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19
테라포스 화신술-대자관세음.
일전 천국에서 사탄을 상대할 때 보여 주었던 미로의 화신술에 뒤지지 않는 크기.
부채꼴로 펼쳐진 정수리에 눈꺼풀이 없는 거대한 눈에는 지도가 비치고 있었다.
“이제부터 너희들의 선과 악을 구분하겠노라.”
테라포스는 질서를 수호하는 종족으로, 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시각 기능을 빼고 인간을 논할 수 없듯 테라포스에게는 소리야말로 이 세계의 진리이자 핵심.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시로네가 살고 있는 행성의 모든 소리가 메이레이의 귀에 수집되고 있었다.
“대법관의 지혜. 율법의 질서.”
메이레이의 두 눈에서 빛이 점멸하더니 현재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같은 기준의 잣대가 적용되었다.
선과 악의 숫자가 빠르게 집계되었다.
선 : 0명
악 : 8,724명
신의 주파수의 진정한 능력을 통해 30억이 넘는 마음의 소리가 대공명하며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야크마 공화국.
-오직 나만 우월하고 싶다. 모두가 나를 우러러봤으면 좋겠다.
-저 녀석은 글렀어. 실력도 없는 게 잘난 척이나 하고 말이야. 나 같으면…….
전 세계에서 동시에 누적되는 마음의 소리는 테라포스 대법관의 기준에 따라 엄청난 속도로 분류되었다.
선 : 1명
악 : 278,687명
북에이몬드 공화국.
-내 거야! 전부 다 내가 가질 거야!
-잔혹하게 짓밟아! 잘못을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내 잘못?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선 : 12명
악 : 4,562,479명
카샨 제국.
-나는 착한 사람이야. 내가 착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너희들은 다 나쁜 놈이야!
-왜 나를 봐 주지 않지? 내가 더 멋진 놈이란 말이야! 내가 최고야! 그걸 모르는 너희들은 멍청이야!
선 : 376명
악 : 67,285,541명
지중해.
-망해라. 망해라. 망해라. 망해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유일한 정답이야. 왜냐하면 나는 똑똑하니까. 너희들은 멍청하니까.
선 : 1,225명
악 : 128,546,699명
동방 중천동, 수도사의 산맥.
-온 마음을 다해 나를 버리는 것으로…….
-악에 대항하는 용기는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통 속에 담그는 것이다.
선 : 21,318명
악 : 1,589,746,587명
구스타프 제국.
-실수해라. 내가 너를 조롱할 수 있게, 내가 안심할 수 있게. 신이시여, 저자가 실수하게 해 주소서.
-나는 너를 고통스럽게 만들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아픈 거 아니니까.
전 인류에 대한 심판이 끝나고 최종 스코어가 메이레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선 : 48,893명
악 : 3,159,963,587명
‘충분하다.’
선의 기준을 통과한 자는 전체 인구의 1퍼센트조차 되지 않지만, 여전히 선택권은 그들에게 있었다.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만약 그렇다면 지금도 이 세계에 남아 있는 48,893명의 인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 1명이라도 선인이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선과 악의 어느 것으로도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오히려 선악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로서 끝없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정진할 것이다.
“인간은 아직 멸망하기에는 이르다. 이러한 대법관의 판단에 의해, 라 에너미의 사건을 삭제하겠다.”
대자관세음의 화신이 수인을 바꾸며 두 팔을 커다랗게 휘돌리자 엄청난 숫자의 광원이 중첩되었다.
테라포스 화신술-관세음멸마.
인간의 청각으로는 들을 수 없는 맑고 청명한 소리가 지상을 향해 퍼져 나갔다.
선의 힘을 빌려 악의 힘을 약화시키는 율법은 테라포스의 강력한 화신의 힘을 빌려 세계 전체에 전달되었다.
5만 대 31억의 비율로 되찾을 수 있는 균형은 크지 않지만 라 에너미의 사건을 지우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어…….”
샤갈이 멍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던 끔찍한 기억들이 점차 소멸하며 본래의 기억만을 남겨 두기 시작했다.
사라져 버린 기억에 채워 넣을 새로운 추억 따위는 없었고, 그저 암흑 속을 헤맸던 시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으아아아! 으아아아!”
억울하고 분해서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는 샤갈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로네는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했다.
‘이것이 메이레이가 말한 후폭풍.’
아마도 전 세계에서 샤갈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을 터였다.
라 에너미의 기억이 소멸하면서 그가 인간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카르 수치도 미약하게나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면 세계의 군대가 전투를 멈추고, 치열하게 격전을 펼치던 이고르와 바르시바도 거리를 벌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바르시바여, 이 세계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우리다. 통제권을 잃은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어.”
라 에너미는 바르시바에게 이면 세계의 독립성을 약속했지만 이미 그런 기억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이고르가 시로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너희의 일은 너희가 해결해라. 오늘은 함께 싸웠지만, 다음번에는…….”
이고르는 말을 아꼈다.
이면 세계의 존재와 현실의 인간은 태생부터 공존할 수 없는 운명이기에 또다시 이런 일이 되풀이된다면 그때는 전쟁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이면 세계의 군대가 퇴각하자 남은 것은 끔찍한 시체들과 피를 뒤집어쓴 시로네 일행뿐이었다.
화신술을 끝낸 메이레이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라 에너미의 사건을 소멸시켰다. 너는 인류의 대표로서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할 의무가 있다.”
“……빨리도 말해 주네.”
어차피 그 정도의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기억이 남아 있지?”
“관세음멸마는 악에 조종당하는 모든 것을 말소시키지. 조종당하지 않는다면, 기억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군.”
라 에너미의 사건이 소멸하면서 이면 세계의 풍경이 천천히 걷히기 시작했다.
통속의 뇌가 해제되고,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메이레이가 한쪽 귀를 막았다.
신의 주파수를 통해 라 에너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찾아라, 헥사.
라 에너미는 100퍼센트의 카르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네가 찾는 곳에 내가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시로네는 생존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베네치아는 사망했고 샤갈은 이미 자리를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에텔라와 쿠안, 리안과 루피스트가 시로네에게 다가오자 메이레이가 말했다.
“나는 돌아가겠다. 앞으로 너희들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부디 옳은 선택을 하길 바란다.”
루피스트가 말했다.
“기왕 왔으니 조금 더 있는 게 어때? 라 에너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닌데 말이야.”
“테라포스는 소리를 통해 우주의 질서를 수호한다. 라 에너미가 질서를 무시하고 우주의 사건을 조작했기에 직접 나선 것일 뿐, 육체적 간섭은 이번처럼 대우주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은 없을 것이야.”
“흐음.”
루피스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토르미아 왕국을 위해 테라포스를 이용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무래도 다루기엔 너무 위험한 종족이었다.
“헥사, 테라포스는 너를 인류의 대표자로 인정했다. 뒤를 맡긴다. 필요하다면 연락할 것이다.”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메이레이의 눈동자가 사람의 것으로 되돌아왔다.
“어라? 여기가 어디죠?”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기에 시로네 일행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생화의 에너지 빔을 방어했을 때 폭발의 충격으로 날아간 것 같은데…….”
‘그때부터 바뀌었던 거네. 감쪽같이 속았어.’
아마도 기밀이 되겠지만, 메이레이는 테라포스와 교신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로 왕국에 포섭될 것이다.
에텔라가 말을 꺼냈다.
“이제 어떡할 거죠? 라 에너미의 기억은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의 몸으로 이 세계에 머물고 있어요.”
키도가 답했다.
“굳이 찾을 필요 있을까? 더 이상 사건을 조작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텐데.”
라 에너미가 경험을 수집하는 방식은 태곳적부터 설계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규모였다.
시로네가 말했다.
“그래도 오감의 기억이라는 능력은 유용해. 라 에너미라면 다른 방식으로 사용할지도 몰라.”
“정말로 찾을 생각인 거냐?”
루피스트가 삐딱하게 물었다.
“이번 일로 알았을 텐데? 자칫하면 라 에너미를 거대한 재앙으로 키울 수도 있어. 인류가 위험해진다.”
“그래도 찾아야 돼요.”
“왜?”
“상아탑 테스트니까요.”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었다.
“제 생각도 상아탑과 같아요. 설령 인류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우리는 끝까지 싸워서 라 에너미를 몰아내야 해요.”
‘카르인가…….’
어쨌거나 시로네는 마법협회 소속이 아니었으니 루피스트가 말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아서 해라. 나는 생화로 간다. 씨앗을 수거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용병단 건은 내가 처리하지.”
“제인 씨의 일은 유감이에요.”
“……그녀만 죽은 것도 아니야. 연락하마.”
루피스트가 몸을 날리자 메이레이도 시로네를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저도 협회장님을 따라가 볼게요. 상아탑 주민이 되면 꼭 찾아와 주세요.”
메이레이가 테라포스의 신탁을 받는 한 여기에서 끝날 인연이 아니었다.
“그래. 몸조심하고, 다음에 또 보자.”
시로네가 작별 인사를 하고 있을 때 쿠안이 절뚝거리며 리안에게 다가갔다.
“야.”
리안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벼락처럼 검을 뽑아 든 쿠안이 수직으로 휘둘렀다.
바람 소리를 내며 검이 리안의 미간 사이를 지나갔다.
“알겠냐?”
“……네.”
일검에 수많은 변화가 담겨 있는 섬광의 잔상이 여전히 망막에 남아 있었다.
분명 흉내조차 내기 힘든 기술이지만, 쿠안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연습해라.”
한때나마 교관이었던 그가 리안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쿠안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몸을 돌렸고, 에텔라가 시로네의 어깨를 짚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잘 지내요, 시로네 군.”
“돌아가시게요? 저기, 의뢰비도 아직 지급 안 했는데요?”
에텔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돈 때문에 온 것도 아닌데요. 스승님의 유지를 가슴에 새겼으니 괜찮아요.”
“학교로 돌아가실 건가요?”
“일단은.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여전히 샤갈에 대한 증오심이 남아 있었고, 이 상태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고, 시로네의 곁에는 리안과 키도만이 남아 있었다.
어색한 정적 끝에 리안이 키도를 돌아보았다.
“너는 안 가냐?”
“어, 나? 가야지…….”
인간에게는 세계 전체가 활동 무대지만 고블린인 키도는 어디를 가든 아인종일 뿐이었다.
“딱히 목적지가 없으면 우리랑 같이 갈래?”
시로네의 제안에 키도의 귀가 실제로 솔깃했으나 곧바로 허락하기에는 아무래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흥, 인간을 따라가서 뭐 하게…….”
“그렇다고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만은 없잖아. 같이 가자. 재밌을 거야.”
“그, 그럴까?”
리안도 흔쾌히 찬성했다.
“그래, 같이 라 에너미와 싸우자. 강한 아군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키도는 강한 아군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키히히히! 좋아! 그럼 이 몸께서 친히 인간들에게 힘을 빌려줘 보실까?”
키도가 창을 휘두르며 멋진 포즈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