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00
정신적 동화를 이루지만 어디까지나 주도권은 시로네가 쥐고 있다.
만약 인간 대 인간의 결합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이미 각오한 일이니까. 그렇기에 네가 수많은 것들을 내 몸에 넣을 때도 그저 받아들였던 것이다.”
“어, 그건…….”
“괜찮아. 숙명이니까. 다만 이 또한 숙명이다.”
“무슨 뜻이죠?”
“내가 주인을 부르는 경우는 일생에 단 한 번, 주인의 정신과 육체를 거두어 갈 때뿐이다.”
시로네는 천천히 물러섰다.
“날 죽이겠다는 건가요?”
“도망칠 곳은 없어. 이곳은 나이자, 너이니까.”
묘하게도 납득이 갔다.
“이유를 말해 주세요.”
“공포에 꺾였다. 내가 품어야 했던 모든 주인이 그랬지.”
“꺾이지 않았어요! 아직 싸울 수 있다고요!”
“이대로 보낸다고 한들 어차피 죽는다, 시로네.”
여자는 잠시 서운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살기를 드러내며 시로네를 향해 쇄도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즐거웠다.”
진심을 깨달은 시로네가 포톤 캐논을 시전했으나 그녀는 손쉽게 검을 휘둘러 모조리 튕겨 냈다.
“소용없어. 너와 나는 하나다.”
시폭감으로 1초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느꼈지만 그 어디에도 여자가 있었다.
‘내 시간을 똑같이 공유하고 있는 거야.’
1초 전에도, 1초 뒤에도 칼날은 정확히 시로네의 정수리에 내리꽂혀 그의 몸을 반으로 쪼갤 것이다.
통합된 인지 안에서 벌어지는 절대적인 죽음 앞에서 시로네는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렇게 끝나는구나.’
부정의 여지가 조금도 없었기에 오히려 수긍은 쉬웠다.
아리안 시로네.
그녀의 몸에 함부로 새겨 버린 글귀가 빛나는 순간 안쪽에 새겨진 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아리안 시로네가 있기에 카르미스 에이미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있기에 아르망이 있는 것.’
율법의 수 2에 해당하는 개념이 통찰의 길을 따라 뇌리를 강타하자 번쩍하고 암흑의 공간에 번개가 내리쳤다.
“…….”
여자가 휘두른 검이 시로네를 그대로 뚫고 지나가고,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천천히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베인 것은…… 나인가?”
감각의 검.
울티마 시스템으로 통합된 시로네와 아르망이 존재와 비존재라는 칼질에 의해 둘로 분리되었다.
시로네를 관통한 여자는 횃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다시 칼을 갈기 시작했다.
“가라. 조금 더 살 수 있을 것 같구나.”
“어떻게 나가는지 모르는데요?”
“거짓말. 이미 알고 있잖아?”
시로네는 나가기를 머뭇거린 이유를 깨달았다.
“저기……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진심이었다.
“난 존재가 아니야. 개념이지.”
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너의 어떤 것도 삼켜 주마. 강해져라.”
그녀의 정체를 물어보는 것조차 상처가 될 것 같아서, 시로네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이곳을 나가면 끔찍한 공포가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더 이상은 두렵지 않았다.
‘기다려라!’
시로네의 단호한 시선이 얇은 막 너머에 있는 공포의 군주를 겨누었다.
박지薄知.
공포의 군주 (3)
존재와 비존재.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따로 규정되지만 박지감은 그것을 오직 하나의 동전으로 인식할 뿐이다.
소세계창유의 세계가 걷히면서 공포의 군주 이고르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살아 있지?”
지평선을 가득 채운 이고르가 동시에 한목소리를 내는 광경은 실로 흉흉했다.
하지만 시로네는 지금의 상황을 만들어 낸 라 에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면 세계의 사단장인 이고르마저 설계하에 두고 있다는 것은 라 에너미의 숙원이 예상보다 훨씬 거대함을 뜻했다.
“이번에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청염의 창이 또다시 공간을 가득 채우며 밀려들었으나 시로네는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이런 거였구나.’
최초에 등장한 이고르가 창을 바닥에 내리꽂았을 때부터 동전이 뒤집어진 상태였던 것이다.
‘다시 뒤집는다.’
창이 지나가면서 시로네의 얼굴을 터뜨리고 몸통과 사지가 꿰뚫렸다.
하지만 마치 수면에 비친 달처럼 파문이 일렁이더니 육체가 금세 복구되었다.
‘이곳은 내 마음속.’
물론 예상하고 있었지만 짐작을 하는 것과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제7감으로 느끼는 이고르의 실체가 마치 손으로 물체를 움켜쥐었을 때처럼 선명했다.
“나약한 존재여!”
이고르가 미친 듯이 창을 던졌으나 더 이상 시로네에게 닿지 않았다.
금강태의 정신은 분명 비존재의 영역.
하지만 시로네는 정신을 육체처럼 통제할 수 있었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스피릿 존의 강화 범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만 사라져라.”
시로네가 손을 내밀자 헤일로가 탄생하더니 오색찬란한 섬광이 비수처럼 날아와 100퍼센트의 정보를 순식간에 꽂아 넣었다.
“크아아아아!”
완벽한 원의 존재감에 압도당한 이고르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고, 마력 증폭 장치로 강화된 포톤 캐논이 퉁 하고 진동하며 아타락시아를 통과했다.
세계가 백광으로 물드는 가운데 이고르의 비명이 아련하게 멀어졌다.
아아아아…….
그들이 있던 공간이 축소되면서 시로네의 마음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고, 이면 세계에 있는 시로네의 망막에서 흐르는 사건들 또한 사라졌다.
“…….”
잠시 눈을 깜박거린 시로네는 여태까지 싸웠던 전장을 확인하듯 가슴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바닥에 청염의 창이 꽂혀 있었고 이고르가 침묵을 지킨 채 말에 앉아 있었다.
“창을 뽑아. 여기서는 너 또한 소멸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할 거야.”
“카르 데 수마(유일하다).”
이고르의 오른손이 천천히 창을 움켜쥐었다.
“앙케 라(라는).”
“그가 나에게 공포를 심으라고 지시했지? 내 과거를 지배하기 위해.”
거핀은 분명 헥사에게 원인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서 시로네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기억에 담아 두고 있는 것일까?
이고르가 말했다.
“라 에너미는 과거에만 존재하는 사건일 뿐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이면 세계의 경계마저 허물 만큼 위험하지. 우리는 공간의 동반자이지만 결코 만나서는 안 되는 적이기도 하다. 네가 사라지면 라 에너미도 사라질 것이다.”
이고르가 친히 시로네를 제거하기 위해 등장한 이유였다.
“그럴 수도. 하지만 존재의 영역이 지배당하면, 결국 이쪽 세계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그렇겠지.”
“동료들을 풀어 줘. 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까.”
이고르는 시로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라를 막는 것이 가능한가?”
“가능해서 하는 일이 아니야.”
“라 에너미는 결국 세계의 경계선을 허물 것이다.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나?”
간섭만이 가능했던 무수한 비존재들이 진짜가 되어 세상을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하긴, 지금의 상황만 봐도.’
나름대로 단련한 용병들조차 과거의 트라우마를 강제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경계가 무너져 이고르가 세상으로 풀려난다면 그곳이 어디든 하루 안에 지옥이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피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잖아? 막지 못하면 결국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신중하게 고민하던 이고르가 품속을 뒤지더니 작게 빛나는 푸른 불꽃을 꺼냈다.
“공포를 이긴 자여, 징표를 받으라.”
이고르가 손을 내밀자 푸른 불꽃이 꽃씨처럼 날아와 시로네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제7감으로 받아들이는 푸른 불꽃은 존재의 세계에서 목걸이의 형태였다.
“공포가 있는 곳에 내가 존재하리니.”
공포의 군주 이고르의 목걸이.
시로네가 박지감을 통해 목에 걸자 아르망이 즉각적인 신호를 보냈다.
-신규 뇌파 감지. 공포를 수반하는 일련의 정신 작용에 대한 마비.
공포를 강제로 없애는 효과였다.
라 에너미에게 과거를 지배당할 뻔했던 시로네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그것이 너와 나의 위치를 규정할 것이다. 때가 되었을 때 나를 찾아오라.”
죽은 말을 돌린 이고르가 나타났을 때처럼 공간을 수직으로 열고 사라졌다.
이고르의 능력이 해제되자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난 대원들이 신음 소리를 내다가 실신했다.
반면에 핵심 멤버들은 이고르가 사라진 것으로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해치운 건가?”
“어, 그게…….”
시로네가 대답하려는 그때, 바깥에서 샤갈의 목소리가 들렸다.
“죽어라아아아!”
이어서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엄청난 속도로 울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조물 밖으로 나갔다.
“저건?”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난 쿠안과 샤갈이 엄청난 무용을 자랑하며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샤갈이군.”
루피스트의 말에 에텔라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저자가 스승님을…….’
과연 실력 자체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진짜였다.
천국 멤버 중에서도 수위권을 다투는 쿠안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움직임, 특히나 수십 개의 단도를 동시에 다루는 저글링 실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저자가 스승님을!’
하지만 그것이 카르시스의 대주교를 살해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잡겠습니다!”
승낙을 구하지 않고 에텔라는 몸을 날렸다.
어설픈 실력이라면 두 검사의 간격에 휘말리는 순간 목이 달아나겠지만 그녀는 상식을 초월한 동선의 틈새를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복수는 하지 않겠어!’
이를 악문 에텔라가 음양파동권을 퍼부었다.
‘하지만 해명은 해야 할 겁니다!’
측면에서 느껴지는 투기에 샤갈의 시선이 돌아갔다.
눈보다 빠른 손이 먼저 움직이고, 세 자루의 단도가 이빨처럼 위아래로 교차하며 그녀의 팔뚝에 속사검을 박았다.
찰나의 순간에 무려 7개의 껍질이 팔뚝에 박혔으나 핏물은 역류하지 않았고, 에텔라는 더욱 깊숙이 파고들어 정권을 내질렀다.
‘공진타법.’
샤갈이 눈을 부릅뜨며 허리를 뒤로 빼내자 주먹이 스치고 지나갔다.
공기의 진동이 복부를 강타하자 폐가 짓눌리면서 눈이 크게 뜨였다.
“크윽!”
이어지는 쿠안의 연격까지 회피하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리고 간격을 벌릴 수밖에 없었고, 10미터를 물러서자 미리 끌어당긴 수십 개의 단도들이 딸려 왔다.
‘뭐야, 갑자기?’
비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이고르가 사라지고 다시 피가 끓는 시점에서 방해를 받은 게 불쾌했다.
“너부터 죽여…….”
손을 쓸어 단도를 낚아챈 샤갈이 에텔라를 돌아보는 순간, 그의 얼굴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 창백해졌다.
오감 전체를 동원한 전투였기에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
하지만 눈에 들어온 그 얼굴은 안경 하나를 제외하면 모든 것이 익숙한 기억 속의 모습이었다.
“티아?”
샤갈의 표정이 너무나 기괴했기에 쿠안조차 검을 내리고 에텔라를 돌아보았다.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뇨.”
에텔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으나 샤갈은 일말의 의심도 할 수 없었다.
“티아, 어째서 네가?”
단지 형태의 문제가 아니다.
설령 그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100명이 서 있어도 그 안에서 진짜를 고를 자신이 있는 샤갈이었다.
눈이 아닌 마음이 말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죽었는데.’
그녀의 차가운 시체를 직접 끌어안고 울부짖지 않았던가.
오감으로 느끼지 않았던가!
“킁킁! 킁킁!”
사건의 향수를 맡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지만 통속의 뇌에 갇힌 상황에서는 후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티아가…….’
어떻게 생겼더라?
머리가 핑 하고 돌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왜 저래?”
혼자서 비틀대는 모습에 쿠안이 투덜거리는 그때, 에텔라가 다시 돌진했다.
‘놓칠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