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28
반쯤 감긴 눈에, 끝없이 펼쳐진 대리석 바닥과 햇빛이 들어오는 수십 개의 창문이 보였다.
그리고 창문 아래에, 뒷모습만으로도 아름다운 백발의 소녀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모르겠다, 키도. 천국인지 지옥인지.’
막상 도착한 시로네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응? 누구야?”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몸을 돌리더니 시로네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뜨며 웃었다.
“어머?”
카샨의 여황, 테라제 우오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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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가 있는 곳 (1)
리안과 키도가 메타게이트를 통과할 때까지도 시로네와 우오린은 움직이지 않았다.
딱히 그리워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이유는, 이제는 서로의 인생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성숙해졌구나.’
카샨의 황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열네 살 때 만났고 여전히 열여섯 살의 풋풋한 나이지만, 어린 티가 많이 벗겨진 아름다운 여자로 성장해 있었다.
시로네가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덕분에 리안과 키도는 자유롭게 우오린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저 여자가 테라제인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그녀를 이루는 공간마저 일렁이는 듯했다.
‘확실히 오르캄프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군.’
딸이라고 들었건만, 어떤 유전자도 물려받지 않았음을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 그러니까…….”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우오린이 빠르게 달려와 시로네의 품에 안겼다.
“시로네 오빠!”
예상 밖의 상황이었고, 뒤늦게 방에 들어온 간도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오빠가 잘못될까 봐?”
우오린의 간절한 눈망울을 내려다보던 시로네가 그녀의 등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우오린.”
가슴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지만, 우오린의 눈동자에 살며시 충격의 기색이 담겼다.
“얘기는 들었어, 네가 날 살렸다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
키도가 이래도 괜찮냐는 듯 고개를 돌렸으나 리안은 그저 신중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간도가 조심스럽게 일렀다.
“여황님.”
황성 아가노스는 마법, 율법, 물리에 대한 모든 방위 시설을 갖춘 완벽한 요새였다.
또한 우오린은 근, 중, 원으로 구분되는 근위대와 풍장의 보호를 받는 인류 최고의 요인.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방어벽을 무시하고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는 상황이었다.
‘이래서 말리려고 했던 건데.’
우오린이 카즈라에 메타게이트를 남겼다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목숨을 남의 손에 쥐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로네를 이곳에 부르기 위해.’
질투.
잠시 어떤 단어가 떠오른 간도였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황님을 지켜야 한다.’
결정을 내린 그가 다가서려는데 우오린이 먼저 어깨를 웅크리며 천천히 몸을 빼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시로네의 가슴을 살며시 밀어낸 그녀가 조금 전과 다른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강해졌구나, 시로네.”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려움이 없다는 뜻.
간도의 걸음이 멈추고, 시로네는 가면을 벗은 우오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역시 거짓이었나?’
어째서일까?
이미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네가 도와준 덕분이야. 아르망도 그렇고, 모라토리엄에서 구해 준 것도 그렇고.”
시로네가 뒤늦게 물었다.
“그런데…… 말을 편하게 해도……?”
소꿉장난이 끝났다면 눈앞에 있는 건 열여섯 살의 소녀가 아니라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한 테라제였다.
“물론이지. 선수들끼리 어색하게 구는 것도 간지러우니까. 이쪽으로 앉아. 간도, 차를 내오너라.”
처음부터 테라제의 목적에 의해 태어난 존재였기에 차실로 향하는 간도를 바라보면서도 배신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디, 청발은 리안일 테고…….”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우오린이 키도를 보더니 설명을 구하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키도가 이빨을 드러내며 자신을 가리켰다.
“섭식의 키도. 고블린의 왕이다.”
카샨의 지배자를 상대로 이 정도의 칭호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키도였다.
“흐음, 고블린의 왕이라.”
키도의 외모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우오린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되게 웃기게 생겼네.”
“…….”
키도의 표정을 보고 쿡쿡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시로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언젠가는 카즈라에 들를 것이라고 생각했지. 어때, 이제 죄책감은 털어 버렸니?”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난리가 났지만.”
카즈라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동안 간도가 차를 내왔다.
“그들에게 잔인한 짓을 한 것은 알고 있어. 하지만 일말의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았어. 그러지 않고서는 내 삶을 살아갈 수 없을 테니까.”
우오린이 찻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리석구나. 왕자는 네가 죽인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 때문에 죽임을 당했어.”
“그래서 상아탑 후보 중에 꼴등이지.”
시로네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자 우오린이 천장으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신경 쓰지 않으면 그만 아니니, 죄책감 따위? 어떤 연유로 태어났든 너는 너야.”
“하지만…….”
“그래, 쉽게 안 되지. 감정이라는 게 그래. 모든 걸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거든. 선과 악도 감정의 문제일 뿐. 그래서 감정을 지배하는 자가 인간을 지배하는 거지.”
우오린은 다시 고개를 내렸다.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라면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감정을 끌어안은 채 차가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야. 인간이 먼저냐, 진리가 먼저냐. 너와 나네는 거기서부터 갈라지는 거야.”
테라제는 인류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나네는 어떤 사람이야?”
“우선 강하다. 너와 맞붙어도 결과를 장담하지 못할 거야.”
쯔오이보다는 후한 평가였다.
“하지만 나네의 진정한 재능은 다른 데에 있지. 너처럼 모든 것을 살피며 나아가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아. 그래서 아주 빠르지. 얼마나 빠르냐면…….”
우오린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나네가 너를 이긴다.”
첫 번째 평가에서 고작 5초가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구나.”
나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오르캄프와 엘리자의 마음, 너의 마음, 수많은 감정들. 너는 항상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최적의 결론을 따르지. 하지만 나네는 우선 행동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어떤 기상천외한 일이든 일단 시행하고 결론을 도출해. 따라서 깨달음은 정확하고 놀랍도록 빠르다. 그는 그냥 진리를 빨아들이는 기계야.”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표현이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지. 너는 라 에너미의 난수를 사건의 거품으로 소거시켰지만, 나네라면 똑같은 난수로 라 에너미를 받아 버렸을 거야.”
예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경쟁자의 강함에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키도가 우오린을 가리켰다.
“만약 당신이라면? 상아탑 후보 세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투표할 거야?”
우오린이 눈을 갈매기처럼 감았다.
“아하하, 그건 곤란한 질문이네. 당사자 앞에서.”
“어차피 그딴 거 신경 쓰지도 않잖아?”
잠깐의 대화만으로도 우오린이 보통의 인간과 궤가 다르다는 것을 파악한 키도였다.
“별들의 투표 말이지? 나네 열일곱 표, 진성음 아홉 표. 그리고 시로네는 달랑 한 표를 받았고 말이야. 나라면…….”
우오린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 생각에 잠기자 모두의 눈에 긴장한 기색이 감돌았다.
“아마도 나네나 진성음에게 한 표를 주지 않았을까?”
리안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역시 아직은 역부족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평가였기에 흘려들을 수만은 없었다.
“그런데 만약 전 재산을 걸어야 한다면…….”
키도의 두 눈에 다시금 기대감이 차올랐다.
“당연히 나네지. 내 재산이 얼만데. 가장 확률이 높은 쪽으로 거는 게 당연하잖아?”
‘이 여자도 변태군.’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내미는 우오린의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시로네도 침울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강하다는 거구나.’
그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던 우오린이 말했다.
“하지만…… 만약 내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그녀가 시로네를 가리켰다.
“그때는 무조건 너에게 투표할 것이다, 시로네.”
무언가를 깨달은 시로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런 거란다. 아무것도 걸지 않은 남의 의견 따위,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 평판, 돈, 목숨에 따라 생각은 수없이 바뀌게 되지. 네 인생은 오직 너만이 평가할 수 있는 거야.”
시로네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나네에게는 파괴적인 경험이 있다. 진성음에게는 의심하지 않는 강직함이 있지. 물론 둘 다 빠르다. 하지만 너에게는 옳고 그름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이 있어. 그러니 조금 느려도 괜찮아. 그것이 너를 99퍼센트가 아닌, 100퍼센트로 인도해 줄 테니까.”
시로네는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완벽함을 위해.’
“조금 어려운 길을 택했을 뿐이야. 너에게 한 표를 행사한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만약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그것만이 진짜다. 너는 별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어.”
리안은 눈시울이 뜨거워진 시로네를 바라보았다.
‘카샨의 여황은 거대하군.’
세상에서 시로네를 마음으로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것이다.
시로네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고마워, 우오린. 정말로 자신감이 생겼어. 반드시 상아탑 테스트에 합격할게.”
“후후, 당연히 그래야지. 누가 찍은 사람인데.”
“응?”
대놓고 말해 놓고 의뭉스럽게 고개를 젓는 것이야말로 우오린의 자신감이었다.
“아니야. 그래서 이제 본론에 들어가서, 라 에너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은 거겠지?”
“아, 맞다.”
그런 용무였다.
“간도, 종이와 펜을 가져와라.”
간도가 심부름을 하는 동안 시로네가 물었다.
“라 에너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아니, 애석하게도 정확한 위치는 몰라. 대략적으로 추측은 가능하지만.”
“추측?”
간도가 가져온 종이와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우오린이 설명을 시작했다.
“카샨에 있어서도 라 에너미의 위치는 중요해. 그래서 3차 리셋이 시작되는 동시에 역사를 추적했지. 하지만 제대로 한 방 먹었어. 내가 파악한 것도 결국 진짜가 아닌 라 에너미의 사건에 불과했으니까.”
천하의 우오린도 속을 정도였으니 시로네가 라 에너미를 잡은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사용했지.”
“다른 방법이라면?”
우오린이 펜을 휘리릭 돌리며 말했다.
“라 에너미를 제외한 모든 인간의 역사를 전부 조사했다.”
시로네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전부…… 조사했다고?”
백지에 주먹 크기의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상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야.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지만 생물학적인 패턴은 존재해. 이걸 개연성이라고 하지.”
원 안에 수십 개의 점을 찍은 그녀가 펜으로 선을 그리며 연결시켰다.
“어떤 인간은 고향에서 평생을 보내고, 어떤 인간은 세계를 떠돌아다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기도 하고, 집이 망해서 이사를 하기도 하고.”
시로네는 엄청난 속도로 그어지는 선을 바라보았다.
그저 펜을 종이에 대고 낙서하듯 흔드는 듯했고, 원 안에 수많은 선들이 채워졌다.
“이 원이 우리가 사는 세계라고 가정했을 때, 개연성에 따른 인간의 동선은 이토록 복잡해. 다만…….”
선이 계속해서 원을 채워 나가면서 유독 하얗게 비워진 부분을 부각시켰다.
“수천억 단위의 동선을 분석하다 보면 결국 이렇게 개연성이 끊어지는 지역이 나타나기 마련이지.”
펜을 내려놓은 우오린이 팔짱을 끼었다.
“쉽게 말해서, 들어간 적은 있는데 다시 나온 적은 없는 지역. 나는 이것을 인과의 구멍이라 불러.”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
“거기가 어딘데?”
우오린이 손가락 3개를 펴고 말했다.
“제시카. 안드레. 파이타로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보는 이름에, 종이를 바라보던 시로네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래. 세계3대미궁. 이곳에 진짜 라 에너미가 있다.”
라가 있는 곳 (2)
라 에너미를 추적할 수 없었던 우오린은 라 에너미를 제외한 모든 인류의 동선을 추적했다.
“히스토리 서치라고 해 봤자 별거 아니야. 내 기억을 검색해서 일련의 카테고리로 정렬하는 방식이지.”
다만 그 기억의 범주가 인류 전체이기에 대단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의 평생에 겪었던 일들의 단편만을 후세에 전달할 수 있지만 테라제의 기억 전이는 정보의 누수가 생기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인간도 진짜 라 에너미를 만난 적은 없다는 거야. 따라서 남은 것은 나조차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장소, 즉 세계3대미궁뿐이야. 여기에도 없다면 이 행성에도 없는 거겠지.”
시로네는 납득했다.
‘들어간 빈도수에 비해 나온 빈도수가 극히 적은 지역.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