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41
“나에게 크기란 무의미하다.”
에테르 파동을 깨달은 진성음에게 공간이란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는 무한의 고무줄 같은 것이었다.
“정말로 이곳에 라 에너미가 있을까요?”
“상관없다. 세상 전부를 뒤지면 되니까.”
라 에너미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결국에는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거인의 도시도 십 보면 충분할지니…….”
성음이 정신을 집중시키자 에테르의 파동이 전달되면서 수많은 물체들이 감지되었다.
“우선은 일 보.”
에테르 파동-축지.
전방의 풍경이 구겨지듯 밀려들면서 4킬로미터에 가까운 거리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밀려들었다.
“너희들 뭐야!”
2개의 풍경이 이질적으로 맞붙은 경계선 바깥에서 일단의 무리가 무기를 꺼내 들고 성음을 노려보았다.
한 걸음으로 제시카의 첫 번째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나는 진천 제국의 황녀, 진성음이다. 이제부터 제시카는 내가 점령할 것이니 협조를 부탁한다.”
삼보의 근위대가 근엄한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진을 치고 있던 헌터들이 눈을 깜박거렸다.
“황녀? 진천 제국?”
헌터의 리더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크크크. 얘들아, 들었냐? 황녀란다, 황녀.”
물론 성음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미궁 제시카에서 바깥의 칭호 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어이, 얼빠진 황녀야. 너 여기가 어딘지 알아? 아니, 우리가 이 베이스캠프를 차지하기 위해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놈들을 죽였는지 아냐?”
성음이 고개를 돌린 곳에 족히 200명은 되어 보이는 자들의 유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거 애석하군.”
“뭐?”
“내 목적지는 미궁의 끝. 이런 곳에서 지지부진하는 너희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는 것을 말해라. 그러면 조용히 지나가 주마.”
“미치겠군, 진짜.”
굳이 ‘정보는 거의 모든 것’이라는 헌터들의 명언을 떠올리지 않아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얘들아, 오랜만에 몸 좀 풀어야겠다.”
헌터의 살기를 느낀 삼보의 병사들이 병장기를 꺼내 드는 그때 성음이 손을 옆으로 펼치며 나아갔다.
“끼어들지 마라. 이것은 내 싸움이다.”
그런 조건이었고, 삼보가 멈칫하는 틈을 파악한 헌터들이 성음에게 뛰어들어 검을 휘둘렀다.
“죽어라, 멍청한 여자!”
수십 자루의 검이 섬광처럼 휘둘리고.
“커억!”
베기가 끝나는 동시에 리더를 제외한 헌터 전원의 목이 뎅겅 떨어져 나갔다.
“어, 어떻게……?”
리더는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다.
분명 성음을 베었어야 하는 검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각자의 뒤편에서 나타나 자신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다.
‘천하무적.’
문경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였다.
‘공간을 휘어 버리면 어떤 공격도 무용지물. 천하일통을 이룰 사람은 진천의 진성음이다.’
헌터들을 처리한 성음이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고 있는 리더에게 걸음을 옮겼다.
“아는 사실을 말해라.”
“히익!”
“솔직하게 정보를 공유하면 목숨은 살려 주마.”
리더는 몰살당해 버린 동료들의 시신을 살피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여기는 거인의 유적입니다.”
그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제시카는 동심원처럼 퍼지는 10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경계를 넘을수록 구조물의 규모는 커집니다. 6단계부터는 다시 작아진다고 하는데 확인은 못 했습니다. 다만 발굴되는 고대 병기의 질은 월등히 높아질 것입니다.”
“고대 병기는 관심 밖이다. 다만 10개의 구역이라는 것은 일화의 술을 나타내는 것 같구나.”
“그럴 수도 있겠군요.”
천국 역사상 유일하게 10단계를 돌파한 이미르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성음이 리더를 지나치며 말했다.
“약속대로 목숨은 살려 주마.”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목이 잘린 동료들을 보고 있자니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 거지 같은 것들아! 나만 남겨 놓고 가면, 나는 너희 가족들에게 맞아 죽으라는 소리냐?’
1년 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형제보다 깊은 신뢰를 쌓았건만, 웃기려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 손으로 목을 쳐서 죽어 버리다니.
‘미쳐 버리겠네!’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 참는 거야! 어떻게 건진 목숨인데! 그냥 참으면서 쓰레기같이…… 구더기같이…….’
바닥에 떨어진 검이 유혹하듯 손잡이를 내밀고, 자신도 모르게 두 발이 땅을 박찼다.
“살까 보냐아아아아!”
성음의 정수리 위로 날아오른 리더가 검에 혼을 담아 수직으로 내리찍는 순간.
에테르 파동-나곡.
공간이 굴절되면서 그 속에 담긴 칼날의 중앙 부분이 산처럼 높게 휘어졌다.
“…….”
검을 휘두른 자세로 바닥에 착지한 리더는 성음의 키만큼 휘어 버린 칼날을 눈에 담으며 몸을 떨었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뭐야!”
개죽음을 기다리며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동료들이 죽어서 원통한 것인가?”
성음이 천천히 몸을 돌리자 리더가 울상으로 변한 얼굴을 치켜들었다.
“죽여라!”
“아니.”
성음이 리더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짚었다.
“살아라.”
리더의 얼굴이 멍해졌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했다. 복수를 하든, 복수를 위해 평생을 바치든, 나는 너를 죽이지 않는다. 그것이 진천의 황녀, 진성음이니라.”
어떤 위해를 가하더라도 절대로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진성음밖에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얼마나 높은 것인가?’
다시 몸을 일으킨 성음이 에테르 파동으로 다음 경계선을 감지하고 축지를 시전했다.
공간이 또다시 밀려들고, 제시카를 탐색하기 위한 두 번째 발걸음이 내디뎌졌다.
고무줄이 튕기듯 풍경이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며, 리더는 마음속의 원망을 깨끗이 씻어 냈다.
‘복수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
미궁 안드레-제847번 세계.
코드네임이라는 도시에 도착한 시로네는 이마에 숫자가 새겨진 수많은 사람들의 추격을 받고 있었다.
“무수인無數人(셀 수 없는 인간)이다! 잡아라!”
1만 9천 개의 세계 중 어떤 곳은, 다른 세계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진화한 듯했다.
그리고 코드네임은 완벽한 불평등의 세계였다.
“감히 427,621번을 거부해!”
이 도시의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치에 따라 숫자를 부여받으며, 똑같은 수는 하나도 없다.
즉, 가장 위대한 1번부터 427,620번까지의 인간이 전부 숫자에 의해 우열이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미친 세계라니!’
무장을 하고 뒤를 쫓는 자들의 코드 넘버는 23만 번대로, 이 도시의 중산층에 해당했다.
순간 이동을 시전한 시로네는 벽돌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골목으로 뛰어내렸다.
벽에 기대어 있던 거지가 흠칫 놀라며 시로네의 이마부터 살폈다.
“코드가…….”
짧은 시간이지만 이 세계에 적응이 되었는지 시로네도 거지의 이마를 확인했고, 417,631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이 자식! 나보다 열등한 놈이!”
거지가 시로네의 옷을 잡아당겼다.
“내놔! 다 내 거야! 먹을 것도 내놔! 그리고 앞으로 나를 위해 일을 해라! 돈을 가져다 바치라고!”
그때 거지의 목소리를 들은 추격자들이 갑옷을 철컹거리며 골목을 점유했다.
“저기 있다! 잡아라!”
“히익! 23만 번!”
기겁한 거지가 납작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살려 주십시오! 저는 미천한 거지입니다! 제발 죽이지 말아 주세요!”
시로네가 옷깃을 여미며 다시 골목을 내달리자 추격자들이 거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뒤를 쫓았다.
‘대체 숫자가 어쨌다는 거야?’
여태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도시에서 숫자는 절대적이고,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는다.
다만 특별한 경우에는 새로운 숫자를 부여받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교환과 습득이다.
교환은 더 우월한 인간이 열등한 인간과 숫자를 바꾸는 것으로, 보통은 결투를 통해 정해진다.
습득은 훨씬 극단적이어서, 열등한 인간이 우월한 인간의 목을 베는 것으로 관청에 등록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이대로 도망치다가는 끝이 없겠어.’
이곳에서 무수인은 존재만으로 죄악이었고, 시로네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비켜요! 비켜!”
쉽게 도망칠 수 없는 이유는 코드네임의 주민들이 사용하는 기묘한 능력 때문이었다.
‘스피릿 존은 느껴지지 않는데…….’
하늘 높이 뛰어오른 기사들이 시로네를 향해 화염을 집어 던지자 땅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멍청아! 상위가 당하면 어쩌려고 불을 쏴!”
“죄송합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에 코웃음을 치며 시로네가 몸을 날리는데 갑자기 가게의 문이 열렸다.
“이런……!”
아르망의 신체 강화 능력으로 급하게 멈추자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깜짝이야! 뭐야?”
코드네임의 규칙이 짜증 나는 시로네였지만 결국 이마로 시선이 향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진짜 미쳐 버리겠네!’
훤칠한 이마에 97번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무엇을 얻는가? (2)
“랭……!”
누군가가 소리쳤다.
“랭커다!”
여자의 이마에 적혀 있는 97번이라는 숫자를 본 순간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렸다.
“고귀한 분이시여!”
뒤를 쫓고 있던 추격자들도 이미 눈치를 챘는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땅에 사지를 붙인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시로네가 예측하기로 도시의 인구수는 427,620명이고 눈앞의 소녀는 그중에서 아흔일곱 번째로 우월한 자였다.
“무슨 일이야, 파니카?”
-코드네임 97번 파니카.
뒤늦게 상점에서 나온 비슷한 또래의 소녀가 파니카에게 다가오더니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머,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어?”
그녀의 이마에는 파니카보다 낮은 113번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고, 그 사실을 토대로 시로네는 추측했다.
‘인간미는 남아 있는 건가?’
물론 파니카가 113번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한다면 무슨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모르겠어. 이 남자가 갑자기…….”
시로네를 가리킨 파니카는 이마에 아무런 숫자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어라? 무수인?”
설명이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주위에 엎드린 자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랭커에게 걸리면 끝장이다.’
파니카는 심심풀이로 사람을 죽이는 성격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누가 알겠는가?
오늘따라 머리가 푸석하거나, 음식이 맛이 없었거나, 그냥 오늘따라 이유 없이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것이다.
“너.”
파니카가 아무나 가리키자 지목당한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네! 네! 97번 님!”
324,801번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는 그의 낯빛이 죽을병에 걸린 사람처럼 어두워졌다.
“무슨 일인지 설명해 봐.”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몸을 일으키는 시간 동안 생각을 정리한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이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흐음, 그러니까 도시에 무수인이 들어왔고, 그 사람이 바로…….”
파니카가 그제야 시로네에게 말을 걸었다.
“너라는 거지?”
“처음부터 나에게 물어보면 되잖아?”
기왕에 높은 숫자를 만난 김에 시로네도 여기에서 정보를 얻을 생각이었다.
“어라? 말이 다르네? 다른 도시에서 왔나?”
가끔 다른 도시에서 넘어온 이방인이 무수인이 되어 코드 네임에 흘러드는 경우가 있었다.
세계는 달라도 생각은 똑같았기에 시로네는 인공두뇌 외(언어 통역 버전)를 소환했다.
‘과연 성공할까?’
시로네가 양손으로 들어 보라는 시늉을 하자 파니카는 두려운 기색 없이 외를 붙잡았다.
‘엄청난 자신감이다.’
코드 외에 두려운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맞아. 이 도시는 처음이야. 그래서 알고 싶어. 사람들의 이마에 숫자가 적혀 있는 이유가 뭐야?”
외가 진동하면서 언어를 침투시키자 파니카의 눈에 흥미로운 감정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