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11
“첫째, 너희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
루피스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둘째, 너희들은 인간을 낳지 않아. 법적으로 국가등록증 발급 대상이 아니란 얘기야. 노예 부역이나 공창에 편입시키면 단발적인 실효성은 있겠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너희들을 부양하는 건 결국 왕국에 짐이 된다. 애완용 개를 키우거나 가축을 사육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재정 낭비다.”
플라리노가 울먹거렸다.
“마지막으로 셋째.”
루피스트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세금을 납부하고, 아이를 생산하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우리 자랑스러운 토르미아 국민들은, 너희를 싫어해. 그러니까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라. 너희들이 없어지면 인간이 편하다.”
플라리노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지? 고작 그런 이유로…… 생명을 죽여도 된다는 거야?”
“고작 그런 이유?”
루피스트가 플라리노의 턱을 걷어찼다.
“장관님!”
유일하게 남은 흑영인이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충격에 떨리는 플라리노의 눈을 본 순간 흑영인은 루피스트에게 덤비기를 포기했다.
‘큰일이다. 수동성 욕구가 발현되고 있어.’
화족은 강하지만, 공격성을 타고나는 건 육식을 하는 식물처럼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피나는 단련을 통해 타인의 욕망을 거부할 수 있게 된 플라리노라도 마법협회장의 권위 앞에서는 한 떨기 꽃에 불과했다.
에너지 출력장치의 디스플레이로 향한 루피스트가 취소 버튼을 누르자 코드를 요구하는 창이 떴다.
입맛을 다신 루피스트가 다시 플라리노에게 다가가며 칼날의 폭풍을 만들었다.
“사지부터 잘라 내 주지.”
“네 이놈!”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마지막 남은 흑영인의 얼굴이 칼날의 폭풍에 갈려 옆으로 떨어졌다.
“편하게 죽고 싶으면 코드 내놔. 고문은 전공이 아니지만 장담하건대 너는 1분도 못 버텨.”
이성이 날아갈 정도로 두려웠다.
“얼마나 많은 화족이 희생당했는지, 당신은 알고 있잖아.”
화족의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인간에게 소유당하고, 질리면 팔아 버리고, 다시 새로운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그러다가 스트레스에 미쳐서 시들어 버린 게 우리야. 거리의 개한테도 측은함을 갖는 게 인간이잖아!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지 않는 거야!”
“알 게 뭐야, 너희들 사정 따위?”
플라리노가 서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자식의 목에 끓는 물을 붓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부모의 역사가 인간에게 없는 줄 아나? 우리라고 거저 얻은 게 아니야. 사람들은 언제나 불만투성이지. 평등은 요원하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하지만 이런 조잡한 시스템 하나 구축하는 데에도 수많은 인간의 희생이 뒤따랐어. 인간이, 오직 인간의 행복을 위해 만든 시스템이다. 그런데 뭐 하나 보탬이 되지도 않은 것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끼워 달라고?”
감정을 용납하지 않는 루피스트의 태도에 오히려 플라리노의 마음은 다시 차가워졌다.
“후회할 거야. 당신들의 이기심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보게 될 테니까.”
플라리노에게서 꽃의 화신이 피어올랐다.
화족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바이올렛 티아라의 혈통이 모습을 드러내자 방 안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가급적 생포해야겠지.’
어차피 제인이 알아서 처리할 테지만, 만의 하나를 위해서라도 플라리노는 살려 두는 게 좋았다.
‘생화가 파괴되는 것도 아까우니까.’
조종 장치가 망가지면 수리 보수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이었다.
“똑똑히 지켜봐.”
플라리노의 화신이 빛의 가루로 풀어지더니 마치 뉴런처럼 강렬한 빛을 발했다.
“인간에게 짓밟힌 꽃의 분노를!”
화신술-소세계창유.
***
“제인 씨!”
극심한 감염 증상을 앓고 있는 아리아가 상체를 펄떡거렸다.
정신 공명을 통해 제인과 연결되어 있는 머릿속으로 현재 그녀의 상태가 직접 겪는 듯이 전해져 왔다.
“무슨 일입니까?”
“뱀파이어예요! 강력한!”
쿠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제인 정도의 실력자를 몰아세울 정도라면 스펙트럼의 지도부에 있는 순혈의 뱀파이어 라이카밖에 없었다.
“쿠안 씨가 가 주세요! 제인 씨는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요.”
아픈 사람과 정신을 공명한 상태에서 라이카를 이기기란 힘든 일이었다.
“안 됩니다. 제 임무는 당신을 지키는 거예요.”
생화로 들어갔다가 아리아가 습격이라도 당하게 되면 코드는 사라진다.
수도 타격이 자명한 이상, 설령 제인이 죽더라도 아리아만큼은 지켜야 했다.
“하지만! 제인 씨는…….”
아리아를 살리기 위해서 쉬운 길을 포기하고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기에 죄책감이 심했다.
“제인 씨가 죽으면 그때 제가 당신을 데리고 생화로 갈 겁니다.”
차갑게 내뱉은 쿠안이 생화를 돌아보며 이를 까득 깨물었다.
‘부디 무사하기를…….’
***
시커멓게 풀어진 연기가 복도를 질주하더니 제인의 눈앞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돌변했다.
형태가 채 갖추어지기도 전에 라이카의 손바닥이 제인의 명치를 강타했고, 막대한 파동의 충격파가 몸을 관통했다.
“커억!”
육체는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지만 생명은 우주까지 날아가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쿵 하고 무릎을 찍은 그녀가 앞으로 고꾸라질 듯 휘청하더니 뒤로 넘어가 뒤통수를 찍었다.
“쓸데없이 끈질기기는.”
눈을 뜬 채 사망한 제인을 내려다보며 라이카가 혀를 찼다.
주위에는 그들의 수하인 뱀파이어들의 시체가 검은 연기로 풀어지고 있었다.
순혈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강력한 혼을 지닌 자들이다.
그런 뱀파이어를 무려 7명이나, 정신 지배를 통해 휘두른 제인의 실력을 폄하할 수 없다는 게 가장 기분이 나빴다.
“어쨌거나 끝냈으니.”
라이카가 망토를 펄럭이며 돌아서자 그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씨!
사망한 제인의 뇌에 아리아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제인 씨! 제인 씨!
‘임무.’
죽어 있던 동공에 미약한 생명의 빛이 깃들기 시작했다.
심장은 뛰지 않았지만 뇌사 상태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20초 정도가 남아 있었다.
‘협회장님.’
뒤늦은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고, 제인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죽어 가는 뇌로 집중하는 것도 놀랍지만, 마법사에게 가장 어렵다는 자해의 경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바람의 마법을 손끝에 모은 그녀가 배를 찔러 심장을 직접 움켜쥐었다.
‘아직은 죽을 수 없어!’
정신 계열의 마법인 정신 초월을 시전하자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근력이 작용하며 심장을 수축시켰다.
“으윽!”
혈액이 순환하면서 조금씩 신체 기능이 되돌아왔으나 심장의 수축력은 여성의 악력으로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생화의 통제권을 되찾아야 돼.’
손목의 근육이 파열되는 기분을 느끼며, 제인은 복도의 벽을 짚고 걸음을 옮겼다.
헌화獻花 (3)
***
‘빗줄기가 세지고 있어.’
광익을 펼친 시로네는 생화를 향해 최고 속도로 내달렸다.
은폐 시설의 모든 장치들이 가동을 멈췄기 때문에 그들의 막강한 대공방어망도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뭔가 이상한데?’
울티마 시스템으로 느껴지는 생화의 상태는 가히 폭풍이 오기 전의 밤이었다.
고요하게 정지한 것 같지만 직지의 눈을 통해 바라본 거대한 철의 탑 내부에서는 수많은 에너지들이 신경처럼 어지러이 돌아다니며 생화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전력 풀가동.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거야.’
생화의 인풋과 아웃풋의 메커니즘을 따른다면 강력한 에너지 빔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설마, 수도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이것이야말로 루피스트가 희생을 감수해 가면서까지 최대한 생화에 접근하려고 했던 이유였다.
“시로네 오빠.”
순간 이동으로 시로네의 뒤를 따라잡은 메이레이가 젖은 몸으로 나란히 비행했다.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어느 정도 안면을 익혔다고 생각한 시로네가 말을 편하게 하자 메이레이도 수줍게 웃었다.
일단은 그녀도 마법사지만 전투 요원으로 분류할 만큼 실력이 탁월한 것은 아니다.
동료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미 죽었을 가능성도 생각한 시로네였다.
“운이 좋았어요. 적들이 없는 지역에 떨어졌죠.”
“신호는 어때?”
메이레이가 한쪽 귀를 막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요. 계속 확인하고 있지만 흔한 노이즈조차 없어요. 이건 확실히 이상하죠.”
라 에너미가 더 이상 지시를 내리지 않고 있다는 얘기.
‘이미 설계가 끝났다는 것인가? 아니면…….’
시로네가 생각에 잠기는 그때, 건물을 뛰어넘으며 두 사람이 다가왔다.
“리안. 어라?”
뒤를 따라오고 있는 고블린에 눈길이 갔다.
‘안경 쓴 고블린은 처음인데?’
시로네와 메이레이가 멈추자 키도가 날렵한 동작으로 공중제비를 하며 옥상에 착지했다.
“후우,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
갖은 폼을 잡으며 시로네의 앞에서 다리를 구부린 키도가 안경을 누르며 웃었다.
“저기, 그런데 누구세요?”
리안과 함께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적이 아니라는 건 믿을 수 있었다.
“스피드킬러의 총대장.”
장난스럽게 말한 키도는 시로네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이었던 고블린, 키도다.”
“어떻게 된 거야?”
시로네가 고개를 돌리자 리안이 다가와 설명했다.
이미 에텔라와의 대화를 통해 라 에너미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납득은 빨랐다.
“그렇구나. 미각에 해당하는…….”
“그런 셈이지. 이쪽은 청?”
키도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가리키자 메이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이로써 촉, 청, 미가 모였군. 하지만 라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후가 필요해.”
“샤갈은 이미 생화에 들어갔을 거야. 우리도 시간이 없어.”
시로네가 몸을 돌리려는데 키도가 손을 내밀었다.
“잠깐. 그 전에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
모두가 키도를 돌아보았다.
“어떤 제안?”
“괜찮다면 너희들을 먹어도 될까?”
먹는 것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시로네와 메이레이의 기억도 알아 두는 게 좋았다.
“나는 상관없지만.”
시로네는 메이레이를 살폈다.
살점을 먹는 정도라면 시로네의 경우 아르망이 치료해 주겠지만 그녀는 회복할 수단이 없었다.
메이레이가 오른쪽 귀를 만지며 말했다.
“귀를 자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른 신체 부위는 전투력의 손실을 가져올 거예요. 귀가 없으면 신의 주파수의 기능도 강화될 테니까요.”
키도가 멍하니 입을 벌렸으나 시로네는 극구 반대했다.
이미 실버링 길드에서 테스트를 치를 당시에 논의가 끝난 사안이었다.
“그건 최후의 수단이야. 한 가지 감각으로 라 에너미를 잡을 수 없다면 의사소통의 기능도 중요해.”
키도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굳이 신체 부위가 아니라도 체액이면 충분하니까. 또한 특정 기관에 각인되어 있는 기억이 아니면 어디를 먹어도 전이되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어.”
리안이 조금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먹을 필요는 없다는 거군.”
“후후, 그게 내 능력의 장점이지.”
고블린은 폭식을 하는 종족이지만 먹을 수 있는 객관적인 양은 인간보다 적었다.
“좋아, 그럼 내 피를 줄게.”
시로네는 왼쪽 손바닥을 길게 베어서 피를 떨어뜨렸다.
신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키도는 고개만 쳐들어도 마실 수 있었다.
“흐음. 흐으으음.”
혀를 굴리며 피 맛을 음미하던 키도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렇군. 너, 굉장히 흥미로운 인간이구나?”
“너도 만만치 않은 것 같은데?”
“킥킥킥! 이 정도로 놀라면 곤란하지.”
허파를 들썩거린 키도가 메이레이에게 말했다.
“고블린은 매너가 없지만 그래도 여성에게 상처를 입히기는 싫은데. 살을 째기 싫다면 침을 넘겨줘도 좋아.”
무표정하게 키도를 바라보던 메이레이가 손목을 내밀었다.
“피로 할게.”
얼굴에 잠시 실망의 기색이 스쳤지만 키도는 어느새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다가갔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날카로운 송곳니로 손목을 깨문 키도가 쭉 하고 입술을 흡착시키자 그녀의 피가 넘어왔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면서 어떤 특정 기억이 전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