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45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시로네가 의아해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드라인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코드네임은 아타락시아 여신께서 주관하시는 도시. 그래서 다른 도시의 사람들은 코드가 없지. 너처럼 말이야.”
아타락시아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인 드라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시로네의 어깨를 짚었다.
“걱정하지 마. 이 도시에 들어온 이상 누구나 여신의 품에 안길 수 있으니까. 그녀의 은총을 받으면 인간의 몸으로 기적을 행사할 수 있지. 수명이 늘어나거나, 병이 치유되거나, 신의 지식을 얻거나 말이야.”
코드네임 9번, 게일이 코웃음을 쳤다.
“아무나 얻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지만. 지금이라도 열심히 여신께 기도를 드려 봐. 적어도 20만 번대 이상은 되어야 인간답게 살지 않겠어?”
시로네가 게일을 돌아보며 쏘아붙였다.
“순위가 낮아서 불행한 게 아니야. 그들이 불행한 건 너 같은 인간들이 괴롭히기 때문이지.”
“하하하! 말이 많아졌는데? 솔직히 두렵다고 해. 어차피 어떤 코드를 받든 나보다는 아래일 테니까.”
42만 명이 넘는 사람 중에 아홉 번째로 높은 코드를 받는다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카엘이라는 존재가 기대감을 주기는 했지만 기준을 모르는 이상 순위를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코드를 받을 수 있죠?”
“방법은 간단해. 여신 앞에 무릎을 꿇고 진심을 다해 기도를 드리는 거지. 우리는 이것을 권청勸請]이라고 불러.”
어떤 코드를 받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코드네임에서 권청은 가장 중요한 의례였다.
파니카가 살며시 귀띔했다.
“랭커들만 아는 사실이지만 권청은 몇 번이고 할 수 있어.”
“뭐? 그럼 매번 다른 코드를 받는단 말이야?”
“응. 그래서 랭커들이 신전에 모여 있는 거지. 중산계급이 여기에 왔다가는 죽을 거야.”
시로네가 무수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게일이 살기를 품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다만 랭커들 간에 순위가 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어. 격차가 크지 않으니까. 오히려 순위가 추락하는 경우가 많지.”
42만 명 중에서 1천 등 안에 들어가는 삶이라면 굳이 도박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중산계급부터는 다르겠지. 결국 계급의 역전을 막으려고 전부 여기에 모여 있다는 거네.’
시로네 또한 코드네임 97번 파니카 정도가 아니었다면 발도 못 붙였을 터였다.
파니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권청의 정석은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는 거야. 하지만 특별한 방법으로 높은 코드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도 있어. 어떤 사람은 옷을 전부 벗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신전 앞에서부터 한 걸음마다 절을 하고 들어오기도 해.”
파니카의 목소리가 더욱 줄어들었다.
“나는 10일 동안 굶은 다음 권청했어.”
권청에 대한 정확한 기준을 알지 못하는 이상 인간이 시도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야.’
이들에게 코드네임은 유일한 세계지만 시로네에게는 거핀이 봉인한 1만 9천 개 중의 하나일 뿐이다.
기존의 시공간이 격리되어 전혀 다른 세계로 발전했다면 이곳은 아주 오래전 이카엘이 머물던 시대였을 것이다.
‘이카엘…….’
앙케 라에게 신뢰받는 대천사장으로서 인간들의 세계를 멸망시켰던 무시무시한 역사를 시로네는 알고 있었다.
‘거핀은 무슨 생각으로 그 시대를 봉인한 것일까?’
시로네가 시간을 끌자 게일이 다그쳤다.
“어이, 빨리해. 무수인 주제에 코드네임에서 태어난 자들하고 똑같이 하려고 하지 말란 말이야!”
권청의 방식이야 미신 같은 것이지만 어떻게든 낮은 코드를 받기를 원하는 게일은 마냥 기다려 주지 않았다.
“게일!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잖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지.”
파니카가 편을 들어 주었으나 사실 시로네는 권청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시작할게.”
이카엘의 조각상 앞으로 다가간 시로네가 손을 내밀었다.
“어이, 그건…….”
불경스러운 권청은 엄금하기에 게일이 앞으로 나섰으나 드라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괜찮아. 여신께서 판단하실 일이다.”
여신의 분노를 사 봤자 시로네의 손해라는 생각에 게일도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시로네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이카엘, 그만 돌아가요.”
인공두뇌 외가 진동하며 시로네의 말을 통역했으나 코드네임의 사람들에게는 주문처럼 괴상한 말이었다.
“어이, 무슨 헛소리야? 그리고 이카엘이라니? 자애로운 아타락시아 여신님에게…….”
게일이 참지 못하고 다시 나서려는 그때, 조각상이 떨리더니 신전이 진동했다.
“뭐, 뭐야!”
코드네임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사건에 랭커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 여신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던 드라인이 눈물을 흘리는 조각상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흐으으윽!”
시로네의 이마에 코드가 새겨지기 시작하자 랭커들이 신전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고 드라인과 게일, 파니카는 부옇게 빛에 휩싸인 코드만 뚫어지게 살폈다.
‘이카엘! 이건……!’
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증폭을 느낀 시로네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쳐드는 순간.
“으아아아아아!”
조각상이 산산조각 부서지더니 시로네의 정수리 위쪽으로 거대한 아타락시아가 펼쳐졌다.
‘끝없이 확장되고 있다!’
어떤 것도 마법진을 통과하지 않았지만 증폭의 개념만으로 세계가 뒤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렇구나.’
이마의 코드가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코드네임의 비밀이 빛의 속도로 스며들었다.
‘이 세계는…….’
시로네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랭커들은 이마에 새겨진 코드를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저, 저게 뭐야?”
427,621
시로네의 코드를 확인한 랭커들이 웅성거렸다.
“최하층민이잖아? 아니, 잠깐만. 427,621번이면 제일 마지막 숫자 아니야?”
여태까지 없었던 권청의 반응이었기에 노심초사했던 드라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조금 전은 여신의 저주였던 건가?’
“푸……!”
게일이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꼴등! 꼴등이잖아?”
동정심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극적인 숫자 앞에서 랭커들도 웃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진짜 미치겠네. 살면서 저런 숫자는 본 적도 없다고. 이제부터 네가 어떤 인간인지 가르쳐 주지.”
파니카가 게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해! 가뜩이나 힘든 사람에게!”
도시에서 가장 비참한 삶을 선고받은 사람에게 굳이 해코지를 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아니, 그게 아니지. 꼴등이 신전에 왔다는 것 자체가 랭커에 대한 반항 아니야? 여기서 본보기를 보여 주겠어.”
파니카를 옆으로 치운 게일이 양해를 구하듯 눈빛을 날리자 드라인이 물러섰다.
‘나를 놀라게 한 벌이다.’
자비라는 것도 1등이 유지될 때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 그럼 어디부터 부러뜨려 줄까?”
게일이 시로네의 멱살을 붙잡으려는 그때, 랭커들이 갑자기 당황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야! 왜 이래?”
각자의 이마에 새겨진 코드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드라인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건 코드 변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권능이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엄청난 두통이 밀려들었다.
“으아아아아! 머리! 머리가!”
주위에 있던 랭커들이 드라인의 이마에 새롭게 새겨진 숫자를 보고 경악했다.
427,622
“서, 설마!”
드라인부터 시작된 연쇄 작용이 게일에게 도착하면서 그의 코드가 427,630번으로 변환되었다.
“아파! 머리가 아파!”
코드가 높은 순서대로 바닥에 쓰러진 랭커들이 하나같이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안 돼! 내 권능! 어떻게 얻은 권능인데!”
도시에 사는 42만 7,620명의 코드가 시로네를 기점으로 모조리 한 칸씩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권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코드네임의 모두가 평등해졌다는 뜻.
도시 전역으로 퍼져 나간 비명이 그치면서 신전에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들었다.
“아니야. 꿈일 거야.”
조금 전까지 랭커였던 자들이, 혐오했던 천민의 숫자를 새긴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한낱 꿈이라도…….”
시로네가 다가오자 게일이 엉덩이로 물러섰다.
“히익!”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겁에 질려 몸을 부르르 떠는 게일을 그대로 지나친 시로네는 조각상이 파괴된 자리를 돌아보았다.
기존의 아타락시아는 파괴되었으나 또 하나의 아타락시아는 남아 있었다.
‘여기는 이카엘의 꿈.’
거핀이 격리시킨 제847번 코드네임의 기준은 이카엘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아타락시아, 시로네가 신전 바깥에 쓰러진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기준이다.”
시로네의 세계에 권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해방의 열쇠 (1)
미궁 안드레-제283번 세계.
13번째 밤을 따라 들어간 가네트 콜로니는 어떤 인간의 도시보다도 번영한 왕국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을 만들어도 괜찮겠어?”
시로네가 샤이닝 마법을 시전하자 13번째 밤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관심을 껐다.
빛을 만드는 생물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통제가 잘되고 있네.’
방은 거대했으며 개미들은 대부분 농땡이를 부리지 않고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이쪽이다.”
일개미들이 모여 있는 포자 농장을 지나 부화실 아래로 들어가자 13번째 밤이 눈에 띄게 긴장했다.
“이제부터는 귀족들의 구역이야. 몸가짐을 조심히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개미 사회에서 귀족들이란 수개미로, 평생 일하지 않고 오직 혼인비행만을 기다리는 계급이었다.
‘정말로 많다.’
수많은 귀족 개미들이 각자의 방에서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개미들은 포획한 노예들을 괴롭히고, 어떤 개미들은 진딧물을 잔뜩 모아 와서 흥청망청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13번째 밤은 그들 모두에게 정중하게 페로몬을 발산하며 동굴을 전진해 나갔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신경 쓰지 않았으나 갑자기 천장의 굴을 뚫고 멋진 날개를 망토처럼 두른 귀족이 나타났다.
“병사가 여기에는 어쩐 일이냐?”
“다르앤 님.”
가네트 콜로니에서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는 건 귀족뿐이고, 수개미들의 이름은 앤으로 끝난다.
“새로운 종을 포획했습니다. 가네트 여왕님에게 데려가는 길입니다.”
13번째 밤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새로운 종을 포획했다고?”
과연 다르앤이 보기에도 시로네의 생김새는 여태까지 확인되지 않은 종류였다.
“흐음, 상당히 불편한 구조로군.”
다르앤이 시로네의 외형을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기능적인 측면에서였다.
“내가 실험을 해 보겠다. 이 종을 놔두고 가라.”
13번째 밤이 극구 반대했다.
“이자는 그런 종이 아닙니다. 송구스럽지만…… 저와 같은 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르앤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오르자 시로네는 온몸의 혈액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재수 좋게 살아남은 주제에, 네가 특별한 개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귀족들은 대부분 13번째 밤을 고깝게 여겼다.
우선 그는 일련번호로 구분되는 다른 병사와 달리 여왕에게 받은 고유의 이름이 있었다.
또한 가네트 콜로니가 처음 열렸을 때에 태어나 여태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병정개미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왕님께서 제가 사용하는 것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기에…….”
가네트 콜로니에서 13번째 밤을 제압할 개미는 없지만 쿠데타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귀족들은 번식할 수 없는 13번째 밤을 대신해 공주와 혼인하여 수많은 자식들을 낳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혼인비행이 있기 전에 여왕의 명령은 절대적이기에, 다르앤도 분을 삼키며 시로네에게 더듬이를 겨누었다.
“여왕님의 마음에 들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조만간 내가 너의 몸을 끊어 줄 테니까.”
번식 가능한 시로네의 육체는 수개미들에게 죽음과 맞먹는 불쾌감을 전달하고 있었다.
다르앤이 거칠게 몸을 돌려 천장의 굴을 파고 다시 사라지자 13번째 밤이 시로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죽을 수도 있다고? 돌아가고 싶으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최악의 사태에서는 개미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수만 마리의 개미 떼와 싸워야 할 수도 있다.
“괜찮아. 이미 각오하고 들어온 거니까.”
살아서 돌아가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차피 시로네가 돌아가야 할 곳은 지상이 아니었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여왕을 만나야 해.’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는 아무것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선명해졌다.
‘알 것 같아, 이 세계의 봉인을 푸는 방법.’
마치 다른 세계의 또 다른 자신이 힌트를 전해 주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왕실이다.”
콜로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서른두 갈래로 길이 뻗어 있는 거대한 동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개미보다 월등히 거대한 공주 개미들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것을 확인한 13번째 밤이 말했다.
“병사는 가네트 여왕님의 방에 들어갈 수 없어. 알현을 하려면 서열 1위, 메로트 공주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