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44
“크아아아아아!”
포효의 굉음에 동굴이 뒤흔들렸다.
“크아아앙! 크아아앙!”
드래곤의 포효는 하나가 아니었고, 음파의 손실 없는 메아리처럼 연달아서 뇌리를 강타했다.
“크으윽!”
소리로 가해지는 폭력에 시로네가 어금니를 깨물고 미토콘드리아 이브를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나와라, 다른 세계의 인간.”
나가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거부하겠다면 동굴에 뇌전의 브레스를 쏴 주마.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가자.”
서로 두 손을 꽉 붙잡고 동굴 밖으로 걸어가자 드래곤의 얼굴이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났다.
‘산 넘어 산이네.’
최후에는 전투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이미 수백 마리의 드래곤들이 하늘을 잠식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하잖아.’
현실에서도 드래곤의 개체 수는 천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둘 이상이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복종하라. 우리의 코어가 오고 계신다.”
벼락을 부리는 드래곤이 그렇게 말하며 날아오르자 지평선 저 멀리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밀려들었다.
“그림자가 아니야.”
검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고, 드래곤들의 거체가 작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덩치였다.
쿠우우우우웅!
착지의 충격으로 땅이 울리고, 대략 20미터 길이의 목을 높게 치솟은 드래곤이 까마득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세계에서 온 인간이여…….”
목소리에 담긴 힘이 울티마 시스템을 통해 전달되자 시로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여태까지 만난 드래곤들과는 차원이 다른 언어의 힘에는 만물을 압도할 정도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나는 무등無等(등급이 없는)룡 카라토르사. 어찌하여 세계의 정보를 교란하는가?”
“설마…….”
무등룡 카라토르사.
시로네가 살던 세계에서 전설 속의 신화로만 존재하는, 드래곤의 왕이었다.
***
미궁 안드레-제847번 세계.
“권능이라고?”
코드네임 97번 파니카는 신전으로 향하는 길에 시로네가 궁금해하던 것들을 말해 주었다.
“응. 신의 권능에 얼마나 적합하냐에 따라 우열이 나뉘고 이마에 코드가 새겨지지.”
“그럼 중복도 있는 거야? 예를 들어 내가 50번이라면, 이미 50번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네가 50번? 깔깔깔!”
폭소를 터뜨린 파니카가 입을 막았다.
“미안. 너무 황당한 예시라서. 어쨌든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기면 네 뒤로 전부 순위가 하나씩 밀려나게 되겠지.”
“문신 같은 게 아니구나. 코드 말이야.”
파니카가 훤칠한 이마를 가리켰다.
“당연하지. 이건 신이 직접 새기는 징표야. 그래서 랭커들은 이마를 드러내고 있어. 지배자의 상징이니까.”
이마 선을 따라 앞머리를 깎은 형태가 우스꽝스러웠으나 이 도시의 시스템하에서는 당연한 유행이었다.
“그렇게 순위에 따라 권능을 쓸 수 있다는 거지?”
“응. 높을수록 더 좋은 권능이 생겨. 40만 아래는 아무 권능도 없지만, 30만대에만 들어가도 힘의 증폭이 일어나서 무거운 바위도 번쩍 들 수 있어.”
순위에 따라 물리력이 달라진다면 여태까지 체제 전복이 일어나지 못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20만대에 들어가면 원소를 다룰 수 있어. 불을 만들거나, 물을 얼리거나. 10만대에 들어가면 두 가지 원소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지.”
끝없이 올라가는 능력의 피라미드를 상상하며 시로네는 사람들이 97번을 보고 겁을 먹은 이유를 깨달았다.
“그럼 랭커라는 것은……?”
“1위부터 100위까지. 최강의 권능이라 불리는 ‘신의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이야. 나도 그렇고 말이야.”
파니카는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다.
“기본적으로 랭커는 101위까지의 모든 능력을 다루지만 특별한 한 가지가 더해져. 내 권능은 구상물체.”
파니카의 손에 사과가 붙잡혔다.
“생각하는 것을 물체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야.”
파니카가 맛을 보라는 듯 건네자 시로네가 의심의 눈초리로 사과를 아삭 베어 물었다.
‘진짜 사과잖아?’
“원하는 건 뭐든지 만들 수 있어. 보석, 무기, 심지어 폭발성 물질까지.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좀 시들해지더라고. 그래서 요즘은 쇼핑에 푹 빠져 있지.”
중산계급이 사는 거리에 랭커가 등장했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상하다. 정말 이상해.’
권능이라 부르는 능력은 시로네가 알고 있는 마법, 심지어 규정외식과도 달랐다.
사과를 만들어 내는 식물 마법사는 분명 있겠지만 그저 생각한다고 모든 게 이루어지는 건 신만이 가능했다.
‘정말로 신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리며 신전에 도착하자 도시의 상위 계급들이 산책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500등 이상부터는 다들 여기서 시간을 보내. 누구나 올 수 있는 장소지만 아무래도…….”
순위가 낮은 자들은 괜히 기웃거렸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곳이었다.
467번, 311번, 109번이 보였고 37이라는, 이제는 기겁할 정도로 순위가 높은 남자도 한가로이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이야, 파니카. 누구야, 애인?”
신전의 문 앞에서 앞머리만 짧게 깎은 상태로 옆머리를 길게 내린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걸어왔다.
‘9번…….’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 중 9위였다.
“코드네임 9번 게일이야. 저 인간은 조심하는 게 좋아.”
파니카에게 다가온 게일이 시로네를 흘끔거렸다.
“이 녀석은 머리 꼴이 이게 뭐야? 랭커가 아닌가? 어디서 사귀었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는데.”
신전에 무수인이 왔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는 게일이었다.
“내가 누구를 사귀든 무슨 상관이야? 바쁘니까 비켜. 드라인 씨 신전에 계시지?”
파니카는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바빠? 출근 도장은 찍어야지.”
파니카의 턱을 붙잡은 게일이 입을 맞추자 시로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만둬! 지금 뭐 하는……!”
파니카가 손바닥을 내밀어 시로네를 말리고, 게일이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하하! 왜, 기분 나빠? 그러면 복수하든가. 그러고 보니 너는 몇 번이야? 100번대는 되나?”
순간 위태로움을 느낀 파니카가 목숨을 걸고 게일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이제 충분하잖아! 적당히 좀 해!”
“애인 앞이라고 되게 까칠하네? 붙어 볼까? 어쩌면 네가 9번을 차지할 수도 있겠지.”
서열이 전부임에도 상하 간에 친분이 가능한 이유는 상위 코드를 얻을 수 있는 ‘교환과 습득’ 시스템 때문이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실력의 격차는 크지 않기에 랭커끼리는 다툼을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하지만 게일은 안 돼.’
그럼에도 파니카가 게일에게 입술을 내줄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평범한 랭커가 아닌, 서열 10위 안에 들어가는 레전더리 랭커인 탓이었다.
서열 100위의 랭커들은 최고의 권능인 ‘신의 지식’을 구사할 수 있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10위 안에 들게 되면 ‘신의 은총’이라는 권능을 추가로 부여받게 된다.
‘싸우면 무조건 진다.’
어쩌니 해도 결국 가장 강력한 힘은 코드였고, 파니카는 게일에게 찍힌 운명을 원망할 뿐이었다.
“숫자 하나 새겼다고 너무하는 거 아냐?”
시로네의 말에 게일이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네 못생긴 이마에 새겨진 숫자 말이야. 어쨌든 너도 1등은 아니잖아?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푸하하하하!”
게일이 웃어 젖혔다.
“하긴. 너처럼 낮은 놈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파니카 정도면 엄청난 특혜를 받는 거야. 아마 길거리에서 마주친 잘생긴 남자는 전부 가지고 놀아 봤을걸. 너도 그렇고.”
“나는 그렇지 않아!”
파니카가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뭐, 그거야 취향 문제라고 해도, 어쨌든 위로 96명밖에 없다는 건 엄청나게 편한 삶이지. 1만 번대 애들도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아. 너 따위가 동정할 대상이 아니야, 코드네임 97번이라는 건 말이야.”
파니카는 불행한가?
만약 그녀가 불행하다면, 97번보다 아래에 있는 42만 7천명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그래도 용납할 수 없어. 강자든 약자든,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는 건 나쁜 짓이야.”
“하아. 듣자 하니 진짜 짜증 나네.”
이마를 어루만지던 게일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더니 시로네의 앞머리를 들어 올렸다.
“대체 몇 번인데 잘난 척을…… 응?”
숫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게일이 분노의 눈빛으로 파니카를 돌아보았다.
“너…… 감히 신전에 무수인을 데려와?”
“무슨 소란이지?”
신전 쪽에서 들린 목소리에 모든 랭커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앞머리를 단정하게 기른 선한 인상의 남자가 계단을 내려오자 파니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라인 씨!”
코드네임 1번 드라인.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을 수 있는 절대자였다.
“오랜만이구나, 파니카. 무슨 일인지 말해 보렴.”
파니카의 설명을 들은 드라인이 시로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무수인이라니, 난감했겠어. 가끔 코드네임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이 있지. 나를 따라오렴. 신께서 너의 위치를 정해 주실 테니까.”
게일이 시로네를 돌아보며 입술을 이기죽거렸다.
“각오해라. 일단 코드만 받으면 아무리 드라인 씨라도 참견하지 못할 테니까. 그때는 처참하게 밟아 주지.”
시로네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올라가며, 파니카가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낮은 번호가 나와도 내가 친구가 되어 줄 테니까. 지내기에 힘들지는 않을 거야.”
“응, 고마워.”
이제 와 딱히 번호는 상관없을 듯했으나, 차가운 서열의 세계에서 그녀의 말은 마음을 따듯하게 했다.
무엇을 얻는가? (5)
***
황성 아가노스.
정신없는 걸음걸이로 빠르게 방으로 돌아온 우오린은 방문을 쾅 하고 닫아 버리고 화장대를 손으로 짚었다.
“하아! 하아!”
아직도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째서 심장이?’
테라제의 심장박동 수가 정상 수치 이상으로 뛰는 경우는 800년 만에 처음이었다.
“안 돼! 안 돼!”
수천 년의 준비 끝에 쌓아 올린 제국이었고 수천 명의 유전자를 통해 만들어 낸 최고의 육체였다.
정신은 어떠한가?
인간을 초월한 정신은 이 세계의 모든 감정을 지배하며, 역으로 어느 누구도 그녀의 감정을 건드릴 수 없었다.
“주지 않을 거야. 누구도 내 마음을 얻을 순 없어!”
간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황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우오린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기에 간도는 거의 겁에 질려 있었다.
“지금 끝을 내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면 시로네를 제압할 수단을 잃게 됩니다.”
“…….”
우오린은 화장대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마음에 들어 할까?’
시로네가 이 모습을 판단할 거라고 생각하자 현기증이 일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여황님.”
우오린이 갑자기 몸을 돌렸다.
“간도, 나 못생겼어?”
“네?”
간도는 잔뜩 상기되어 있는 우오린의 표정을 보고 의아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예쁘게 생겼어? 얼마나 예쁘게 생겼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세상에 존재하는 우월한 유전자를 모조리 긁어모아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외모를 얻은 우오린이었다.
‘절대적 자신감. 완전무결한 인간.’
그런 테라제가 자신의 외모를 의심하고, 심지어 남에게 묻는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이건 위험하다. 아니, 위험하지 않아. 그녀는 여전히 강력하고, 여전히 완벽하다.’
테라제는 테라제.
간도는 영광의 제국에 새겨진 아주 작은 균열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 못했다.
***
시로네는 파니카를 따라 신전으로 들어갔다.
요르교의 작은 예배당처럼 둥그렇게 홀이 있는 곳에 코드네임의 신으로 추정되는 조각상이 서 있었다.
“이카엘?”
빼어난 이목구비와 활짝 펼쳐진 빛의 날개, 머리 위에 떠 있는 성광체는 분명 천사의 조각상이었다.
‘아니, 착각인가?’
천사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데다가 눈앞의 조각상은 세부적인 표현이 생략되어 있어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익숙하지?’
마치 매일매일 이 조각상을 만지고 닦았던 것처럼 친숙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코드네임 1번, 드라인이 시로네의 옆에 나란히 서서 조각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들의 여신 아타락시아.”
시로네의 고개가 홱 하고 돌아갔다.
“아타락시아?”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도굴꾼 아리우스가 모태 심리에 침투하여 훔치려고 했다는 하나의 조각상.
이카엘이 빙의를 통해 직접 시로네의 정신에 놓아두고 갔던 아타락시아의 원천 개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