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22
쯔오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기어코 가식을 거두지 않는구나. 어디, 내 앞에 무릎이 꿇려도 그럴 수 있나 보자.”
그때 그랜드 홀의 문이 황급히 열리며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폐하.”
마법협회장 루피스트가 약식으로 경의를 표하고, 뒤를 따라 들어온 시로네 일행이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저 여자가…….’
시로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단연 쯔오이였다.
까만 피부에 수백 개의 고무줄로 곱슬머리를 동여매어 뿔처럼 세운 여자.
왕성이 아닌 어디에서 마주치더라도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력한 기도였다.
“넌 뭐야?”
“마법협회장 루피스트입니다. 라둠 사태의 총책임자이기도 하죠. 할 말이 있으면 저에게 하시죠.”
쯔오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여기도 멍청한 놈들 천지군. 상아탑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순순히 고하면 모욕적인 일은 당하지 않게 해 주마.”
“무엇을 고하라는 겁니까?”
“하여튼 왕국이란…….”
쯔오이가 치마를 훌쩍 올리자 이루키와 키도, 리안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저 땡땡이 속옷은? 어쩌라고?”
키도가 대놓고 가리켰으나 쯔오이는 반응하지 않고 루피스트의 얼굴을 뚫어지게 살폈다.
“…….”
그러더니 갑자기 돌아서며 관료들에게 손을 휘둘렀다.
“자, 봤지? 하면 되잖아, 하면.”
아돌프의 반응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었던 관료들이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그냥 우리를 무시하는 건가?’
“그런데…….”
쯔오이가 다시 돌아서서 시로네를 가리켰다.
“너는 누구야?”
그랜드 홀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루피스트와 이 소년만이 팬티를 보지 않았다.
“아리안 시로네입니다.”
“시로네? 아아, 네가 시로네야?”
상아탑 후보라면 납득이 갔다.
‘전투력이 괜찮다던데. 이쪽으로 상당히 깊이 들어갔네.’
보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를 보지 않는 행위조차도 무언가를 바라보는 하나의 방법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벽하게 잊어야 한다.
마치 뒷산 아름드리나무 밑에 금화가 있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그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듯이.
“아리안 시로네라고?”
관료들이 수군거리고, 아돌프 국왕조차 이채를 드러내며 시로네를 살폈다.
‘저 소년이…….’
왕국 역사상 최고의 점수로 마법학교를 졸업한 학생이자 자신이 놓쳐 버린 인재였다.
왕에게도 삿대질을 하는 쯔오이가 시로네에게는 말투를 다스린다는 점에서 안타까움이 더했다.
‘상아탑 주민. 그저 강짜를 부린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에게는 인정도 할 줄 아는 것인가?’
아마도 아돌프가 들어가지 못한 어떤 경지가 있을 테지만, 어차피 왕은 그저 다스리는 직업이기에 자존심이 상할 일은 아니었다.
“좋아, 특별히 너에게만큼은 인간 대접을 해 주지.”
쯔오이는 루피스트에게로 완전히 돌아섰다.
“지금 당장 생화의 씨앗을 가져오도록. 직접 파기하겠다.”
루피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었습니까? 하지만 토르미아 왕국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애초에 수거하지도 않았으니까요.”
시로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수거하지 않았다고?’
라 에너미가 소멸된 이후 루피스트는 분명 씨앗을 수거하기 위해 쓰러진 생화로 가지 않았던가?
“그럼 씨앗은 지금 어디에 있지?”
“모릅니다. 원래부터 없었거나, 있었다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있겠죠.”
쯔오이는 입술을 질겅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것들이 간덩이가 부었나?’
물론 루피스트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런 심리적 트랩이야말로 상아탑을 상대로 치는 사기였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지금 당장 폭풍을 피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루피스트가 고개를 숙였다.
‘왕에게도 고할 수 없는 사안이다.’
테라포스 대법관이 라 에너미를 소멸시키면서 특정 구간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
망각병이라 불리는 세계적인 현상으로 인해 상아탑의 이목이 토르미아에 집중될 것은 자명한 일.
따라서 일단 생화의 소유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버티려는 속셈이었다.
“머리를 굴렸구나. 오늘의 결정이 재앙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되찾을 방법이 있다는 것은 쯔오이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정치적인 문제였다.
“가자, 무쏘.”
쯔오이가 무쏘를 데리고 그랜드 홀을 벗어나자 이루키가 국왕에게 고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전하. 저희들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어진 관료들이 소리쳤다.
“뭐야? 왕성이 자네 놀이터인가?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락거리는 게야!”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기 협회장께서…….”
“상아탑에서 무사히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큰 손해를 볼 뻔했어! 저 고블린은 또 뭐야?”
쯔오이에게 받았던 스트레스가 상당한 듯싶었다.
“그만하게.”
아돌프가 손을 들었다.
“어쨌거나 짐을 도와주기 위해 달려온 게 아닌가?”
이루키가 맞장구를 쳤다.
“바로 그겁니다, 전하. 매도 여러 명이 맞는 게 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시로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제발 그만해, 미친놈아.’
자칫 무례한 농담으로 들릴 수 있으나 아돌프는 유쾌하게 웃었다.
알비노의 뒤를 이어 용뢰의 수장이 될 인재.
언젠가는 이 청년에게 국가의 명운을 걸어야 될 날이 올 터였다.
“그래. 자네와 시로네는 동문이라지?”
“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죠. 오늘도 급한 부탁을 하려고 저를 찾아왔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물러나도 될까요?”
아돌프는 이루키와 시로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친구라…….’
시로네가 상아탑의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러가도 좋다.”
“감사합니다.”
이루키가 몸을 돌리는 그때, 아돌프가 말을 덧붙였다.
“아, 그 전에 시로네에게 전할 얘기가 있네.”
시로네가 예를 갖추며 말했다.
“네, 전하. 말씀하십시오.”
“애석하게도 짐이 자네의 진가를 몰라보았지.”
신분의 장벽 앞에서 좌절했던 적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다만 당사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속이 뜨끔했다.
“전하, 저는…….”
아돌프가 먼저 말을 꺼냈다.
“토르미아의 모든 국민을 대신해, 자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것을 진심으로 사과하네.”
그랜드 홀의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정치적 수사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지만, 시로네의 마음속에서도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감사합니다, 전하.”
시로네보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루키와 리안의 마음이 더 기뻤다.
‘드디어 인정을 받는구나, 시로네.’
물론 여기에서 끝날 시로네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리안이 잘 알고 있었다.
그랜드 홀을 벗어난 시로네 일행은 혹시라도 쯔오이가 왕성을 떠났을까 봐 부리나케 복도를 내달렸다.
멀리 왕성을 나서는 두 사람이 보였다.
“잠시만요! 잠깐 기다리세요!”
“뭐야?”
쯔오이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몸을 돌리자 시로네가 더욱 빠르게 달려갔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상아탑 테스트 합격 기준에 대해서요.”
“상아탑 테스트? 아, 라 에너미?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인류안전집행부나 균형부에 문의해야지.”
세상이 파국으로 치달을 뻔했음에도 상아탑에서는 엄연히 부서를 분리하고 있었다.
“그래도 뭔가 좀…….”
아마도 사건의 라 에너미를 접한 것은 세 후보 중에서 시로네가 유일할 것이기에, 상아탑에서도 특별한 룰이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난 정말로 몰라. 테스트의 기준은 태성님의 카르가 작용하는 영역이니까.”
쯔오이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네가 물어보니까 말해 주는 건데, 다른 두 경쟁자들은 이미 합격에 근접해 있다고 들었어.”
“네? 벌써요?”
테스트가 시작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라 에너미를 찾아서 상아탑에 오면 되는 거 아냐?”
‘이거 방심하면 안 되겠는데.’
라둠의 사건이 워낙에 컸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어디까지나 지상 과제는 상아탑에서 제시하는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나네가 별의 칭호를 받을 것 같아.”
내친김에 솔직히 말했으나 시로네의 속은 쓰릴 따름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일단 전투력에서 압도적이고, 무엇보다 판단에 파괴력이 있으니까. 진성음을 지목하는 주민도 있기는 한데, 나는 그 애의 카르는 좀 별로더라. 강직하기는 한데 좀 빠르다는 느낌이야.”
카르에 대한 표현만으로도 어떤 인물인지 대략 짐작이 갔다.
“주민들이 누가 합격할 것인지 지목하기도 하나요?”
“물론이지. 얼마 전에는 별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도 했으니까. 바빠 죽겠는데 말이야.”
“설문 조사요? 결과는요?”
쯔오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꼭 들어야겠어?”
“네. 듣고 싶어요.”
불안하기는 했으나 여기까지 와서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총 27명이 투표해서 나네가 1등을 차지했어. 무려 17명이 지지했으니까.”
“……그렇군요.”
“2등은 진성음. 9명이 지지했지.”
시로네의 눈이 퀭해졌다.
“그럼 저는…… 한 표를 받았다고요?”
쯔오이가 어깨를 두드리며 남의 일처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가 무슨 예언가도 아니고, 그냥 이 사람이 될 것이다, 생각하는 거니까. 자신을 관철시키는 게 카르잖아?”
물론 상처받지 않았지만, 득표율이 기묘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럼 별 중의 한 사람은 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거네요?”
“그렇지. 하지만 누군지는 몰라. 무기명투표니까. 다만…….”
이런 소문은 있었다.
시로네를 찍은 사람이 상아탑에서 가장 거대한 별, 태성이라는 소문이었다.
‘정말인가? 하지만 그분이 오대성과 다른 의견을 내는 적은 거의 없는데.’
“다만 뭐요?”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
쯔오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튼 열심히 해 봐. 너 조금 마음에 들었거든.”
팬티를 보는 사람은 질색이었다.
“응원할게. 물론 투표는 끝났지만.”
쯔오이와 무쏘가 공간 이동으로 날아가자 이루키가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아무래도, 우리 중에 극한 직업 1등은 너인 것 같은데?”
“괜찮아. 잃은 만큼 얻은 게 있으니까.”
비록 경쟁자보다 진도는 늦었을지 몰라도 시로네의 카르 수치는 전보다 높아졌다.
리안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우리가 이길 거야, 시로네.”
이미 시로네의 머릿속에 쯔오이의 말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당연하지.”
재회의 장 (3)
아름다운 겨울 정원의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데 왕성 쪽에서 마들렌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이루키 님! 이루키 님!”
용뢰의 평직급 연구원이 회의에 불참한다는 것은 업무를 떠나 태도의 문제였고, 시로네는 이루키가 걱정되었다.
“괜찮아? 나 때문에 징계받는 거 아냐?”
“괜찮아. 조금 전에 누구에게 눈도장을 찍었는데. 게다가 여긴 학교가 아니라고. 나 정도 고급 인력을 안 써먹으면 자기들만 손해지.”
자신감은 여전했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용뢰가 발칵 뒤집혔어요!”
이루키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지금 참석할 거예요. 아직 안 끝났죠?”
“아뇨, 회의가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