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09
오직 냄새밖에 없었다.
‘라 에너미.’
샤갈의 키스를 무방비 상태로 받아들이며, 에텔라는 섬뜩한 라의 의지를 떠올렸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지만, 당신의 생각대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티아! 티아!”
에텔라의 손에 네메시스가 끼워지더니 상상이 현실로 구현되었다.
“티…….”
놀란 표정의 샤갈이 상체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샤갈! 빨리 청소해! 2시간 후에 공연 시작이란 말이야!
-이야, 공중그네 실력이 많이 좋아졌는데?
풀잎 서커스단에서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샤갈, 이제부터 네가 에이스다.
가족처럼 소중했던 단원들, 티아, 관객들까지 인간의 모습을 한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시커먼 연기로 풀어진 채 하늘거리고 있었다.
“어어어어…….”
샤갈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고 눈이 위로 말려들었다.
“스승님은 저에게 아버지 같은 분이셨습니다.”
에텔라의 목소리에 의식을 붙잡은 샤갈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당신이 미워 죽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느끼는 그 증오의 크기만큼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분노에 먹히는 순간 선은 악에게 패하고 만다.
“그러니 돌아오세요. 돌아와서 모든 것을 되돌려놓으세요.”
넋이 나간 샤갈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돌아오라고?’
죽는 건 두렵지 않다.
에텔라가 선을 위해 어떤 고통도 감당할 수 있듯, 샤갈 또한 악의 극단에서 모든 걸 내려놓은 자였다.
‘그럴 수는 없어.’
대가를 치르기 전에 반드시 해야 될 일이 있었다.
‘죽여 버린다.’
자신의 인생을 철저히 농락한 라 에너미를 눈앞으로 끄집어내어 찌를 것이다.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찌르고!’
상상만으로도 분노가 증폭되어 손이 파르르 떨렸다.
‘죽인다! 죽여! 죽여 버릴 거야!’
“에텔라 선생님!”
시로네가 포톤 캐논을 연사했다.
벽이 함몰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었으나 이미 샤갈은 건물 위로 몸을 날린 뒤였다.
에텔라를 확인한 시로네의 눈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너! 선생님에게 무슨 짓을……!”
에텔라가 상체를 세우며 말했다.
“괜찮아요, 시로네.”
“선생님!”
“가게 내버려 두세요. 저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거기까지 들은 샤갈이 난간 위에서 살며시 고개를 틀었다.
“……이름이 뭐지?”
“로미 에텔라입니다.”
“에텔라.”
티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다리지 마라. 나는 돌아가지 않아.”
말이 끝나는 동시에 샤갈의 모습이 사라졌다.
매섭게 옥상을 노려보던 시로네가 다시 표정을 풀고 에텔라에게 달려갔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스키마의 능력으로 버티고 있으나 당장 회복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깊었다.
‘에텔라 선생님이 이렇게 당하다니…….’
그러고 보니 모두가 죽어 있었다.
고블린, 피두, 투보는 물론 자신의 용병대원들까지.
‘이 많은 숫자를 혼자서?’
에텔라가 건물 벽에 기대앉자 생각에서 빠져나온 시로네가 물었다.
“선생님, 왜 그냥 보낸 거예요?”
“용서할 수 없는 자입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살생을 저지를 거예요.”
“그러면 더더욱…….”
“시로네 군도 이제는 깨닫고 있겠지요.”
시로네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에요. 인과의 바깥에 머물고 있는 누군가의 설계입니다.”
“라 에너미.”
에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거예요. 인류는 이미 라 에너미의 꼭두각시고, 어디까지가 진짜고 가짜인지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벌써 오감 중의 3명이 라둠에 집결했어요. 메이레이의 경우를 따진다면, 우주적 규모의 사건 조작이 가능한 능력자입니다.”
메이레이가 신탁 중에 꿈에서 깨어난 게 과연 우연이었을까?
인간이 꼭두각시에게 춤을 추게 하지만, 꼭두각시는 자기 자신이 춤을 추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솔직히 나조차 모르겠어요. 샤갈을 보낸 것이 순수한 내 의지인지 라 에너미의 설계의 일부분인지. 만약 샤갈에게 복수를 했다면 라 에너미의 설계에서 벗어난 사건이 될까요?”
결국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라 에너미는 여태까지 싸운 적과는 전혀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어요. 만약 그가 시로네 군을 죽이고 싶었다면, 그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렇겠죠.”
죽었을 것이다.
미로가 죽이든, 가올드가 죽이든, 세상 전부가 나서서 시로네를 죽이든, 그런 사건을 만들 능력이 있는 라 에너미였다.
“의도를 모르겠다, 이게 솔직한 제 판단입니다. 그래서 스승님도 샤갈을 죽이지 않았을 거예요. 라 에너미가 무엇을 노리는지 정확히 알기 위해 일단 죽어 보기로 결정한 것이죠.”
무상심의 극에 다다른 사람다운 판단이었다.
“저도 스승님의 유지를 따를 생각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라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지켜보면서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실체의 총합, 오감이 모두 모이면 분명 기회가 생길 거예요.”
“이길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인류는 라 에너미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나침반이 필요합니다. 감정이나 신념, 사건이나 변수를 떠나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카르.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에요.”
에텔라가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생화로 가세요. 설령 그의 설계하에 있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라 에너미를 만나는 겁니다.”
시로네는 생화를 돌아보았다.
라 에너미가 특정 감각에 두각을 드러낸 자들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되짚어 보자면 결국 올 사람은 오고 죽을 사람은 죽게 될 터였다.
‘용납할 수 없어.’
인간은 꼭두각시가 아니다.
“다녀올게요, 선생님.”
부상을 당하기는 했지만 에텔라라면 자신의 몸은 지킬 수 있을 터였다.
“절대로 꺾여서는 안 됩니다.”
미소를 지은 시로네는 사망한 용병대원들에게 잠시 묵념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시로네가 사라지자 에텔라의 표정이 다시 슬픔에 잠겼다.
‘스승님, 죄송합니다.’
증오한다고 말해 버리고 말았다.
의지를 깨고 나온 진심이었기에 두려웠고, 앞으로 들이닥칠 거대한 악과 싸울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가셔서는 안 됐어요. 저에게는 너무 큰 짐이에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진심으로 샤갈을 용서할 수 있을까?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는 에텔라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헌화獻花 (1)
스펙트럼의 공, 수, 정을 맡고 있는 삼三장관이 원탁에 모였다.
생화의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모아 수도를 타격하라는 지시를 내린 이후 라 에너미는 기억 속에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생화의 메인 시스템을 관리하는 방위 장관 플라리노가 말했다.
“최대 출력까지 13퍼센트 남았어. 앞으로 24분 후면 바슈카의 왕성은 토르미아에서 사라진다.”
내정 장관 라이카가 뱀파이어 특유의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굉장하군. 수십 년 동안 해킹하지 못한 핵심 코드인데.”
생화는 기본적으로 방어형 고대 병기지만 출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리면 왕성까지는 타격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수행하지 못한 이유는, 생화의 성장 초기에 왕국에서 암호를 걸어 두었기 때문이다.
“라 에너미. 진짜였다는 건가?”
핵심 코드를 해킹한 건 플라리노였지만 그녀 또한 라 에너미의 기억을 토대로 성공한 것이었다.
실체도 없고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그가 이 세상을 파괴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시점이었다.
“그런 건 상관없어. 핵심은 아인종이 인간의 왕국을 지배하는 것.”
전투 장관 드락커가 기운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용마인 특유의 투기가 발산되자 같은 장관인 라이카와 플라리노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슬슬 우리가 움직여야 되지 않겠어? 몇몇 인간이 이미 생화에 침투했어. 복잡해지기 전에 끝내자고.”
라이카가 플라리노에게 물었다.
“누가 들어왔지?”
“마법협회장과 비서실장. 협약은 깨졌지만 그 두 사람을 막아 내지 못하면 모든 게 물거품이야. 라 에너미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건 우리들의 문제라는 거겠지.”
“인간 따위.”
라이카의 몸이 검은 연기로 풀어지기 시작했다.
“금방 끝내고 오지.”
그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드락커도 테이블을 짚으며 일어섰다.
“나는 바깥을 처리하겠다.”
“내가 도와줄 건?”
드락커가 입꼬리를 올리자 파충류 같은 비늘이 씰룩거렸다.
“꽃이나 잘 지키고 있으라고.”
생화를 지키는 것도 그렇지만 그녀 또한 꽃이기에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타인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을 억제하는 경지까지 도달한 그녀지만 화족 특유의 감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화족은 자신을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렇게 태어났기에 나쁜 기분은 아니었으나, 인간의 소유욕은 여타 생물과 비교했을 때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꽃을 지킨다.’
플라리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각오를 다졌다.
‘꽃을 지킨다.’
***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생화에 침투한 제인은 메인 시스템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은폐 시설의 모든 전력이 나간 것으로 그녀 또한 스펙트럼이 수도를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내가 해내야 해.’
스피릿 존으로 정신이 연결된 아리아의 상태가 조금씩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그녀가 의식을 잃게 되면 핵심 코드의 열람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옳은 선택이었을까?’
만약 루피스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뺨이라도 걷어붙였을 터였다.
‘협회장님.’
루피스트와 일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가 마법사로서 정치계에 입문했을 때 면접을 통해 보좌관으로 취직한 그녀였다.
그녀 또한 마법사라는 것이 합격에 주요하게 작용했겠지만, 처음부터 매끄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시민사회에서 너무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어요. 특히나 국방비 증강이란 목적으로 과도한 세금을 매기는 것에 고위 귀족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추진해. 필요한 일이야.”
루피스트는 사족을 붙이지 않는 성격이었고, 제인은 열정으로 충만했다.
“그래서 수정 안건을 작성해 봤습니다. 일단 상승 세율을 1.3퍼센트 정도로 맞추고 누진세율이 적용되는 귀족들을 대상으로…….”
“더럽게 말 많은 계집애군.”
서류를 넘기던 제인의 손이 우뚝 멈추고, 굳은 표정의 그녀가 되물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죠?”
테이블 위에 팔을 올린 루피스트가 제인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더럽게, 말 많은, 계집애라고.”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던 그녀가 눈에 불을 켜며 따지고 들었다.
“계집애? 지금 저더러 계집애라고 하셨어요?”
“그래. 그게 뭐?”
“명백한 여성 비하 발언입니다! 국정감찰부에 고발하겠어요! 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정중하게 사과하지 않으면 언론에 공표하겠습니다! 남녀 차별 성향을 가진 정치인이 어떻게 국정을 운영하고……!”
“해.”
루피스트가 말을 끊었다.
“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하지만 그거 아나? 너는 이 시간부로 해고야.”
제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 이런 부당한 처사는…….”
“너랑 일하기 싫어. 그러니까 나가. 꺼지라고.”
씩씩 콧김을 내뿜는 제인의 눈에 눈물이 가랑거렸다.
서류철을 바닥에 내팽개친 그녀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세게 문을 닫고 나가자 루피스트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그날 저녁, 일을 끝마친 루피스트가 코트를 걸치고 왕성을 나섰다.
‘내일은 보좌관을 새로 뽑아야겠군.’
잡일을 해 줄 사람이 없으니 평소보다 피로도가 심했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