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14
“가라. 상층의 씨방으로 가서 생화의 씨앗을 탈취해. 현재 플라리노가 장악하고 있지만 울티마 시스템이라면 문제없을 테지.”
“하지만…….”
“시간이 없어.”
루피스트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시로네는 논쟁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가자, 메이레이, 키도.”
그렇게 통제실을 나선 시로네가 울분을 터뜨렸다.
“냉혈한이야.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
시로네의 옆으로 달려온 키도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 시로네.”
“10년 넘게 같이 일을 한 사이잖아. 그런데 저런 식으로 매도를 해? 나라면 절대로 그렇게 못 할 거야.”
“너는 알아차리지 못했냐?”
시로네가 의아한 눈으로 키도를 돌아보았다.
“응? 뭘 알아차려?”
“저 협회장이라는 사람이 여자의 시체를 봤잖아.”
키도는 루피스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한 번도 눈을 깜박이지 않고 있어.”
“눈을?”
키도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자연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지. 물론 저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시로네가 바닥을 바라보며 달리자 메이레이가 말했다.
“어쨌거나 우리도 긴장하죠. 제인 씨가 죽은 것도 그렇지만 라 에너미가 침묵하고 있다는 것도 마음에 걸려요.”
키도가 콧잔등을 올렸다.
“은신한 거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잖아. 후각이 필요해. 탐색에는 그것만 한 게 없거든.”
“하지만 후각은 샤갈이라는 사람이에요.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요?”
“설득할 필요 없어.”
시로네가 말했다.
“네메시스를 가져갔다는 건, 결국 그렇게 된다는 뜻이니까.”
“…….”
운명의 실에 걸린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한편 루피스트는 시로네 일행과 반대 방향으로 통제실을 나섰다.
자동문이 열리고 복도에 들어서자 플라리노가 계단이 있는 쪽에 서 있었다.
“어때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기분이?”
루피스트는 등 뒤에서 밀려오는 이질적인 기운을 감지했다.
잠시 후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순혈의 뱀파이어 라이카가 퇴로를 차단했다.
“원시 코드를 입력해 생화를 되찾는다. 방법은 좋았어. 시도도 좋았지. 하지만 능력이 달리는 건 예상 못 했나 보군.”
비로소 뒤를 돌아본 루피스트의 눈은 감지 않은 채로 충혈되어 있었다.
그것이 더욱 즐거운 듯 라이카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이 손으로 끝장냈지. 정확히 끝장내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결과가 이렇게 되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어. 가장 고통스럽게 죽어 갔을 테니.”
루피스트는 불쾌하지 않았다.
그런 것 때문에 불쾌한 것이 아니었다.
“고통이 두렵다면 그런 멍청한 짓도 하지 않아.”
“크크, 역시 너도 인간이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리는데? 소중한 사람이었나?”
플라리노가 말했다.
“당신은 실패했어요. 생화의 통제권은 다시 나에게 넘어왔고 조만간 왕성도 파괴될 것입니다.”
루피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이제 그딴 건 상관없어.”
토르미아의 마법협회장이 얼마나 깐깐한 인물인지 알고 있기에 삼장관의 2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화가 났나 보죠? 당신도 결국 인간이군요.”
동정의 말은 아니었다.
플라리노가 원한 것은 루피스트가 자신과 똑같은 기분을 맛보고 똑같이 좌절하는 것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그 여자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보좌관이었고 비서실장이었지. 좀 엉뚱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이미 죽은 마당에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공기가 마치 중금속으로 변한 것처럼 무겁게 느껴지자 라이카와 플라리노의 얼굴이 굳었다.
“유능했다.”
외골수인 루피스트를 마법협회장까지 만들 정도로 수완이 좋은 여자였다.
“짜증이 나는 이유는 그것뿐이야. 그 유능한 계집애가, 교육에 얼마를 투자해도 거두어들일 확률이 거의 없는 그 재능이, 고작 아인종 버러지들 인생 때문에 소비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화가 나는 거라고.”
느낌을 넘어, 실제로 공기에 철분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배상할 거야? 그 여자가 살아서 해결해야 하는 수많은 난제들. 너희들 따위가 백 번을 죽어도 감당이 안 돼.”
“감히 뱀파이어를 무시해!”
연기로 풀어진 라이카가 돌진하고, 플라리노도 사방의 철벽을 움직여 압박했다.
“……철갑파.”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루피스트를 중심으로 공기가 파문을 일으키더니 철의 장벽이 퍼지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라이카가 반신반혼의 능력으로 철벽을 뚫고 들어왔으나 2차, 3차의 철벽이 탄생하면서 구역을 밀어냈다.
“흐으으윽!”
생화와 동화되어 있는 플라리노가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꺾겠다고? 당신에게도 소중한 꽃일 텐데?”
“물론 그렇지.”
고대 병기의 가치는 왕국 국력의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할 만큼 대단했다.
“그러게 적당히 설쳤어야지.”
철벽의 파동이 더욱 거세지면서 거대한 생화의 외벽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후회할 거야! 당신!”
루피스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지어졌다.
“뭔들 후회 안 하겠어?”
쿠구구구구궁!
태양 쪽으로 생장하는 생화의 진동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해지자 시로네 일행은 걸음을 멈췄다.
“뭐지?”
키도가 벽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기울어진다! 우리를 방해하는 건가?”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야.”
경사각이 20도를 넘어서고 있다.
생화의 높이와 무게를 고려했을 때 원상 회복이 거의 불가능한 정도였다.
-시간이 없어.
루피스트의 말을 떠올린 시로네가 퍼뜩 깨달았다.
“그렇구나.”
수도 타격을 염두에 두고 한 얘기가 아니었다.
“꺾어 버리려는 거야.”
“꺾어? 아직 씨앗도 얻지 못했는데. 그거 인간에게 중요한 거 아니었어?”
“네 말이 맞았어, 키도.”
언제부터였을까?
아마도 제인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이성을 잃었던 거야, 루피스트 씨는.”
제47차 철갑파가 내부 기재를 우그러뜨리며 줄기의 지름 절반 이상까지 뻗어 나갔다.
고대 병기의 내구력은 강철보다 높아서 저항을 이기지 못한 철벽의 파도가 소멸했으나 제48차, 제49차, 제50차가 끝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하찮은 인간이이이이이!”
무려 87차의 철벽을 관통한 라이카가 루피스트의 어깨를 붙잡고 이빨을 내밀었다.
‘한 번만 물면!’
마법협회장을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
“박쥐 따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루피스트는 그가 속한 사회의 시스템이 승인하지 않는 수치까지 마력을 끌어 올렸다.
강철 마법-금강해일.
초당 10회 파동을 일으키며 뻗어 나가는 강철의 파도 앞에 반신반혼의 육체가 쓸려 나가고.
“크아아아아아!”
“그만해! 이게 어떻게 가꾼 꽃인데! 당신 미쳤어?”
생화의 모든 스피커를 통해 플라리노가 전했다.
‘이성을 잃었다고? 천만에.’
그런 건 우리들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제인?’
생화가 멀쩡히 왕국에 인계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전략적 가치, 생화가 만들어 내는 씨앗의 천문학적인 가격, 거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잠재적 이익들.
‘내가 전부 감당하면 그만이야.’
고대 병기 따위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해져서 그 모든 손실을 역전시킬 것이다.
‘네 몫까지 싸워 주마.’
루피스트는 결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니 안심하고 잠들어라, 제인.’
마침내 제362차의 철벽이 생화의 외벽에 도달하고, 루피스트는 생애 최강의 힘을 개방했다.
‘이것이 바로…….’
철갑파가 외벽을 터뜨리고 튀어 나가면서 생화의 밑동이 완벽하게 분리되었다.
‘내가 네 무덤에 바치는 꽃이다.’
“꺄아아아아아!”
플라리노의 비명 소리가 입이 없는 생화의 고통을 완벽하게 대변하는 듯했다.
“떨어진다! 진짜로 해 버렸어!”
키도가 기울어지는 생화의 벽을 밟으며 뛰어다니고, 시로네와 메이레이가 무중력상태에 있는 것처럼 허공에 뜬 채로 출구를 탐색했다.
“저쪽으로 빠져나가자! 휘말리면 끝장이야!”
우주에서 추락하는 충격일 것이다.
“나는 못 날아!”
“내가 받아 줄게! 그냥 뛰어내려!”
시로네와 메이레이가 빠져나가자 키도가 울상을 지으며 몸을 날렸다.
“하여튼 미친 종족 같으니라고!”
쿠구구구구구구!
땅이 진동하는 것을 느낀 에텔라가 비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600미터 높이의, 세상에서 가장 비싼 꽃이 라둠의 남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인간은…… 인간.”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의 행복을 도모하는 존재.
꺾인 꽃은 시들어 버리지만, 그 꽃은 누군가의 무덤 앞에 놓여 죽음을 애도하고…….
우리는 그것조차 아름답다고 말할 것이다.
사건 발생 (1)
아주 먼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상하게 되면 시간의 정의는 무의미해진다.
너무 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인류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 시간대에서,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폭발이 일어났다.
감마 레이 버스트.
극초신성의 폭발은 태양이 100억 년 동안 발산하는 에너지를 일시에 뿜어내며 광속에 가까운 제트를 분출한다.
실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비록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시공간을 담고 있는 우주라는 배경마저 찢어 버릴 정도였다.
그리고 그 빛 없는 장막 너머에, 이 우주를 들여다보고 있는 하나의 눈동자가 있었다.
***
폭우는 약해졌지만 비는 여전히 라둠의 잿빛 풍경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이 붕괴된 폐허의 한복판에서, 드락커는 사지가 부러진 채 쓰러진 리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놈이야?’
잔해 더미에 파묻힌 그의 육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다시 일어서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스밀레. 스밀레.
끝없이 공명하는 환청을 들으며 리안은 대직도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나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활은 이제 익숙하다.
하지만 누구나 가능한 일은 아니기에, 익숙함이 오히려 거대한 생소함으로 밀려들었다.
육체가 부서지고, 또 회복되고.
‘처음부터 부서진 적도, 회복된 적도 없는 게 아닌가?’
꿈속에서 천 번을 죽어도 막상 눈을 뜨면 그런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이 모든 일들이 단지 하나의 착각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그만 생각하자.’
회복을 끝낸 리안이 대직도를 땅에 내리찍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정답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명줄이 질기다는 것은 인정해 주지.”
드락커가 성큼성큼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아마도 네가 이겼을 거야. 지금 싸우는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말이야. 그것이 너의 가장 큰 실패다.”
팔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면 어떤 적이든 제풀에 나가떨어지고 만다.
“용족은 체력에 한계가 없다. 네가 불사신이라면, 이곳에서 끝없이 파괴시켜 주마.”
용족은 무생물에 근접한 생명체로 알려져 있다.
“상관없어.”
리안이 대직도를 드락커의 미간에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