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04
조슈아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여전히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흐으으으!”
죽고 싶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이라도, 비겁자의 멍에를 짊어지더라도 살고 싶었다.
카르긴은 두 다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야!”
다리가 부러질 듯 아팠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학대하며 고통을 받는 게 죽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으아아! 제발 움직여! 움직이라고!”
‘무사히 탈출했을까?’
화살통이 텅 비었고 발목은 극심하게 뒤틀렸다.
혼자서 서른 마리 이상의 적들을 처치한 데다 기묘한 전략으로 광종의 리더인 푸고까지 제거했다.
그녀의 인생에서는 신기록이었으나, 남은 것은 응당한 보복이었다.
“순순히 죽여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마르타의 눈은 살기로 충만했고, 리더를 잃은 광종의 멤버들도 그녀를 씹는 상상을 하며 침을 흘리고 있었다.
‘한 발은 아껴 둘걸.’
적어도 저들의 이빨보다는 화살촉이 나을 테니까.
“다리부터 끊어.”
지시를 받은 고블린이 키만 한 언월도로 조슈아의 다리를 내리치려는 그때.
“이 흉악한 놈들아!”
모두가 뒤를 돌아보자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카르긴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으아아! 차라리 날 죽여라, 이놈들!”
백발을 산발한 채로 뛰는 모습에서 이미 정신이 나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르타가 발을 걸자 그의 몸이 우당탕 구르며 조슈아에게 처박혔다.
“뭐 하는 거야, 이 영감탱이야! 와서 뭘 어쩌겠다고!”
“흐윽! 이렇게는…….”
카르긴이 눈물콧물을 쏟아 내며 말했다.
“이렇게는 못 살겠어.”
“…….”
그저 죽을 곳을 찾아왔다는 어리석은 말 앞에서, 조슈아는 자신 또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크크! 뭐야, 이 녀석? 기껏 살려 줬더니 사지로 걸어와? 그렇게 우리에게 먹히고 싶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카르긴은 또다시 정신이 들었다.
대체 몇 번이나 정신이 들어야 사람 시늉이라도 내며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다행이군. 여자 하나로는 부족했는데.”
“얘들아, 고기 잔치다!”
스피드킬러를 제치고 퉁퉁한 피두가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꾸에에에! 팔뚝은 내……!”
그리고 다음 순간, 섬광이 날아오더니 펑 하고 얼굴이 폭발했다.
“뭐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찾았다, 리안! 이쪽이야!”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시로네가 2층 건물의 옥상에서 리안을 부르고 있었다.
“흑! 흐윽!”
조슈아의 눈에 비로소 눈물이 맺히고, 자신도 모르게 존칭이 튀어나왔다.
“대장님!”
라둠의 비밀 (4)
“저 녀석은 또 뭐야?”
스피드킬러와 광종의 멤버들이 불쾌한 시선으로 시로네를 쏘아보았다.
대체 몇 번이나 식사를 방해받아야 하는 것인가?
피두의 머리를 일격에 날린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이미 이성을 상실했을 터였다.
“조슈아 씨, 카르긴 씨. 괜찮아요?”
적들이 지척에 있는 상황이었기에 두 사람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로네는 조슈아의 발목이 뒤틀려 있는 것을 확인하고 마르타와 눈을 마주쳤다.
‘역시 저 녀석이…….’
여기에서 가장 강력한 아인종이었다.
“물러서라.”
“뭐? 물러서? 너 정신이 어떻게 됐냐?”
인간보다 공포를 느끼는 역치가 월등히 높은 고블린은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겁을 먹지 않는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두고 양보할 리가 없잖아?”
한때는 플루에게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겠냐고 물었던 시로네였다.
당시에는 자신의 이상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그녀의 답변이 야속했으나,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너희들도 똑같은 생명이다.”
마르타가 모욕을 당한 듯 인상을 구겼다.
“무의미한 살생은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싸우지 않고 동료를 구할 수 있는 방법도 모르겠어.”
“그래서 어쩌라고? 살려 달라고 구걸이라도 하게?”
“도망쳐라.”
시로네의 손바닥 위에 포톤 캐논이 떠올랐다.
“그걸로 공평하다.”
“쿡쿡쿡쿡!”
마르타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어이, 인간. 너 이런 거 처음 해 보지?”
시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뭐 드래곤이라도 되는 줄 아냐? 고블린과 타협할 수 있는 종족이 세상에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그냥 싸워. 죽든 살든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마르타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고블린의 똥이나 되어라.”
스피드킬러와 광종의 멤버들이 동시에 달려들자 조슈아를 끌어안은 카르긴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야아압!”
건물 위에서 기합 소리가 들리더니 쿵 하고 맨몸으로 중력을 이겨 낸 리안이 대직도를 휘둘렀다.
피두족 네 마리가 통째로 잘려 나가자 마르타가 혀를 차며 쇄도했다.
“저건 또 뭐야?”
땅을 구르며 발목 쪽을 노리는 고블린 특유의 검술이 펼쳐지자 리안이 황급히 스텝을 밟았다.
‘확실히 빠르다. 이것이 고블린.’
속도만 따졌을 때는 스키마를 압도했다.
“타하! 타하! 타하!”
앞구르기를 하며 연속으로 베고 들어오자 리안이 대직도를 손목으로 휘돌리며 반격에 나섰다.
“킥킥! 느려, 멍청아!”
가로로 베이는 대직도를 피해 바닥을 구른 마르타가 리안의 발목을 노리는 순간.
“응?”
상식을 파괴하듯 검의 궤적이 휘어지더니 역수로 붙잡은 대직도가 정확히 몸통을 콱 내리찍었다.
“크아아악!”
벌레처럼 바닥에 찍힌 상황에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휘두르는 중에 궤적이 바뀌는 검술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바퀴벌레 잡기 힘드네.”
신적초월로 검의 흐름을 강제로 역류시킨 리안이 두 팔에서 전해 오는 뻐근한 통증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마르타아아아!”
리더가 죽었으면 겁에 질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고블린들의 전투력은 더욱 가파르게 상승했다.
“수백 번 찔러 주마!”
호기롭게 외친 것이 무색하게, 사방에서 밀려들던 고블린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특유의 녹색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면서 시체와 흡사한 연보랏빛으로 변했다.
“저, 저게 뭐야?”
손을 내밀고 있는 시로네를 중심으로 풍경이 지옥처럼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현실의 세계와 또렷하게 경계선을 이루는 풍경 안쪽으로 건물들이 심장처럼 뛰는 것이 보였다.
“나와라, 이고르.”
그리고 그 지옥의 세계에서 죽은 말에 앉아 있는 공포의 군주 이고르가 창을 늘어뜨리며 걸어 나왔다.
“라크타스 사가아르 베로 뎀.”
특유의 멘트를 내뱉은 그가 청염의 창을 바닥에 내리꽂자 푸른 전격이 동심원을 그리며 펼쳐졌다.
“끄아아아아!”
고블린과 피두의 망막에 내면에서 탄생한 기억의 풍경이 빠르게 흘렀다.
원체 호전적인 종족이기에 그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인간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으아아아! 차라리 죽여! 죽이란 말이야!”
막 태어났을 무렵 리더가 장난으로 고문을 가했던 기억이 현실의 고통으로 뇌리를 스쳤다.
“제기랄! 왜 이딴 게 보이는 거야!”
어떤 고블린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의 눈꺼풀을 긁어 대자 핏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세상 잔혹한 짓들을 재미삼아 하는 종족이 눈을 파낼 정도의 광경이 무엇인지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영겁의 시간이지만 실제로는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트라우마의 환영.
결국 공포에 굴복당한 아인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저, 저럴 수가.”
카르긴과 조슈아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여태까지 자신들을 고작 음식으로 취급하며 낄낄대던 것들이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했잖아, 도망치라고.”
시로네의 주위로 호밍 포톤 캐논이 떠올랐다.
시커의 레이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하나씩 목표물을 포착하는 것과 동시에 무서운 속도로 휘어져 들어갔다.
펑! 펑! 펑! 펑!
“빛이 휘어지고 있잖아?”
고블린과 피두가 머리에 철구를 맞은 듯 뇌수를 쏟으며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던 카르긴이 입술을 깨물었다.
‘차원이 다르다. 우리 같은 길바닥 출신이 싸울 수 있는 전장이 아니었어.’
어째서 10만 골드였는지,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적들이 전멸한 전장을 자랑스럽게 내려다보던 이고르가 시로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주 부르는군.”
이면 세계라고 해도 공간의 영역은 현실과 똑같기에 라둠을 벗어나면 만나기 어려울 터였다.
“들어가. 농담할 기분 아니야.”
카르 수치 90퍼센트의 마법사의 마법에 자비란 있을 수 없지만 감정은 여전히 인간의 것이었다.
“……그쪽 세상의 일이니.”
박지의 감각을 외면하자 이면 세계가 다시 닫히면서 이고르의 모습이 사라졌다.
무상심의 호흡법으로 마음을 안정시킨 시로네가 건물에서 뛰어내려 카르긴과 조슈아를 돌아보았다.
새삼 알게 된 사실은, 전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시로네가 자리에서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다리는 좀 어때요?”
“아…… 괜찮아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참으세요. 일단 다른 대원들을 찾으러 가죠. 그다음에 치료를 하는 게 좋겠어요.”
언제 적들이 다시 나타날지 모르기에 시로네가 몸을 돌리는데, 카르긴이 초조하게 눈을 굴렸다.
“저기…… 대장님.”
시로네가 돌아보자 카르긴이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이마를 내리찍었다.
“부탁드립니다!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조슈아가 황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지만 그녀 또한 울먹이며 고개를 돌리는 카르긴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함께 가고 싶다는 절박함이 읽혔다.
‘살고 싶은 거구나.’
죽을 만큼 살고 싶었다.
“받은 돈은 다 토해 내겠습니다! 위약금도 내겠습니다! 제발 저와 조슈아를 보내 주십시오!”
어차피 용병대를 조직한 이유는 루피스트를 비공식적으로 라둠에 침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용병들 또한 죽음을 각오하고 합류한 것이기에, 이제 와 빠져나가는 것은 계약 위반이었다.
“한번 배신한 용병은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떻게 위약금을 갚을 거죠?”
“그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에 순순히 보내 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시로네의 차가운 대응에 피가 마르는 그때, 조슈아가 부러진 발목으로 기어 와 납작 엎드렸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서 갚겠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살고 싶습니다.”
‘흐음, 사기 문제도 있을 텐데.’
리안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어차피 판단은 시로네의 몫이었다.
‘나는 뭐, 계속 싸울 거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만 생각하면 되는 검사의 인생 또한 축복받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안이 두 사람의 면을 위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자 시로네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가세요.”
승낙이 떨어지자 카르긴과 조슈아가 번쩍 고개를 쳐들어 시로네를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인자한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난의 감정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었다.
“라둠을 무사히 나가게 되면 브룩스 씨를 찾아가 계약서를 새로 쓰세요. 의뢰비도 돌려주시고요.”
여기서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찬 카르긴이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애써 차갑게 몸을 돌린 시로네가 건물 위로 날아오르며 리안에게 말했다.
“가자.”
빠르게 멀어지는 시로네를 따라 벽을 밟으면서 건물을 올라간 리안이 옥상에 착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