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10
왕성의 출입구 밖에서 제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판 뜨자는 눈빛이었고, 루피스트를 보자마자 성큼성큼 다가와 내뱉었다.
“야!”
“야?”
“그래, 야! 이제 내 상관도 아닌데 뭐 어때? 왜? 기분 나쁘냐?”
“너 술 마셨냐?”
“아니, 이제부터 마실 거거든! 그만둘 때 두더라도 얘기 좀 하자. 너의 썩어 빠진 정신 상태를 고쳐 놓지 않고서는 이 나라가 걱정돼서 잠이 안 와.”
“그럼 자지 마.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루피스트가 지나치려는데 그녀가 옆으로 움직여 길을 가로막았다.
“가긴 어딜 가? 제대로 사과는 해야 될 거 아냐?”
“사과할 짓 하지 않았어.”
“아, 그래?”
제인이 작심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모두 여기 좀 보세요! 이 정치인이 오늘 여성을……!”
“미쳤어? 뭐 하는 짓이야?”
루피스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흥! 사람들이 아는 건 무서운가 보지?”
“무서운 게 아니라 쪽팔리잖아.”
“그럼 쪽팔려.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꼴통도 이런 꼴통이 없었다.
“알았어. 가. 가자고.”
“진작 그럴 것이지.”
까불지 말라는 듯 어깨를 휘돌린 그녀가 술집으로 앞장서자 루피스트가 뿌드득 이를 갈며 뒤를 따랐다.
그로부터 2시간 후, 고주망태가 되어 버린 제인은 풀린 눈으로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너 진짜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러다가 친구 1명 안 남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루피스트는 시간을 확인했다.
“늦었어. 그만 돌아가지.”
자전을 느끼는 듯 제인의 상체가 빙글빙글 돌았다.
“네가 가자면 내가 가야 돼? 어? 네가 짱이냐?”
제인이 루피스트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툭툭 밀었다.
“네가…….”
다시 관자놀이에 검지를 댄 제인이 온 힘을 다해 밀었다.
“짱이야?”
고개가 돌아간 루피스트가 덤빌 듯 제인을 노려보며 이빨을 깨물었다.
“그만 술 좀 깨. 정신 계열 마법사잖아.”
“싫은데? 난 취할 건데? 계집애가 술 마셔서 싫어?”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것도 몇 번이나.”
“마안하다고 말하면 다야? 내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어쩔 건데?”
제인이 답답한 듯 가슴을 때렸다.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러다가는…….”
신이 시간의 악보에 도돌이표를 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일부터 다시 출근해.”
제인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식으로…….”
“계집애라고 안 하고, 여성차별 안 하고, 네가 건의한 안건도 검토해 볼 테니까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그녀의 제안에도 일리는 있었다.
테이블에 머리를 콩 하고 찍은 그녀가 루피스트를 돌아보았다.
배시시 웃는 입가에 비로소 비꼬는 감정이 사라졌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너 진짜 부하 직원 잘 뽑은 거야. 어디까지 갈까? 국방부 장관? 마법협회장? 그래, 마법협회장이 좋겠다. 내가 마법협회장 만들어 줄게.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 마법협회장 만들고 만다.”
“그만 일어나자.”
제인을 부축한 루피스트가 직원에게 방을 요청했다.
아예 몸을 들고 3층으로 올라갈 때까지도 제인은 인사불성이었다.
“으음, 내가 만들 거야.”
방에 돌아온 루피스트가 쓰러지듯 제인을 침대에 눕히자 그녀가 목을 끌어안았다.
“어디 가? 못 가.”
“취했어. 그만 자. 아니면 정신 차리든지.”
정신 계열의 마법사라면 스위치 한 번으로 말끔해질 터였다.
“헤헤, 싫은데?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잖아?”
“내일 후회할 거다.”
제인이 씁쓸한 눈웃음을 지었다.
“뭔들 후회 안 하겠어?”
“…….”
다음 날 아침, 술이 완전히 깬 제인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옆을 돌아보니 어느새 몸을 씻은 루피스트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기억력은 천재적으로 좋아서 어제 있었던 일들이 선명하게 뇌리를 스쳤다.
‘미쳤나 봐, 미쳤나 봐, 미쳤나 봐!’
제인이 양손으로 뺨을 두드렸다.
상관이랑 하룻밤을 보내다니.
앞으로 업무를 하면서 얼마나 어색할지 생각하면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회중시계를 주머니에 넣은 루피스트가 문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먼저 나간다. 30분 뒤에 출근해.”
“저기……!”
루피스트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러니까, 아시죠? 이건 실수, 아니 사고예요. 앞으로 절대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알아. 너나 나나 끝장이지.”
루피스트가 문을 닫고 나가며 말했다.
“스캔들 터지지 않게 조심해.”
흐트러진 채로 멍하니 지켜보던 제인이 밉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루피스트의 말투를 따라 했다.
“스캔들 터지지 않게 조심해.”
그러고는 문을 향해 중지를 치켜세웠다.
“하여튼 차갑기는.”
이불을 젖히고 알몸으로 나온 그녀는 창문 앞에 서서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어디 보자, 오늘 일정이…….”
새롭게 떠오른 오늘의 태양처럼, 마치 첫 출근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랬던 적도 있었지.’
오래전의 추억을 떠올린 제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워낙에 철두철미한 두 사람이었기에, 10년 넘게 일하는 동안 두 번 다시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정치인과 보좌관으로 각자의 활동에 충실하며 화살처럼 빠른 세월을 지나 여기까지 왔지만 루피스트의 심기를 거스를 때면 제인은 가끔씩 그날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우리보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면 많이 어렸네요, 협회장님.’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야.’
뭔들 후회하지 않겠는가?
계속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그때, 통로 끝에서 기묘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뭐지?”
시커먼 어둠이 불길하게 꾸물거리더니 점차 형태를 갖춰 나가며 색감을 되찾기 시작했다.
‘뱀파이어.’
“여기까지 들어온 건 칭찬해 주지.”
순혈의 뱀파이어 라이카가 뒷짐을 지며 다가왔다.
“인간을 너무 과소평가했어. 나도 감이 많이 둔해진 모양이야.”
라이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섬뜩한 기운이 벽처럼 밀고 들어왔으나 제인의 임무에 후퇴란 용납되지 않았다.
“국왕 폐하의 명이다. 오늘부로 생화의 통제권은 토르미아 왕국이 갖는다. 순순히 항복하고 왕의 명을 따라라.”
어느새 냉철한 마법사로 돌아온 제인이 촉수형의 스피릿 존을 움직이며 라이카를 위협했다.
“흥, 여태까지 키워 줬더니, 이제는 가져가겠다고?”
“어차피 알고 있었잖아? 여태까지 설치게 놔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나는 인간의 그런 점이 마음에 안 들어.”
라이카의 하체가 검게 물들더니 수백 마리의 박쥐로 변해 제인에게 날아들었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 착각하는 거 말이야.”
헌화獻花 (2)
***
광자를 흡수하여 자생하는 생화의 내부는 실제 식물의 세포처럼 두꺼운 철의 막으로 구획되어 있다.
광광물이라는 물질 자체가 생물의 유전적 메커니즘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장이 진행될수록 세포는 커지거나 분화한다.
또한 인간의 세포가 분열을 거듭하여 심장이나 간, 신경이나 뼈를 이루듯 복잡하고도 정밀한 장치까지 스스로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인간의 공학 지식을 까마득히 초월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루피스트가 생화의 조종실 앞에 도착했을 때 저절로 문이 열린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40평 넓이의 육각형 공간 안에는 수많은 전선들과 디스플레이장치, 고도로 정밀한 요격을 가능하게 하는 연산장치가 바쁘게 가동 중이었다.
루피스트는 플라리노를 지키고 있는 10명의 흑영인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이군, 플라리노.”
10년 전 토르미아 왕성의 비밀 채널을 통해 마련된 협상 테이블에서 마주한 적이 있었다.
“그래요, 루피스트.”
플라리노의 표정은 차가웠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군요. 당신만은 마법협회장이 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왕국에서 대표적인 극우파라 할 수 있는 루피스트가 왕국 권력의 중심을 잡게 된 것은 라둠의 아인종에게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상일이라. 그 말은 어폐가 있군. 누군가가 실패하기에, 누군가는 성공하는 게 아니겠나?”
좌파의 핵심 인물로 분류되는 미케아 가올드가 정치인들의 우려 속에서도 협회장의 자리에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에 그는 천국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고, 라둠을 근간으로 하는 자국 내의 테러 문제는 부수적인 일에 불과했다.
“그래서 기어코 꽃을 꺾겠다는 건가요?”
수십 년 동안 키운 생화를 송두리째 왕국에 넘겨준다는 생각에 플라리노는 속이 쓰렸다.
“아니. 이게 얼마짜린데 쉽게 꺾어?”
루피스트가 스피릿 존을 펼치며 강철의 전지를 끌어 올렸다.
“뿌리까지 뽑아 가야지.”
“장관님을 지켜라!”
여성으로 이루어진 흑영인 부대가 그림자가 있는 곳으로 산개했다.
흑영인의 회색 피부는 어둠 속에서 투명해지기에 요인 경호에 탁월하다.
또한 여성의 신체 능력이 남성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특징도 화족의 심리를 보호하기에 적합했다.
‘어둠의 술법.’
그림자가 물처럼 확장되면서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샤이닝 마법 따위는 삼켜 버리는 위력에 빛이 사라지고, 완벽한 어둠 속에서 몇몇 흑영인이 루피스트에게 접근했다.
‘최고의 경호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것.’
말 그대로 암살暗殺.
어둠에 완벽하게 동화되는 이퀄라이징을 자랑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스피릿 존의 공감각으로도 포착하기가 어려웠다.
‘죽였다!’
네 자루의 칼이 소리 없이 루피스트의 몸을 가르고 나갔다.
‘걸리는 게 없어?’
손끝의 느낌이 사라지더니 마치 블록이 분리되듯 신경계가 통제권 밖으로 이탈했다.
“멍청한 거 아닌가?”
수십 조각으로 분리된 흑영인들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칼에게 덤비면 어쩌자는 거야?”
철은 피해야 할 대상이지 공격의 대상이 아니다.
‘저 자식을……!’
동족의 죽음에 그림자에 숨어 있는 흑영인들이 피눈물을 흘렸으나, 결코 기척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기술적으로는 탁월하다고 할 만했으나 그들의 인내심까지 초인적인 것은 아니었다.
“죽여 버리겠다!”
남은 흑영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덤비려는 그때, 플라리노가 손을 들고 소리쳤다.
“그만두세요!”
“장관님! 하지만……!”
“루피스트는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저에게 맡기세요.”
강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강철의 마법사를 상대로 언제까지 버틸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생화의 통제권을 넘겨라.”
“제안을 하죠. 라둠의 아인종들이 거주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세요. 그러면 요격을 포기하겠습니다.”
“싫어.”
토르미아 왕국에 아인종을 위한 시설을 따로 세우려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제인이 해낼 것이다.’
루피스트는 제인의 능력을 신뢰했다.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피를 보겠다는 건가요?”
“평화?”
루피스트가 손바닥을 펼치자 칼날처럼 날카로운 금속질이 폭풍처럼 회전했다.
“너희들이 인간인 줄 알아?”
팔을 휘두르자 회색의 금속이 수은처럼 막을 펼치더니 플라리노의 목을 노렸다.
“장관님!”
흑영인이 그녀를 끌어안고 바닥에 쓰러지고, 공중에서 쪼개진 파편들이 폭발하듯 퍼져 어둠 속으로 침투했다.
비명 소리에 이어 남은 흑영인들의 시체가 그림자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당신과 뭐가 다른데!”
바닥에 엎드린 플라리노가 비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도 감정이 있고, 문화가 있고, 역사가 있는 존재야!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존재란 말이야! 그런데 왜 우리를 배척하려고만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