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18
루피스트가 생각에 잠긴 가운데 라 에너미가 말했다.
“드디어 왔구나, 시로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피리리리.
그때 검은 그림자가 피리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퍽 하고 핏물이 터진 뒤에야 라 에너미는 오른팔이 잘려 나간 부분을 살폈다.
“키도.”
시로네가 고개를 돌리자 라 에너미의 팔을 들고 있는 키도가 한쪽 발을 살며시 띄운 채로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킥킥킥, 스피드킬러에게 실수란 있을 수 없지. 이제부터 네놈의 기억을 샅샅이 파악해서…….”
“알았으니까 빨리 먹기나 해.”
초조해진 시로네가 다그쳤으나 예상과 달리 라 에너미는 웃음기까지 머금으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럼 어디.”
라 에너미의 팔을 물어뜯어 우물우물 씹기 시작하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키도의 목구멍으로 무언가가 꼴까닥 넘어갔다.
“흐음…….”
하늘을 쳐다보며 ‘사건의 맛’이 발동될 때까지 기다리던 키도의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어라?”
그리고 를 통해 라 에너미의 기억이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시로네의 눈이 충격에 흔들리고, 그런 시로네를 바라보며 라 에너미가 살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이것은 이야기.
완벽한 우연의 산물로 탄생한 어떤 존재의 비화이다.
“이, 이럴 수가…….”
라 에너미의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먼 시간대의 우주.
어떤 행성에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살고 있었다.
형태나 습성, 언어나 소통 방식은 인간과 전혀 달랐지만, 시로네 일행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으므로.
“나온다!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어! 조금만 더 힘내!”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한 생명체는 가족에게 1초의 기쁨도 전해 주지 못한 채 비극적인 삶을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갓 태어난 아이를 보고 부모는 오열했다.
돌연변이로 태어난 아이는 부모의 어느 것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 종족이 세상을 인지하는 모든 감각기관이 망가진 상태였다.
“왜 우리 아이야! 왜 하필 우리 아이야!”
그럼에도 부모는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 시점에서 시로네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미쳤어.’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는 아이였고, 심지어는 어떤 상태인지 짐작조차 불가능하다.
시각기관이 없기에 빛이 무엇인지 모르고.
-라 에너미는 장님이다.
청각기관이 없기에 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라 에너미는 귀머거리다.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맛을 느낄 수도 없으며, 신경조차 마비되었기에 소화기관의 움직임조차 감지하지 못한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렇게 자아는 어떤 특징도 갖지 못한 채 무無에 갇혀 비루한 삶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생각이라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시간은 무의미했고 광자계의 1초는 1만 년, 10만 년, 심지어는 1억 년의 길이까지 확장되어 가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단지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은 키도가 비명을 질렀다.
베네치아 또한 2개의 뇌를 죽여 버린 기억을 다시금 되새김질하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크으으으!”
그들보다는 정신력이 월등히 강한 시로네조차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필사적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답답하다.
너무나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다.
아마도 당시 그 아이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러한 성질의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1억 년은 10억 년이 되고, 다시 수백억 년으로…….
끝이 없는 시간의 확장 속에서 무無의 성질은 공허함을 견디지 못한 채 조금씩 뒤틀려 가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이에게 영양분을 제공하기 위해 찾아온 부모는 꽈배기처럼 뒤틀려 가는 아이의 육체를 보고 질겁하여 도망쳤다.
골격이 으스러지고, 애초부터 필요 없었던 기관은 소멸의 과정을 밟아 나갔다.
그는 점점 무작위의 어떤 형태, 기능미를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고깃덩어리로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광자계의 기준으로 40년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는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
침묵 속에서 세상은 그저 고요했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에 노화라는 기능도 없다.
오직 무의 개념을 담고 있는 부하되지 않는 알처럼 영원히 지속될 운명이었다.
그렇기에 완벽한 우연이었다.
동기도, 의도도, 목적도 없는 하나의 신호가 그의 세계에 미약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
고깃덩어리의 피부가 가로로 길게 찢어지면서 생애 처음으로 태동의 움직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의문.
분명 그것은 의문이었다.
가로로 찢어진 껍질을 활짝 열고 태어난 눈동자에 엄청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이어서 무지막지한 정보가 밀려들면서 무의 세계가 존재감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 세계를 우주라 불렀다.
-내가 존재다.
앙케 라(영원불멸의 라).
베네치아가 털썩 무릎을 꿇는 것과 동시에 현기증을 느낀 키도가 먹은 것을 토해 냈다.
‘이것이 바로…….’
라 에너미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것이 나다.”
키도는 모든 것을 토해 버렸으나 이미 소화되어 버린 육질에서는 새로운 기억이 전달되고 있었다.
어두운 공간 속에 실 끊어진 인형처럼 앉아 있는 라 에너미의 모습이 보였다.
‘이건 진짜다!’
사건이 아닌, 현실 어딘가에 존재하는 라였다.
“어디야? 어디에 있는 거야?”
“…….”
“대답해!”
쏟아지는 기억 속에서도 시로네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붙잡고 소리쳤다.
라 에너미가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나는 신이 될 거다.”
마침내 모든 기억이 전달되고 라의 진의를 깨달은 키도가 머리를 짚으며 소리쳤다.
“시로네! 위험해!”
루피스트가 인상을 찡그리며 스피릿 존을 펼쳤다.
‘빌어먹을! 이런 속셈이었군!’
인간의 몸으로 다시 앙케 라가 될 생각이었다.
전체의 개념으로도 신이 될 수 없다면, 가장 개성적인 존재로 탈바꿈하여 다시 도전하는 것이다.
‘결국 라 에너미라는 것은…….’
앙케 라가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태곳적부터 지금까지 겪어 왔던 사건의 총체였다.
1위. 라 에너미(19세) : 98.7퍼센트.
상아탑 테스트를 받아들이면서 확인했던 수치를 떠올린 시로네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거의 도달한 상태였던 거야!’
베네치아가 옳았다.
사건의 경험으로 쌓아 올린 98.7퍼센트의 카르 수치.
남은 1.3퍼센트의 조각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사건이 아닌 생생한 오감의 기억들.
키도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창을 휘돌렸다.
‘우리는 여기에 와서는 안 됐던 거야!’
시로네, 샤갈, 키도, 메이레이, 베네치아 5명을 통해서 라 에너미의 카르 수치는 100퍼센트를 향해 가고 있었다.
“죽여! 완성되면 끝장이다!”
완벽한 인간이라는 것은, 그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틀렸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반가웠다, 시로네.”
라 에너미가 손을 내밀자 공기의 장막이 벗겨지듯 풍경이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초超박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엄청난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몇 마리야?”
통으로 계산했을 때도 족히 1천 마리가 넘는 대군이었다.
목이 밧줄처럼 길고 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온 아귀들이 순식간에 풍경을 휩쓸었다.
“키아아악! 키아아악!”
‘광폭!’
빛의 장막이 시로네를 중심으로 폭발하자 아귀들의 팔다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라 에너미는?’
몸을 뒤트는 그때, 피처럼 붉은 검이 날아들었다.
“크윽!”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
탁한 음성이 울티마 시스템을 통해 해석되었다.
‘저건 또 뭐야?’
양쪽 관자놀이에 직각으로 뿔이 달려 있는 거구의 전사였다.
“절망의 군주 바르시바.”
시로네의 뒤편에서 풍경이 벗겨지며 이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이 대군은?”
“이쪽 세계도 사정이 있어서. 내가 맡겠다.”
이고르가 청염의 창을 꼬나 쥐고 튀어 나가자 바르시바가 대검을 휘두르며 맞붙었다.
피아가 뒤섞인 난장판을 지켜보며 시로네가 입술을 깨무는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헥사.”
신장 3미터가 넘어가는 회색빛 피부의 생물체가,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극히 어색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메이레이.”
딱히 다르게 부를 이름이 없었다.
“전투는 우리에게 도움이 안 돼. 이 순간에도 라 에너미는 오감을 수집하고 있다.”
“그럼 어떡하지? 우리가 죽어야 하나?”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하지만 테라포스는 질서를 수호하는 종족.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
“그럼?”
“라 에너미의 카르 수치를 일시적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하지만 너희들 세계에 닥칠 후폭풍이 상당할 거야. 인류의 대표자가 승인을 할지도 의문이고.”
“인류의 대표자가 누군데?”
“……없지.”
그렇기에 마지막까지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정한다. 헥사, 네가 인류의 대표자가 되어라. 그리고 승인하는 거야.”
“난 그럴 자격이 없어. 남들이 인정을 해 줄지도 의문이고.”
“상관없어. 인간의 문제가 아니니까. 테라포스 대법관의 규율이다. 종족의 대표자가 승인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이 방법은 사용하지 않아. 너는 자격이 있어. 결정해라.”
시로네는 아수라장을 다시 돌아보았다.
모두가 엄청난 무력으로 이면 세계의 군대를 처치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숫자는 더욱 불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끝난다.’
결정을 내린 시로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좋아. 내가 허락할게.”
“승인했습니다. 네, 발동하겠습니다.”
누군가와 교신을 하듯 중얼거린 메이레이가 무시무시한 빛을 망막에서 뿜어내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나는 테라포스의 대법관.”
창처럼 긴 손이 세상을 겨누었다.
“이제부터, 전 인류에 대한 심판을 시작하겠다.”
신의 눈동자 (2)
메이레이의 가늘고 기다란 몸에서 빛의 기운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하늘로 쏘아졌다.
그 빛의 기둥을 따라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올라간 그녀는 고무처럼 휘어지는 손가락으로 수인을 맺었다.
“저게 뭐야?”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그녀의 화신이 하늘 전체를 뒤엎을 정도로 거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