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08
“이야아아아!”
리안은 멈추지 않고 키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풍경이 마치 양탄자처럼 구겨지며 밀려드는 것은 키도의 인지능력을 파괴하는 동작에서 비롯되는 디나이의 특징.
“우아아아!”
하지만 키도 또한 호전적인 고블린의 투기를 드러내며 앞으로 돌진했다.
짧은 순간에 수십 합이 치러지고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고블린 창술-백팔번뇌.
좌우의 칼날이 거의 동시에 밀려드는 것도 모자라 잔상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퍼졌다.
하지만 리안의 동작 또한 그에 준하는 속도로 움직여 칼날을 튕겨 냈다.
‘이건 도대체…….’
참마도 크기의 검이 잔상을 일으키자 피리 소리마저 강풍에 파묻혔다.
완력은 차원이 달랐고, 손이 으스러질 듯한 충격에 키도가 몸을 웅크리며 바닥을 굴렀다.
“키이이이이!”
괴성을 지르며 리안의 발목을 노렸으나 이미 그는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걸렸구나!’
벌레처럼 땅에 사지를 붙인 키도가 착지 지점을 향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그럼에도 이족 보행보다 빠른 속도였고, 정확한 타이밍에 몸을 웅크리며 칼날 지옥을 펼쳤다.
“뭐……!”
빠르게 돌고 있는 키도의 시야 속에서 리안이 여전히 허공에 못 박힌 채로 버티는 게 보였다.
‘마법?’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왜 안 떨어져? 설마?’
중력을 초월했다.
모든 생물의 어머니인 대지의 품을 벗어나 이상을 향해 날아가는 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을 타고 전율이 치솟았다.
‘벤다!’
신적초월의 의지가 율법에 디나이를 적용시키자 리안의 등 뒤에 있는 하늘이 둘로 쪼개지며 밀려들었다.
“크으으으!”
황급히 회전을 멈춘 키도가 사력을 다해 몸을 밀어내자 그가 있던 자리에 대직도가 벼락처럼 떨어졌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을 내며 땅이 갈라지고, 자욱한 흙먼지를 뚫고 리안이 튀어나왔다.
“잠깐! 멈춰!”
키도가 소리쳤으나 이미 결심을 끝낸 리안의 의지는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시로네!”
그렇게 소리친 키도가 대직도를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를 만나야…….”
여전히 혀가 움직인다는 사실로 살아 있음을 깨달은 그가 살며시 눈을 뜨자 칼날이 코앞에 멈춰 있었다.
‘살아서 다행이지만, 이걸 멈췄다고?’
막대한 힘의 관성을 부정한 리안의 팔뚝에서 뚜두둑 근육이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로네가 뭐?”
리안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키워드였고,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에 안도한 키도가 땅에 주저앉았다.
“후우, 이게 마하의 능력이었군. 스키마도 없어서 만만하게 봤는데 완전 괴물이었잖아?”
대직도의 칼끝이 키도의 배를 짓눌렀다.
“다음 발언까지만 들어 보도록 하지.”
“시로네에게는 내가 필요해.”
숨 고를 틈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나도 시로네가 필요하고.”
“……무슨 헛소리야?”
“시로네는 라 에너미를 찾고 있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스피드킬러도 탈퇴하고 여기에 있는 거잖아.”
그러고 보니 키도는 혼자였다.
“그 말을 날더러 믿으라고? 너 또한 스펙트럼에 소속되어 있을 텐데. 라 에너미를 따르는 게 아니었나?”
“사정이 복잡해.”
키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 그는 진짜가 아니야. 사건으로만 존재하지. 물론 나에게도 찾아온 적이 있어. 고블린의 왕, 더 나아가서 인간의 왕이 되게 해 준다고 그랬어. 하지만 거절했다.”
“어째서? 너희들이 바라는 게 그거잖아?”
“놈이 내 누이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리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방금까지 라 에너미는 사건으로만 존재한다더니, 이제는 누이를 죽였다고?”
“먹는다.”
키도가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구멍을 가리켰다.
“누이가 죽은 뒤에, 나는 누이의 시체를 먹었다.”
고블린 사회에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어떤 생물을 먹으면 그 생물의 기억이 떠올라. 전부는 아니고, 특정한 몇몇 기억들 말이야. 나는 이것을 ‘기억의 맛’이라고 불러.”
리안은 천천히 대직도를 거두었다.
“처음에는 고블린은 원래 그런 줄 알았어. 그래서 별생각 없이 살았지. 사람도 먹고, 뭐 이것저것 먹었어. 그러다가 알게 되었지.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휘파람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고블린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키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누이를 먹었을 때, 그녀의 기억 속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존재는 라 에너미였다. 방법은 모르지만, 끔찍한 절망 속에서 쇼크로 죽은 것 같아. 누이를 죽인 이유는 아마도 내 분노를 끌어내기 위해. 하지만 보다시피…….”
키도가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흔해 빠진 고블린이 아니지.”
“그래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가능하면 그러고 싶었어. 하지만 어차피 그것 또한 내가 먹은 어떤 생물의 감정일 거야. 고블린은 복수하지 않으니까. 그러다가 너와 시로네에 대해 알게 됐다.”
위그의 살점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다시 너의 살점을 먹어서 시로네와 라 에너미의 관계를 알게 되었지. 그 기억에 의하면 현재 청각, 촉각, 후각이 라둠에 모여 있다. 그리고 내가 미각에 해당하는 존재라면…….”
아마도 확실할 것이다.
“라 에너미는 무언가를 설계하고 있는 거야. 변수를 충돌시켜 특정 패턴의 사건을 유도하는 거지. 그렇다면 우리가 모인 것 또한 필연이라고 할 수 있어. 오감 중에 시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해.”
“흐음, 그러니까 변수가 충돌해서…….”
‘이해 못 했군.’
키도가 설명을 접고 본론을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야. 라 에너미가 설계한 대로 살아가느냐, 그것을 거부하느냐.”
화신을 깨달은 키도에게 자유의지를 되찾는 것이란 생명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후자를 택하려면 일단 라 에너미가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지. 내가 할 수 있다.”
키도가 날카로운 이빨을 가리켰다.
“오감을 통해 라 에너미를 실체화하면, 내가 그것을 먹는다. 기억의 맛을 통해서 라 에너미의 설계도를 훔치는 거야.”
‘시로네에게 좋은 일이다.’
결정에 앞서 리안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위그의 시체를 돌아보았다.
‘질풍의 위그.’
비슷한 시기에 이름을 알린 검사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으나 시로네가 행하는 일에 있어서 사적인 감정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미안하다.’
전투에서 누가 먼저 잘못을 했는지 따질 만큼 유치하지 않다.
다만 같은 용병대로서 복수를 해 주지 못한 죄책감만은 가슴에 새겨야 했다.
‘지옥에서 보자.’
기사의 검은 오직 주군의 목적을 위해 쓰이는 법, 결정을 내린 리안이 키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와. 시로네에게 데려다주지.”
오감 발생 (4)
***
샤갈에게는 한 자루의 단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에텔라에게 가해지는 공격은 동시다발적이었다.
주요 장기를 보호한 채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에텔라의 팔다리에 수십 개의 칼집이 생겼다.
초인적으로 단련된 근육은 한 방울의 출혈도 용납하지 않았으나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스키마의 기능이 급격히 떨어지고 의식이 멀어지는 가운데, 샤갈이 짜증스럽게 발 차기를 가했다.
살을 파고들던 날카로운 공격 대신에 몸통을 통째로 밀어 버리자 에텔라가 뒤로 나자빠졌다.
“왜?”
잔혹하기로는 세계에서 백 번째 안에 들어가는 샤갈이지만 선천적인 사이코패스는 아니기에 속이 부글거렸다.
“왜 반격하지 않는 거야?”
풀잎 서커스단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다.
오감으로 느낀 명백한 기억을 부정당했음에도 아니라고 소리칠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오직 냄새만이 선명하다.’
그는 인간이 갖지 못한 초인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지만 사건의 향수는 시각적 정보를 전달해 주지 않는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기억만이 존재할 뿐, 깊게 들어가 보면 티아의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라파엘 대주교님은 당신을 죽이지 않았어요.”
생각에서 깨어난 샤갈이 쓰러진 에텔라를 노려보았다.
“그것이 스승님의 유언이라면, 저는 그것을 받들 겁니다.”
“유언? 죽이지 않아?”
샤갈이 성큼성큼 걸어가 에텔라의 목에 단도를 겨누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네 스승의 명예가 조금이라도 높아지나? 내가 죽인 거야. 세계 최고의 살인자인 나를 그가 굳이 살려 둘 이유가 뭐지?”
에텔라는 라파엘 대주교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악을 해치울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선이 되는 건 아닙니다.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에텔라는 고개만 돌려 샤갈과 눈을 마주쳤다.
“희생. 선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 악마저 끌어안을 수 있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의 가치라고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헛소리 집어치워.”
용서하며 살았던 적도 있었다.
다른 누군가도 자신을 용서했을 것이라 믿었기에.
하지만 언제나 잘못을 저지르는 쪽은 악이다.
모든 악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만이 세상을 정화시키는 길이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어떤 말씀을 남겼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기억나지 않아.”
샤갈은 목이 굳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요. 당신을 본 순간 깨달았으니까요.”
“무엇을? 너 따위가 나에 대해 뭘 알아?”
한시라도 빨리 이 여자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악을 죽이면 선의 세상이 오는 건가요?”
샤갈은 에텔라의 목에 단도를 짓누르며 거친 숨을 코로 내쉬었다.
“선과 악의 대결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모든 악이 선으로 돌아섰을 때에야 비로소 평화는 찾아오는 것. 스승님은 그 거대한 숙원을 전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샤갈의 목소리가 쥐어짜 내듯 새어 나왔다.
“아니야. 네가 뭘 알아…….”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인간이 착한 마음으로 돌아서면 마치 마법처럼 세상의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명백히 가능한 일.
또한 너무나 쉬운 일이건만, 어째서 인류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고 심지어는 불가능하다고까지 여기는 것일까?
“내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너 따위가 아냔 말이야아아!”
에텔라의 목을 붙잡은 샤갈이 단도를 역수로 쥐고 미간을 향해 내리찍었다.
-용서해라.
칼날이 에텔라의 눈앞에서 우뚝 멈췄다.
‘단장님.’
라이덴은 왜 죽기 직전에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뭘요? 뭘 용서하란 겁니까?’
샤갈은 다시 팔을 치켜들었다.
“으아아아아!”
-용서해야 한다! 샤갈!
“꺼억! 꺼억!”
누군가가 손목을 붙잡은 듯 팔이 내려가지 않았고, 샤갈은 눈물을 쏟으며 절규했다.
‘왜 죽였어요? 왜!’
라이덴은 모든 게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 버렸던 것일까?
그래서 제자가 그토록 사랑했던 티아마저 잔혹하게 세상에서 지워 버린 것일까?
‘이미 늦었어요!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요!’
에텔라에게는 거짓말을 했지만, 라파엘을 죽인 이후로 한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었다.
-되돌아오는 길은 자네의 뒤에 있다네.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아아!”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잃은 다음부터 수없이 많은 인간을 살해했다.
누구라도 악을 선택할 수 있기에, 선악에 관계없이 모든 가능성을 멸했다.
“그런데 가짜라고? 티아는 없었다고? 내 모든 인생이 허상이었다고?”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야! 티아는 진짜야! 내 인생도 진짜야! 나는 살인마! 악 중의 악이다!”
단도를 집어 던진 샤갈이 에텔라의 위에 올라타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티아잖아! 사실대로 말해! 네가 티아잖아!”
그녀의 입에서 그렇다는 말이 나오면, 지금 당장 지옥에 떨어져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뇨. 저는 당신을 몰라요.”
“닥쳐! 네가 티아야!”
샤갈은 티아에게 그랬듯 에텔라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래, 티아가 맞아.’
익숙한 침 냄새, 땀 냄새, 살냄새.
“빌어먹을! 왜 기억이 안 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