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03
손등의 뼈부터 시작된 골절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스밀레. 스밀레.
또다시 들리는 환청에 이어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이 퍽 소리를 내며 파열되고 왼쪽 안구가 짓뭉개지면서 광대뼈 쪽이 날아갔다.
마침내 에너지빔이 소멸했다.
“흐으으으…….”
생화의 요격을 정면으로 받아 낸 리안의 입에서 귀신 같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를 기점으로 에너지빔이 갈라지면서 도시에 광활한 두 갈래 길이 생긴 것으로도 그가 감당해야 했던 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리, 리안…….”
시로네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로에게 리안의 경지에 관한 얘기는 간단히 들었으나 고대 병기를 맨몸으로 막아 내고 살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망상처럼 느껴졌다.
“리안! 죽으면 안 돼!”
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죽으면 안 되지.”
대직도의 손잡이를 힘차게 짓누르며 몸을 세운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내가 죽기 전까지, 절대 너는 못 죽어.”
한쪽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짓고 있는 리안의 얼굴이 빠르게 복구되어 갔다.
스밀레. 스밀레.
여전히 들리는 환청을 무시하며 리안은 대직도 이데아의 상태를 살폈다.
‘정말 대단하군.’
수많은 적들을 벤 검이지만 이토록 막강한 위력 앞에 노출된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파괴되지 않는 오브제답게 칼날에는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언제까지 환청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상관없는 일이었다.
시로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설령 이번이 마지막이었어도 거리낌 없이 뛰어들었을 테니까.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클럼프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직도를 등에 꽂자 시로네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리안? 정말로 회복된 거야?”
“보다시피, 문제없어.”
리안이 엄지를 치켜드는 순간 주먹이 명치를 때렸다.
물론 근육의 장벽에 막혀 충격은 없었으나, 시로네는 그것이 더욱 짜증 났다.
“이 멍청아! 그런 무모한 짓을 하면 어떡해? 저게 뭔지 몰라서 그래? 고대 병기란 말이야!”
“그 고대 병기를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건 너잖아?”
“응?”
시로네가 눈을 깜박거렸다.
“반격을 준비하고 있는 걸 봤어. 처음부터 피할 생각이 없었던 거지? 네가 시간을 벌어 주지 않으면 폭발에 휘말린 자들이 전부 죽었을 테니까.”
루피스트라면 어리석다고 말할 테지만 시로네도 양보할 수 없는 지점이라는 게 있었다.
“맞아. 임무도 중요하지만 내가 꾸린 용병대고…….”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너의 검으로서 그저 따르면 그만이야.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지키지 못하는 것만큼 기사에게 수치스러운 일은 없다는 거야.”
리안이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이라고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관철시킬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이 바로 기사의 신념.
어쩌면 리안은 시로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사람이 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안해, 리안.’
시로네의 생각을 읽은 듯 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라둠의 핵심부를 가리켰다.
“가자. 여행을 계속해야지.”
라둠의 비밀 (3)
***
고대 병기 생화.
광자를 수집하여 스스로 몸체를 키우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모방한 전략적 방어 무기.
땅에 내린 뿌리만으로 라둠 전체에 전력을 공급할 정도로 강력한 동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아인종 최대 연합체인 스펙트럼의 간부들이 머무는 요새로 사용되고 있었다.
베네치아가 라둠을 떠나면서 4개의 의지가 놓인 원탁에는 전투부, 방위부, 내정부 장관 3명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빈자리에 앉아 있는 라 에너미의 존재를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스펙트럼의 내정부 장관, 순혈의 뱀파이어 라이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흑발을 말끔하게 뒤로 넘긴 미남자였는데, 분을 바른 듯 창백한 얼굴에 매기처럼 넓적한 입술이 선명하게 붉었다.
“왕국이 결단을 내렸군. 예상했던 일이지. 마법협회장이 직접 왔다는 건 의외지만.”
“루피스트는 강한 인간이야.”
스펙트럼의 방위부 장관, 화花족 플라리노가 말했다.
속눈썹이 유난히 길고 붉은 입술은 미끄러질 듯 번질번질했으며 몸에서는 화학적 가공품이 아닌 생생한 꽃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화족의 선조는 4만 년의 시간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연꽃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화신술을 구사하는 뛰어난 종족이지만, 지금은 전 세계를 통틀어 개체 수가 채 30명이 되지 않는다.
이토록 심각한 인구 멸종 위기를 맞게 된 이유는 종족의 고유한 특징인 ‘극단적 수동성’ 때문이었다.
반려자를 고르는 본능이 없는 그들은 유전자 레벨에서 모든 종족의 욕망에 순응하도록 되어 있다.
그들에게 우연한 접합이란 아름다운 확률이고, 어떤 씨앗이든 소중하게 품는 지고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고 특유의 소유욕과 독점욕에 점차 시들어 가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또한 위험한 인간이지. 가올드보다 더 최악이야.”
미케아 가올드가 협회장으로 있을 때는 라둠에 대한 압박이 그리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피스트는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런 보수적인 인간하고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멍청한 짓이지.”
스펙트럼 또한 조직이 보유한 채널을 통해서 토르미아 왕국을 압박했으나 가올드가 저지른 사고가 너무 컸다.
“상관없어. 이제는 우리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바슈카를 탈환할 기회.”
얼굴 반쪽이 파충류 같은 비늘로 덮여 있는 남자가 말했다.
스펙트럼의 전투부 장관, 용마인 드락커.
용마인은 드래곤의 생체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인류로, 창조주인 드래곤은 그들을 실패로 간주했으나 그럼에도 여타 아인종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무력으로 수많은 지역을 점령해 나갔고 마침내 하나의 종족으로 자리 잡았다.
“베네치아는 어리석었어. 피할 수 없다면 이용하면 되는 것을.”
라이카의 말에 플라리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인간을 전복시킨다.”
드락커가 빈자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도 그걸 원하고 있는 거겠지?”
3명의 머릿속에 라 에너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기억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
“조슈아! 정신 차리게, 조슈아!”
어깨를 흔드는 느낌에 천천히 눈을 뜬 조슈아는 곧바로 상체를 세우고 활을 겨누었다.
학습된 동작이었으되 화살을 메기는 것만은 놓쳐서 빈 활이었으나, 카르긴도 그런 걸 생각할 정신이 아니었다.
“워, 워! 침착해! 나야, 나라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두 손을 들고 있는 카르긴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가 정신을 되찾고 활을 내렸다.
“어떻게 된 거지?”
“폭발에 밀려서 날아온 모양이야.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고.”
카르긴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아마 자신도 그럴 거라 생각하며 조슈아가 땅을 짚었다.
“내가 찾아볼게. 아욱!”
아픈 표정을 지은 그녀가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에 카르긴이 그녀의 발목을 살펴보았다.
퉁퉁 부운 채로 비틀려 있었다.
“이런, 부상당했군. 나도 정신이 없다 보니.”
회복 마법을 시전하자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아파!”
“조금만 참아. 금방 고칠 수 있을 게야.”
회복 마법은 자생력을 높이는 고속 활성화 계열과 세포를 빠르게 수복하는 재생 계열로 나뉘는데, 카르긴의 전공은 후자였다.
“내가 재생 전문이라는 것에 감사하게. 이래 봬도 소싯적에는 신의 손이라는…….”
“닥치고 치료나 해. 가뜩이나 정신 사나우니까.”
대놓고 무안을 주는 조슈아였으나 속정이 들었는지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분은 걸리겠는데?”
재생 계열이라도 골절을 치료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너무 늦어. 우리가 어디에 떨어졌는지도 모르는데…….”
주위를 둘러보는 그때, 길목 쪽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킥킥킥! 찾았다, 찾았어.”
조슈아는 앉은 자세에서 활을 겨누었다. 이번에는 화살을 메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방에서 나타난 고블린들이 민첩한 몸놀림에 어울리는 살벌한 무기들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제길! 숫자가 너무 많아.”
화살촉에는 화염 속성의 마정탄이 장착되어 있었으나 예순 마리가 넘어가는 적들을 해치우기란 역부족이었다.
“꾸룩꾸룩! 기다려! 여자는 우리 차지다!”
뒤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카르긴이 마법을 시전한 채로 고개를 쳐들자, 돼지의 얼굴에 대형 도끼를 들고 있는 피두족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젠장!”
두 종족 모두 육식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에게는 끔찍한 존재였다.
고블린 연합 스피드킬러는 피두족 연합 광종이 먹잇감을 가로채려는 게 못마땅했다.
고블린들의 잔인한 눈빛을 대변하듯 리더인 마르타가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안 돼. 두 인간 모두 우리 차지다. 얌전히 물러나면 다리 한쪽은 주지.”
“끄륵끄륵! 다리 한쪽으로 배가 부를 것 같아? 우린 잔뜩 굶주렸다고!”
피두족 리더인 푸고가 강하게 항의했으나 마르타는 상대의 간절함이 즐거울 뿐이었다.
“킥킥킥! 그거야 너희들 사정이지. 우리가 먼저 발견했잖아? 억울하면 빨리 달리든가.”
화살 한 발에 의지한 채로 조직 간의 대치를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쩌면 일이 잘 풀릴 수도.’
고블린과 피두의 감정을 자극하면 도망칠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을 조롱하듯 피두가 끔찍한 제안을 했다.
“꾸룩꾸룩! 그렇다면 너희들의 방식으로 하자! 그러면 불만 없겠지?”
“호오? 고블린의 방식이라. 네까짓 게?”
마르타가 칼날이 달린 쌍절곤을 어깨에 걸치며 눈을 빛냈다.
“좋아. 잡은 놈이 먹는다.”
“고기다! 고기!”
마르타의 말을 신호탄으로 사방에서 고블린과 피두가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조슈아의 화살이 쏘아지면서 마정탄이 폭발했다.
“이야호오!”
사방으로 흩어진 고블린들은 호전적인 성격답게 먹잇감의 저항마저 즐겼다.
“내장은 내 거! 눈알도 내 거야!”
“나는…… 크헤헤헤헤!”
카르긴이 조슈아를 붙잡고 순간 이동을 시전했으나 땅속으로 파고들지 않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키키키, 도살 직전의 인간은 돼지보다 역겹지.”
“돼지라고 부르지 마! 꾸룩꾸룩!”
순간 이동으로 움직이는 중에도 조슈아의 사격은 정확했으나 고블린의 타고난 신체 능력은 사족 보행의 맹수와 맞먹었다.
“꾸워어어어!”
계속해서 밀려드는 광종의 멤버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리자 순간 이동의 섬광이 휘어지듯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고블린의 공격까지 피할 수는 없었고, 결국 반복 강박이 깨지면서 두 사람이 바닥을 굴렀다.
“흐으으윽!”
30퍼센트 가까이 회복시켜 놓았던 조슈아의 발목의 상태가 악화되자 카르긴의 얼굴에 혈색이 사라졌다.
“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스피드킬러와 광종의 멤버들이 반원을 그리며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 가지 약속하지. 절대로 죽이지 않을 거야. 먹기만 할게.”
두 사람의 표정 변화를 확인한 마르타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푸하하하! 저 얼굴 보여? 저것들 완전히 질렸어.”
조슈아를 안고 있는 카르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지?’
살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밥 먹듯이 했으나, 막상 죽어야 할 때가 되자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망쳐.”
조슈아가 시위에 연막탄 화살을 메기며 말했다.
“타이밍을 맞춰서 순간 이동으로 빠져나가.”
“하, 하지만…….”
카르긴은 필생의 용기를 쥐어짜 내 물었다.
“자네는 어떡하고?”
그러게, 나는 어떡하지? 라는 대답이 나올까봐 두려웠다.
“어차피 끝난 삶이야. 레오가 죽었을 때부터.”
감히 사랑했다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귀여운 꼬마아이였다.
엄마, 엄마 하고 웃을 때는 잠시나마 비참한 인생도 잊을 수 있었다.
“얘들아! 식사 시간이다!”
고블린과 피두가 경쟁하듯 달려드는 그때, 조슈아가 연막탄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
카르긴이 순간 이동으로 날아오르고, 생애 최고의 집중력으로 칼날을 피해 적들의 반경을 벗어났다.
“꾸룩꾸룩! 쫓을까요?”
“됐어! 여자부터 차지해! 저게 더 맛있다!”
마지막 발악이 흔히 그렇듯 조슈아는 다리가 부러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몸을 날려 가진 마정탄을 아끼지 않고 쏘아 보냈다.
퍼어어엉! 퍼어어엉!
폭발음이 점차 멀어질수록 카르긴의 달리는 속도도 줄어들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마리앙을 그렇게 잃어버리고 평생을 절망 속에서 살지 않았던가?
‘돌아가자. 이 나이에 내가 살아 봤자 얼마나 더 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