는 집사는 없었다.
‘어렵다.’
역사서를 읽는 건 솔직히 고역이었다.
15년을 산에서 자란 소년에게 들어 본 적도 없는 대륙의 지명과 인물, 거기서 얽히는 사건들이 쉽게 연상이 될 리가 없었다.
‘통째로 외워 버릴까?’
시로네는 고개를 저었다.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언제든 꺼낼 수 있어야 해. 한 줄의 사건이라도 확실히 이해하는 게 지식의 척추를 세우는 가장 빠른 길이야.’
역사를 이해하는 건 중노동이었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 사건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까지 꼼꼼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능률은 현저하게 떨어졌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책 한 권을 읽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스레 도서관에서 자는 날은 잦아졌고 기절하듯 쓰러지는 일도 태반이었다.
새벽 4시.
철문이 열리고 수정등을 앞세운 테무란이 들어왔다.
시로네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날마다 이 시간에 들어와 시로네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시로네의 발 앞에 놓인 책을 향했다.
‘똑같군.’
별로 어렵지 않은 내용인데도 보름 동안이나 책이 바뀌지 않고 있었다.
테무란은 코웃음을 쳤다.
미친 듯이 실용 서적을 익히고 있다면 일과 외에 출입을 금지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완전 맹탕이다. 글 좀 읽는다고 허황된 꿈을 꾸는 머저리였던 것이다.
“그럼 그렇지. 천출이 무슨 성공을 해 보겠다고.”
공부로 출세하려면 머리도 좋아야 하지만 영리한 사고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꿈만 거창한 시로네는 어느 쪽도 글렀다고 생각하는 테무란이었다.
***
세 달이 지났다.
분류 작업은 점차 손에 익었고 집사들을 통해서도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귀족들은 서적이 유출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가문의 오의는 직전으로만 전해지고, 세상에 할 일이 워낙 많은 귀족들은 책 몇 권이 사라지든 말든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덜 위험해진 것은 아니었다.
귀족의 여유로움은 고지식한 평민들의 충정이 받쳐 줘야 가능한 일.
집사들은 한 치의 실수도 없도록 하기 위해 얼마든지 냉혹해질 수 있었다.
귀족은 기억조차 하지 않을 일에 평민은 목숨을 걸고 임해야 한다.
두 계층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피부로 느낀 시로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오후, 도서관 문이 열리더니 생소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 빌어먹을 영감탱이. 오늘 같은 날은 쉬면 어디가 덧나나?”
불청객의 등장에 시로네는 눈을 깜박거렸다.
‘저 사람은…….’
가주의 막내아들 오젠트 리안이었다.
무골의 핏줄답게 얼굴선이 굵은 호남아였고, 동갑인데도 시로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도서관 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리안! 감히 도망을 쳐? 잡히면 정원 백 바퀴 추가다!”
“으악! 제기랄!”
안절부절 책장 사이를 뛰어다니던 리안은 그제야 시로네를 발견했다.
반응할 틈조차 주지 않고 달려온 그가 시로네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야! 나 여기 왔다는 말 하지 마. 알았지?”
그러고는 책장 밑으로 몸을 숨기자 노인의 일갈이 도서관을 흔들었다.
“리아안! 여기 숨은 거 다 알고 있다!”
백발의 노인이지만 어깨는 떡 벌어졌고 키는 거인을 연상시킬 만큼 컸다.
흰 수염을 명치까지 기른 그가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며 시로네에게 다가왔다.
“너! 머리털 퍼렇고 땅콩만 한 놈 여기 들어왔지?”
시로네는 생각해 보았다.
파란 머리의 소년은 알지만 그게 땅콩만 한 거라면 노인의 눈에 자신은 어떻게 보일까?
“인상착의로 보아 막내 도련님 같네요. 실례지만 영감님께서는 누구신지요?”
시로네는 말을 돌려 볼 생각이었으나 백전노장은 소년의 심리를 꿰뚫었다.
“검술 사범이다! 그 땅콩을 두들겨 팰 수 있는 스승이란 말이다! 잡소리 말고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너부터 얻어터지고 싶지 않으면.”
시로네는 입맛을 다셨다.
가주의 명을 받아 도련님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말장난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아, 그러셨군요. 막내 도련님이라면 저기 책장 아래에 숨어 있습니다.”
“야! 너 미쳤어? 죽을래?”
리안이 인상을 쓰며 기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