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20
“그나저나…….”
그렇게 라둠의 임무가 종결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무거운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시로네, 이 세계는 뭘까?”
앙케 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떠올린 키도의 얼굴에 장난기가 사라졌다.
“확신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어쩌면 우리들은…….”
시로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군가의 꿈속에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신의 눈동자 (3)
***
제국 카샨.
우오린은 최측근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황성 아가노스의 비밀 방에서 눈을 떴다.
시원한 물침대의 감촉을 느끼며 고개를 돌리자 생물학적으로는 남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들인 간도가 책을 읽고 있었다.
“깨어나셨습니까?”
물을 가져온 간도가 컵을 내밀자 우오린은 기지개를 켰다.
“얼마나 지났지?”
“대략…….”
간도는 대략이라는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1시간 42분 지났습니다.”
“흐음, 상당히 길었네.”
물을 마신 우오린이 슬리퍼를 신고 내려와 간도를 지나쳐 갔다.
“요즘 자주 들어가시는군요.”
근래 들어 언더 코더에서 시간을 보내는 우오린이었다.
“재밌어. 강해지는 것도 빠르고.”
그녀가 링크하는 프로그램은 전문 코더들이 만든 ‘하이 기어’라는 가상현실 세계였다.
언더 코더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유료 콘텐츠 중의 하나로 하이 기어 코드 전용의 드림 스타를 복용하면 입장할 수 있는데, 한 알의 가격이 200만 골드가 넘어간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신체를 마음대로 개조할 수 있고 심지어는 100퍼센트 기계화 작업이 끝난 사이보그도 있다.
“몸을 바꾸는 게 재밌습니까?”
언더 코더를 접한 적이 없는 간도는 인체 개조를 떠올리면 가학적인 느낌부터 들었다.
“개조한 만큼 강해지니까. 일종의 경쟁 심리지.”
우오린이 귓속을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저주파 감지 기능을 업그레이드시켜야겠어. 스텔스 모드로 들어오는 거, 엄청 짜증 난다고.”
마음 같아서는 현실의 골드로 사 버리고 싶었으나 하이 기어의 운영자들이 현금 거래는 철저하게 단속하고 있었다.
“하긴, 돈으로 다 사 버리면 금방 질릴 수도 있으려나?”
정말로 푹 빠진 듯한 모습에 간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거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그냥 뭐, 사람들 만나서 수다 떨고, 아이템이나 개조 정보도 공유하고, 상대방 진영하고 싸우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우오린이 퍼뜩 생각난 듯 말했다.
“맞다, 나 이번에 레벨 올랐다? 260레벨. 한마디로 마그난을 장착할 수 있다는 얘기지.”
간도는 마그난이 뭔지 몰랐다.
“그렇습니까?”
“그래도 랭킹 10위 안에 들기는 어려울 거야. 상위 10위의 인물들은 완전 괴물들이거든. 특히나 ‘백사’의 컨트롤은 보기만 해도 넋을 잃을 정도라니까.”
하이 기어에서 우오린의 랭킹은 현재 17위, 사용자 코드는 ‘꼬마마녀’였다.
신이 나서 떠들던 우오린이 간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같이 할래? 내가 팍팍 서포트해 줄게. 안 그래도 우리 진영에 공격대가 부족하거든.”
우오린이 무언가를 함께 하자고 요청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명 감동적이지만 간도는 오히려 씁쓸했다.
‘가짜이기 때문인가.’
현실에서는 그 무엇도 우오린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저는 현실에서 여황님을 돕겠습니다.”
우오린이 눈을 깜박였다.
“응? 현실?”
그녀의 의중을 파악한 간도가 덧붙였다.
“물론 제가 살고 있는 이 현실도 누군가의 꿈, 전부 가짜일지도 모르지만요.”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다, 간도야. 이 세상이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그렇다면……?”
우오린이 검지를 세웠다.
“이 세상은 가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정답이지.”
“가짜……라고요?”
간도의 반응을 즐거운 듯 바라보던 우오린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하이 기어에 링크하면 현실보다 월등히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감상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코더가 전부 창조한 것은 아니야. 드리모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모듈을 끌어다 쓰는 것이지.”
현재 우오린의 세계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기술들이다.
“그래서 투박한 부분이 있겠지만, 나는 현실과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해. 통속의 뇌이기 때문이야.”
뇌가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진짜다.
“그런데 하이 기어에는 한 가지 재밌는 시스템이 있어. 신체를 개조하기 전에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야.”
우오린이 머리를 두드렸다.
“인공지능 시뮬레이션이라고 불리는 건데, 나와 똑같은 정보를 가진 화신이 나타나서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간도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너무 정밀해서 보는 것만으로는 화면 속의 나와 바깥의 나를 구별하지 못해. 문제는 이 지점에 있다. 만약 화면 속의 나에게 통제권을 넘겨주고 새로운 인공지능 시뮬레이션을 창조하라고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될까.”
우오린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가상의 세계가 끝없이 만들어진다. 그 세계 속의 존재는 자신이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현실을 살아가겠지. 그렇게 수십억 개의 세계가 이미 만들어져 있다면…….”
우오린이 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진짜 현실, 즉 모든 것의 시작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간도는 대답하지 못했다.
“거의 없어. 우리 또한 끝없이 파고드는 시스템의 중간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지. 가짜일지도 모른다고? 천만에. 이 세계는 99퍼센트의 확률로 가짜란다.”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이 굳어 있는 간도를 보고 우오린이 피식 웃었다.
“물론 아주 작은 확률로 이곳이 진짜일 수도 있겠지.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방법을 제안하고 싶구나.”
“그게, 뭐죠?”
우오린이 눈웃음을 지으며 엄지로 침대를 가리켰다.
“신경 끄고, 하이 기어나 같이 하자.”
***
시로네 일행은 빠르게 달려 은폐 시설 구역을 벗어났다.
가끔씩 스펙트럼의 잔당이 길목을 가로막았지만 그들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라둠의 빈민가에 들어서자 굶주린 주민들이 들개처럼 서성거리고 있었으나 그 모습에 오히려 긴장은 풀렸고 일행은 그때부터 도보로 이동했다.
피골이 상접한 자들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초라한 풍경을 눈에 담으며 키도가 다시 물었다.
“네 얘기를 듣고 보니 조금 허탈하네. 스피드킬러에 있으면서 저 인간들보다는 나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이 세계 또한 꿈 같은 거라면 말이야.”
“그렇지 않아, 키도.”
시로네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이곳이 어떤 세상이든, 중요한 건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거야.”
숨을 쉬며 살고 있고, 먹지 않으면 죽게 된다.
“나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고, 세상 바깥에 무언가가 있다고 해도 거기가 끝인 것도 아니야.”
“흐음, 그런가? 하긴, 듣고 보니 고민해 봤자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리안이 말했다.
“우리는 전투에서 생존했어. 앞으로도 그렇겠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으니까.”
심지어 생명조차도 이 세계의 것이었다.
“맞아. 그래서 라 에너미를 막으려는 거야. 앙케 라가 신이 되면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기준이 무너질 테니까.”
“기준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키도가 창을 어깨에 걸치며 웃었다.
“뭔지는 몰라도 거창해서 좋은데?”
***
시로네 용병대의 핵심 멤버들은 임무가 끝나고 각자 브룩스의 저택을 찾았다.
제인이 사망했기에 루피스트가 보낸 협회 직원이 대기하고 있었고, 반지의 형태로 가공한 네메시스를 수거했다.
다만 샤갈이 가져간 1개의 네메시스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라둠에서 도망친 카르긴과 조슈아가 브룩스 용병 중개사를 찾은 건 이틀 뒤였다.
무사히 생환했을 때만 해도 앞으로 용병 생활을 어떻게 꾸려 나갈지 걱정이었으나 핵심 멤버를 제외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그들뿐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자신들의 비겁함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임무 실패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하고 정문을 나선 카르긴은 처음 예상과 달리 속이 후련했다.
“하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구먼.”
“무슨 노망난 소리야? 곧 관 짜고 들어갈 영감이.”
조슈아의 표독한 농담을 들어도 기분이 좋았다.
“껄껄! 그렇기는 하지. 살아 봤자 얼마나 살겠어? 하지만 내 평생 이런 기분은 또 처음이군.”
마음속에 새싹이 트는 것은 조슈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쪽으로 갈게. 돈 좀 만질 일 생기면 연락해. 같은 개털끼리 돕고 살아야지.”
위약금을 갚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벌어야 했다.
“나는 진심이었네.”
카르긴이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같이 가지 않을 텐가?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런 삶도 얻지 못했을 게야.”
“됐어. 없던 걸로 해. 어차피 살아서 돌아왔잖아?”
라둠에서의 감정이 여기까지 이어질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잘 지내.”
카르긴이 떠나려는 조슈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사랑하네.”
그리고 조슈아의 흔들리는 눈동자로 뛰어들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아이를 낳으세. 자네를 닮은 어여쁜 아이를.”
조슈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짜…… 노망이 났나. 내가 왜 당신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으아아앙!”
두 팔을 벌린 카르긴의 품으로 조슈아가 뛰어들었다.
“놀고들 자빠졌네. 채무가 얼만데 저러고들 있어?”
저택의 창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룩스가 심술궂게 중얼거렸다.
‘퇴출을 시켜도 모자랄 판국에…….’
용병대장인 시로네의 부탁으로 ‘전장 이탈’이 아닌 ‘임무 실패’로 기록에 남게 된 그들이었다.
베네치아의 사망으로 속이 쓰린 그였기에 마음 같아서는 거금의 위약금을 먹이고 싶었으나, 용병대의 일은 전적으로 시로네의 의견에 따른다는 루피스트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특히나 당시에 루피스트의 심기는 정말이지 좋지 않아서, 반대의 반 자라도 꺼냈다가는 그대로 목이 떨어졌을 터였다.
“사장님, 아리아 씨가 깨어났습니다.”
부하의 말에 브룩스가 곧바로 창가에서 몸을 돌려 그녀의 방으로 걸어갔다.
치료 끝에 어느 정도 혈색을 되찾은 아리아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벌써 가려고? 며칠 더 쉬지?”
“충분히 쉬었어. 왕성에 들어가 봐야 해. 보고서도 작성해야 되고.”
아마도 루피스트가 전담했겠지만 그녀 또한 처리해야 할 일이 없지는 않았다.
의사의 말로는 일주일은 쉬어야 한다고 했건만 코트를 걸치는 그녀의 몸가짐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정말 멋진 여자야.’
불장난으로 시작했던 만남이 가슴속에 진짜 불을 피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고마웠어. 연락할게.”
문으로 향하는 아리아의 앞을 브룩스가 막아섰다.
“잠깐. 할 얘기가 있어.”
“나중에 하자. 지금 좀 바빠.”
“사랑해, 아리아.”
“응? 뭐라고?”
“우리 결혼하자. 너와 미래를 함께하고 싶어. 아이도 낳고 말이야.”
아리아는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브룩스를 황당하게 쳐다보더니 차갑게 몸을 돌렸다.
“있는 애나 잘 키워, 인간아.”
“…….”
쿵 하고 문이 닫혔다.
***
토르미아 왕국 3대마법사길드의 마스터가 동시에 사망한 사건은 수도에서 화제였다.
용병대를 해산하고 각자의 길드에 경위서를 제출한 뒤에야 시로네는 다음 여정을 떠날 수 있었다.
“후우, 힘드네. 팀을 꾸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구나.”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얼굴을 가린 키도가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인간은 죽음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종족이니까. 사실 죽으면 그냥 먹으면 되는 건데 말이야.”
시로네는 키도가 든 양고기 꼬치를 돌아보았다.
“그런 걸 먹어도 기억이 떠올라?”
“아니. 불에 익히면 기억은 사라져. 주술 같은 게 아니야. 생물의 세포에 담긴 기억을 소화시키는 거지.”
리안이 키도를 돌아보았다.
“그게 주술이잖아?”
한입에 꼬치를 삼킨 키도가 손가락을 빨며 말했다.
“알 게 뭐야? 어쨌거나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라 에너미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는데.”
“생각해 둔 게 있어. 하지만 그 전에 잠시 어디 좀 들르자.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부탁할 것도 있고.”
“응? 누군데?”
시로네가 미소를 지으며 왕성 쪽을 가리켰다.
“메르코다인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