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21
재회의 장 (1)
용뢰의 수장은 왕의 질문에 가장 명확하고 합리적인 답변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질문의 종류는 형이상부터 형이하까지 천차만별.
우주의 비밀을 물어 오는 것도 곤욕스럽지만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뭐냐고 물었을 때 알비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는 게 좋겠는가?”
이러한 일화는 일국의 왕이 용뢰의 수장에게 얼마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그렇기에 메르코다인 가문의 저택이 다른 귀족과 다르게 왕성 관리 구역에 위치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흐음, 이곳에 용뢰의 대장이 살고 있단 말이지?”
스피드킬러의 총대장이었을 때부터 용뢰라는 말을 질리도록 들어 온 키도였다.
“대장이 아니고 수장. 그런데 아직도 복구가 안 되어 있네. 얼마나 심하게 무너진 거야?”
리안이 큰 키로 넘어 보자 저택 내부에서 수십 명의 인부가 동원된 공사가 한창이었다.
“여기 왕성 관리 구역이잖아? 내전이라도 있었나?”
“하하! 아니. 이루키가 날려 버린 거야. 졸업 시험에서 마지막에 시전했던 그 마법 말이야.”
집사의 보고를 받은 이루키의 어머니 아르가네스가 정원을 빠르게 가로질러 다가왔다.
“어서 와요, 시로네.”
“안녕하세요.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아르가네스가 얼굴을 가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어머, 그런 말은 좀 곤란한데. 지금 남편도 근무 중이라서, 아주 늦게 들어와요.”
시로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호호! 그래요. 이루키 군도 용뢰에 출근했죠.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않네요.”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용뢰 출입증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루키를 만나서 할 이야기도 있고요.”
친구랑 수다나 떨려고 갈 수 있는 용뢰가 아니었으나 라둠 사태의 핵심인 시로네라면 업무적 연관성은 충분했다.
“내성 출입증을 써 줄게요. 아마 이루키 군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요즘 시국이 불안정하니까요.”
메르코다인의 안주인이라면 듣기 싫어도 기밀들이 가십거리처럼 흘러들어 오기 마련이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성 출입증을 받은 시로네 일행은 왕성의 핵심부라고 할 수 있는 내성의 문턱을 넘어섰다.
아름다운 정원에 각각의 부처 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내로라하는 귀족들이었다.
시로네는 부스스한 머리로 정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는 친구를 발견했다.
“이루키!”
크게 소란스럽지 않은 거리에서 반갑게 소리치자 이루키가 차를 홀짝거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야, 여기!”
눈이 많이 침침한지 시로네를 찾지 못하자 직접 손까지 흔들며 위치를 알렸다.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유심히 지켜보던 이루키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여, 시로네.”
메르코다인 이루키(20세).
왕 직속 자문기관 용뢰의 평직급 연구원.
언제나 한결같을 줄 알았던 친구들이건만 막상 사회에서 재회하자 감개가 무량했다.
“기다리고 있었어. 1시간 빨랐네. 들어와.”
시로네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어차피 이루키라는 인간을 완벽히 이해하기란 무리였다.
이루키가 마치 자기 집처럼 복도를 가로지르자 병사들과 관리들이 하나같이 경의를 표했다.
“역시 용뢰네. 너 출세했구나?”
“하하.”
무서운 농담을 들은 듯 눈이 퀭해진 이루키는 그저 건조한 웃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연구실로 시로네 일행을 데려간 이루키가 차를 대접하며 키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쪽은? 초면에 이런 말은 실례지만, 어디서 고블린 닮았다는 얘기 안 들어요?”
되지도 않는 농담에 키도가 쏘아붙였다.
“나는 고블린이야! 그쪽이야말로 예전에 잃어버린 내 배다른 형제 아니야?”
시로네가 직접 소개했다.
“키도야. 앞으로 같이 여행하려고.”
“아하, 섭식의 키도. 스피드킬러의 총대장. 라둠 정치 서열 179위, 무력 순위 7위, 특수 능력은 기억의 맛.”
벌써부터 용뢰 티를 팍팍 내는 이루키의 모습에 시로네가 놀랐으나 키도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내 무력이 고작 7위라고? 드락커 외에 나를 이길 수 있는 아인종은 없었어. 인간도 정보력이 영 꽝이군.”
“그 엉터리 정보력에 의하면, 지금은 그쪽이 1위죠.”
키도보다 상위에 랭크되어 있던 스펙트럼의 간부들은 전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할 말이 없어진 키도가 대놓고 이 인간 싫다는 티를 내며 돌아보았으나 시로네는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여전하구나. 요즘은 어떻게 지내?”
땅이 꺼질 듯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예측, 예측이지. 왕성에서 일어나는 데이터를 수집해서 1시간, 12시간, 24시간 단위로 예측 보고서를 쓰는 게 일이야. 예를 들어 지금 마들렌이 들어와서…….”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루키 님, 평직급 연구원 회의 소집이 잡혔습니다. 긴급 사안이라고 합니다.”
“알았어요. 시간에 맞춰서 갈게요.”
마들렌이 나가자 이루키가 닫힌 문을 가리켰다.
“봤지? 이런 식이야. 아마도 그녀는 72시간 내에 배탈이 일어날 확률이 64.8퍼센트나 되지. 왕성 빙고의 수질이 오염되는 사건이 어제 있었고, 하품질의 얼음이 직급이 낮은 순으로 보급되는 데다가 오늘 디저트 타임에는 과일 빙수가 나오거든. 그리고 내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그녀는 5년 동안 과일 빙수를 안 먹은 적이 두 차례밖에 없어!”
이루키가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치자 연구실에 안쓰러운 정적이 흘렀다.
“……고생하는구나.”
소파에 앉은 이루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렇게 쉽게 말할 게 아니야. 마들렌의 의료 기록, 식수원 보고서, 의학 도감, 개인 관찰 일지까지 다 확인했지. 아, 우리는 왜 마법학교에서 그토록 피나는 훈련을 했던가. 빅데이터고 뭐고, 자고 싶어 죽겠다고.”
확실히 쓸데없는 분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모든 정보는 작은 것의 결합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또한 용뢰의 일원이 거쳐야 하는 훈련이었고, 직급이 올라갈수록 다루는 정보의 질은 높아지게 마련.
그렇게 최고급의 두뇌들이 24시간 풀가동되면서 왕국 전반의 시스템을 예측하고 위험 요소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이루키의 아버지.’
이루키의 경우로 미루어 봤을 때 메르코다인 알비노가 다루는 정보의 양과 질은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힘내라, 이루키.”
시로네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는 이루키가 턱을 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나만 고생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적어도 네이드보다는 낫잖아.”
“그러고 보니, 네이드는?”
“지방에 있는 연금술 상단에서 일하고 있어. 운반조에 들어간 모양이던데, 일이 엄청 힘들대.”
“하지만 가게를 차린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기는 한데, 재료비 같은 걸 따지면 조금 부족한가 봐. 리즈 씨랑 같이 저금해서 작은 가게부터 연다고 하더라고.”
“돈 때문이라면 차라리…….”
친구의 입장에서 내키지는 않지만 네이드의 실력이라면 거금을 주고 고용할 브로커들이 세상에는 널렸다.
“알잖아, 그 녀석 성격. 마법은 쓰지 않을 거야. 내가 빌려준다고도 해 봤는데, 거상이 되려면 바닥 생리부터 알아야 된대. 틀린 말은 아니지. 나도 지금 그러고 있으니까.”
“그래. 모두 열심히 하는구나.”
친구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시로네가 목숨을 걸고 지켜 낸 인류의 가치일 것이다.
“너는 어때? 아버지 서재에서 라둠 보고서를 보기는 했는데, 이걸로 테스트 통과할 확률은 있는 거야?”
“그걸 잘 모르겠어. 그래서 너에게 자문을 좀 구하려고. 겸사겸사 내가 겪은 일도 말해 주고.”
시로네는 리안과 키도의 설명을 덧붙여 가며 라둠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말해 주었다.
“흐음, 결국 라 에너미는 소멸했다는 거지. 확실히 애매한 상황이군.”
테스트 합격의 조건은 라 에너미를 찾은 다음 상아탑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것.
하지만 시로네가 만났던 라는 과거의 사건일 뿐이었고, 현재는 그곳마저 소멸한 상태였다.
“좋아, 내가 해결해 주지.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응? 당사자?”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난 이루키가 책상 아래에 있는 비밀 금고의 자물쇠를 열었다.
“뭐 하는 거야? 나 지금 되게 불안해.”
“내가 고작 배탈 조사나 하고 있을 줄 알았어? 용뢰에 들어와서 그나마 좋은 건 1급 기밀을 마음대로 ‘훔쳐’볼 수 있다는 거지. 어디 보자, 동선을 계산하면…….”
학교에서 새는 바가지, 사회에서도 새는 건 마찬가지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정말 괜찮은 거야? 그거 왕국 보안법 위반이잖아.”
“일반인은 그렇지. 같은 부서끼리는 그냥 기밀 열람이야. 걸려 봤자 월권행위로 징계나 먹겠지. 좋아, 계산 끝났어. 가자.”
이루키가 코드를 걸치고 복도로 나가자 과일 빙수를 들고 싱글벙글 웃고 있던 마들렌이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어디 가세요? 이제 곧 회의가…….”
“일이 생겨서요. 불참한다고 전해 주세요.”
“평직급은 불참 권한이 없어요!”
“아무 말이라도 해서 빼 줘요. 아, 우리 엄마가 지금 둘째를 출산 중이라고 하세요. 아버지 대신 제가 간다고.”
“네?”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들렌을 돌아보며 이루키가 과일 빙수를 가리켰다.
“그거 버리고, 내 거 대신 먹어요.”
***
이루키가 연구실을 빠져나올 무렵 토르미아 왕성의 각국 부처는 일대 비상사태에 직면했다.
“지금 외성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제1급 경계경보가 발령되고, 근위병들이 완전무장을 갖춘 상태로 그랜드 홀을 철통처럼 경계했다.
권좌에는 토르미아 왕국의 국왕 아돌프가 앉아 있었으나 이례적으로 왕비는 보이지 않았다.
왕국의 체면이 깎이는 경우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성으로 진입했습니다!”
일국의 관문을 빠르게 돌파하는 보고만으로도 아돌프의 얼굴에 노기가 떠올랐다.
“전하, 마력 제어장치를 가동할까요?”
“그만두게. 괜히 도발할 필요 없어. 그리고 어차피…….”
통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말은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왕성에 도착했습니다!”
보고와 동시에 내부를 뒤흔드는 여자의 목소리가 음향 마법의 증폭을 받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내 팬티 보지 마!”
“……응?”
굉음에 눈살을 찌푸리던 대신들이 모조리 그랜드 홀의 출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눈 깔아! 시신경을 통제하란 말이야!”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흑인 소녀는 상아탑의 상징인 성패를 내밀고 반대편 손으로는 짧은 치마를 들고 있었다.
뒤편에는 거구의 흑인 남자가 따르고 있었는데,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거대한 참마도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내 팬티 보지 마!”
시녀는 물론 고위 관료들까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뒷걸음질로 길을 열어 주는 그때, 소녀가 우뚝 정지했다.
그러자 흑인 남자가 쪼그려 앉더니 한쪽 다리를 길게 뻗은 자세로 선글라스에 손가락을 댔다.
“너! 방금 내 팬티 봤지!”
“아뇨! 안 봤습니다! 저는 절대로……!”
“상상은 했을 거 아냐!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뇌를 뜯어내 버리기 전에!”
엄청난 크기로 증폭된 목소리가 복도를 뒤흔들자 관료는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자기가 안 보여 주면 될 거 아니야!’
보란 듯이 치마를 올리고 걸으면서 보지 말라고 강짜를 부리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내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냥 하지 마!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소녀는 차갑게 몸을 돌려 복도를 걸어 나갔고, 그랜드 홀로 연결되어 있는 문을 발 차기로 열어젖혔다.
“아돌프 국왕은 거수하라! 상아탑 시스템감찰부에서 이번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출두했다!”
근위 병사들이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었으나 아돌프 국왕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말렸다.
“내가 아돌프 국왕이오.”
약속된 의례 앞에서 콧방귀를 뀐 소녀가 성星패를 눈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나는 상아탑 2성급 주민, 별야 쯔오이.”
별칭은 검은 화성和聲.
“그리고 이쪽은…….”
쯔오이가 엄지로 가리키자 흑인 남자가 다시 한쪽 다리를 뻗은 채로 앉으며 선글라스를 중지로 눌렀다.
“…….”
별야 쯔오이의 위성, 칼 무쏘(개‧돼지)였다.
재회의 장 (2)
국왕을 비롯한 상위 관료들은 상아탑의 등장을 예견하고 있었지만 막상 성패가 눈앞에서 들이밀리는 압박감은 엄청났다.
아돌프 국왕이 철근보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상아탑에서는 무슨 연유로 토르미아 왕국을 방문한 것이오? 왕국은 인류에 해가 되는 일을 한 적이 없소만.”
쯔오이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내 입으로 직접 듣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는 건 알고 있지? 순순히 자백하는 게 좋을 거야.”
시스템감찰부는 상아탑 부서 중에서도 각국 정세와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외교적 난제, 기아와 난민, 전쟁 등에 관여하는 만큼 각국의 왕을 만나는 일이 다반사이고 그런 만큼 그들을 다루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물론 근래에 큰 사건이 있었으나, 왕국을 위협한 테러리스트 조직을 처단한 것뿐이오.”
쯔오이가 치마를 들어 올렸다.
“매너가 없군. 숙녀의 속옷을 훔쳐보다니.”
아돌프 국왕은 시선조차 내리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야. 한 번만 더 나를 희롱하면 왕이고 뭐고 멱살잡이를 당하게 해 주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아돌프 국왕의 동공이 흔들렸다.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왕의 곁을 지키는 고위 마법사들과 근위대 병사들도 속에서 불이 치솟기는 마찬가지였다.
‘빌어먹을! 우리가 무서워서 참는 줄 알아?’
상아탑의 마법사가 제아무리 강해도, 싸우다 죽으면 죽었지 이런 수모를 버텨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이 아닌 왕국 전체의 문제였다.
단어 선택 하나만 실수해도 수십억 골드에 달하는 손해가 생기는 것은 물론, 성패 뒤에 버티고 있는 상아탑 주민들이 토르미아 왕국 자체를 부정하는 날이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아돌프가 조금 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감추는 게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