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47
“나는 마르코다. 두 딸의 아버지이자 노모의 아들이며, 제이니의 남편이기도 하지.”
의도가 짐작이 가는 이상한 소개에 시로네의 목소리도 조금은 까칠해졌다.
“그런가요? 저는 건사할 식구가 없어요.”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그랬다.
“오해하지 마라. 이건 화이트의 규칙이니까. 불만이 있다면 여기서 투표로 결정해도 좋다.”
규칙을 들을 필요도 없이 투표에 들어가는 순간 몰표가 나오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용건이나 말씀해 주세요.”
“우리 마을을 화이트블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매년 율법의 대결이 있을 때마다 독특한 달이 뜨기 때문이지.”
마르코가 집마차의 창문을 열고 바깥을 가리켰다.
“율법이 변하고 있는 게 보이나?”
창밖으로 고개를 내민 시로네는 마치 월식처럼 달의 절반이 어둠에 가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대결이 시작되면 이등분되어 있던 빛과 어둠의 영역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물방울의 형태로 변하지.”
시로네는 태극의 섭리를 떠올렸다.
“그 달을 화이트블랙이라 부른다. 언제부터 저 달이 떴는지는 우리도 몰라. 중요한 것은 아나키 산의 정상에서 달빛을 받지 않으면 웨폰을 얻을 수 없다는 거야.”
“웨폰?”
마르코가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화이트와 블랙의 대표가 달빛을 받는 것으로 백스무 장의 웨폰이 아나키 산의 전역에 뿌려진다. 카드의 형태고, 소지하는 것으로 특별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어.”
율법의 작용이었다.
“카드의 종류는 두 가지. 직업 카드와 무기 카드. 직업 카드는 총 스무 장이고 참가자 전원에게 자동 분배된다. 어떤 직업이 걸리느냐에 따라 신체 능력이 완전히 달라져.”
“예를 들자면 어떤 직업이 있죠?”
“모든 직업이 있다. 그중에서 매년 20개의 직업이 랜덤으로 뿌려지는 거지. 만약 의사라면 상처 회복 능력을, 검사라면 강력한 육체 능력을 얻을 수 있다.”
어느 정도 운이 작용하는 부분이었다.
“남은 백 장의 카드는 다양한 무기들이다. 양도할 수 있고 빼앗을 수도 있지만, 파괴는 불가능해. 결국 20명의 참가자들은 한 장의 직업 카드를 얻은 다음 다양한 무기 카드를 조합해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시로네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개인의 액싱과는 차원이 달라. 이건 거대 율법이다.’
가히 신의 영역에서 맞물리고 있는 율법의 수레바퀴에서 거핀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문제는 화이트블랙의 달이 조화되는 시점이다.”
마르코가 말을 이었다.
“웨폰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각 구역의 대표자가 달빛 아래에서 선서를 해야 돼. 만약 선서를 하지 못하면 우리 쪽은 웨폰이 발동되지 않으니까.”
“그 선서를 저더러 하라는 거군요?”
뻔뻔하다면 뻔뻔한 요구였지만, 어차피 9명의 참가자들은 시로네를 지목할 터였다.
“블랙에서도 웨폰은 필요해. 가장 약한 자가 나올 테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정말로 위험하겠군.’
화이트의 참가자들은 웨폰을 얻기 전까지는 행동에 나서지 않을 테지만 블랙 입장에서는 숫자를 줄일 절호의 기회였다.
‘블랙과 대등하게 싸우려면 화이트는 웨폰이 반드시 필요해. 나는 희생양이라는 건가?’
모두가 숨을 죽이며 결정을 기다리는 가운데 시로네가 의자에 털썩 등을 기대며 말했다.
“알았어요. 제가 할게요.”
안도의 한숨 소리가 들렸고, 거기에 서운함을 느낀 시로네가 인상을 찡그리며 한쪽 눈을 떴다.
‘응?’
마르코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여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시로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리즈 씨라고 했지?’
미용사로 일하고 있다는 게 아는 것의 전부였다.
그녀가 입술 모양을 바꾸며 말을 전했다.
‘고마워.’
아나키 산에 도착하자 마르코가 말했다.
“최대한 빨리 정상으로 올라가야 해. 조금이라도 늦으면 블랙 놈들이 진을 치고 있을 테니까.”
‘언제는 안 위험할 거라더니.’
어차피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위험한 곳에 들어가야 했기에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서는 어떻게 하면 되죠?”
“화이트블랙의 달빛 아래에서 자네가 화이트 소속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돼. 순식간에 끝날 거야.”
“그럼 출발할게요.”
시로네가 정상으로 빠르게 달려가자 남은 9명의 참가자들은 그제야 본격적인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일단 웨폰을 얻으면 전에 말한 지역으로…….”
누구도 시로네가 돌아올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로네가 정상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화이트블랙의 조화가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이것도 율법인가?’
하늘에서 직사로 내리쬐는 달빛이 지상에 직경 수십 미터의 원을 그대로 찍어 내고 있었다.
빛과 어둠이 태극의 형태로 맞물린 영역에서 시로네는 빛이 내리쬐는 곳으로 들어갔다.
‘블랙은 어떤 작전이지?’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이미 도착해 있다는 것은 살기로 느낄 수 있었다.
달빛으로 그린 지상의 원이 더욱 선명해지더니 마침내 완벽한 흑과 백의 조화를 이루었다.
“시작이다!”
사방에서 블랙의 주민들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시로네의 정면에서 누군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기회다! 여기서 잡는 거야!’
블랙이 웨폰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율법의 균형은 순식간에 화이트 쪽으로 기울 터였다.
“으아아아앙!”
검은 달빛을 받으며 들어온 사람은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못했을 것 같은 남자아이였다.
“뭐……!”
시로네가 황급히 공격을 멈추자 아이가 눈물을 쏟으며 바닥에 엎드렸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화이트블랙의 빛과 어둠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거대한 빛의 기둥을 하늘 높이 쏘아올렸다.
백 장의 별빛이 퍼져 나가고, 직업 카드 스무 장이 유도탄처럼 휘어지며 저마다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위치가 노출된다.’
빠르게 허리를 뒤틀자 수풀 속에서 일곱 장의 카드가 빛을 잃어 가는 게 보였다.
‘아이까지 8명. 2명 빼고 다 모여 있다는 건가?’
시로네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내 카드는…….’
아이를 선발대로 내보낸 분노는 미루어 둔 채, 시로네는 직업 카드를 확인했다.
‘구도자?’
세부적인 특성을 분석할 겨를도 없이 수풀 속에서 블랙의 참가자가 날아들었다.
“야호! 대박이다! 일단 희생양부터 처리하고!”
무슨 직업이 걸렸는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고, 벌써부터 무기 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가라! 무력폭탄!”
카드가 번쩍 빛나더니 시로네와 아이를 향해 수십 개의 폭탄이 퍼부어졌다.
“으아앙! 살려 주세……!”
콰콰콰콰콰콰콰쾅!
엄청난 폭음이 산의 정상을 뒤흔들고, 블랙의 참가자가 광기의 폭소를 터뜨리며 소리쳤다.
“크하하하! 이걸로 9명 대 9명! 공평하지?”
“헛소리하고 있네.”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참가자가 고개를 돌린 순간, 포톤 캐논이 복부를 강타했다.
“커어어어억!”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괴성을 지른 남자가 수십 미터를 날아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으아아아아……!”
비명 소리가 멀어지고, 아이를 품에 안은 시로네가 매서운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다.
‘살기가 사라졌어. 도망쳤다.’
상황 판단이 신속한 블랙의 참가자들이었다.
율법의 대결 화이트블랙.
생존자 : 19명.
해방의 열쇠 (3)
***
미궁 제시카.
최종 10단계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는 거인의 도시에서 진성음은 6단계의 경계선 앞에 도착했다.
내로라하는 조직들이 10년을 준비해도 이루어 내지 못한 성과였고, 미리 이곳을 선점하고 있던 볼케이노 탐험대 200명은 자존심이 상했다.
“포위진을 펼쳐라! 반격의 빌미를 주지 마!”
세계3대미궁 중의 하나인 제시카의 인류 최고 탐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그들의 실력은 단연 업계 최고였다.
“공주님! 위험…… 크윽!”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열 섬광포에 삼보의 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제길! 고대 병기라니!’
볼케이노가 장착하고 있는 어깨 갑옷은 키트라는 고대 병기로, 중앙의 렌즈에서 열 섬광포를 출력하는 무기였다.
‘더 짜증 나는 건 중력 붕괴야.’
100명에 달하는 볼케이노의 대원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포격을 해 대자 일대가 초토화되었다.
‘공주님을 찾아야 돼! 내가 지켜야 한다!’
이곳에 파묻혀 있는 고대 병기는 천국의 신민들이 사용하는 시그나나 엑스드 같은 원시적인 기술이 아니었다.
현대의 기술로 구현이 불가능한 현상들이 성음을 위협하는 상황에 문경은 심장이 벌렁거렸다.
상아탑 후보 중에서 전투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전 경험은 태부족.
생의 대부분을 황성에서 보낸 그녀가 날고뛰는 전투의 프로를 상대로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공주님!”
연무를 뚫고 전진한 문경은 볼케이노의 적진 한복판에 오롯이 서 있는 성음을 발견했다.
‘어느새 저기까지……?’
스스로 뛰어든 것이 분명했고, 패착이었다.
“지금이다! 끝장을 내 버려!”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른 200명의 대원이 성음을 향해 열 섬광포를 갈기자 문경은 정신이 나갈 정도로 아찔했다.
‘안 돼! 저건……!’
먼발치에서나마 평생 성음을 따라다녔던 문경은 그녀가 감각보다 빠른 공격을 접한 적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끝났다!”
볼케이노의 간부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성음의 눈에서 고요한 빛이 일렁거렸다.
에테르 파동-대나곡.
“저, 저게 뭐야?”
마치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물체처럼 섬광들이 자연스레 휘어지더니 성음을 크게 휘감으며 회전했다.
성음이 살며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2보까지는 주마.”
두 손을 내밀자 거창하게 휘몰아치던 섬광이 모조리 손바닥 사이로 모여들었다.
세계의 풍경이 실타래가 엉킨 듯 뒤죽박죽으로 일그러지더니 급기야 천연의 색채로 일렁거렸다.
“아아아.”
인간의 머리로 분석할 수 없는 공간의 얽힘 속에서 문경은 삶의 방향성마저 상실한 기분이었다.
‘저것이 바로…… 공주님의, 진성음의 2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아니, 내가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야. 인간이 발을 들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대나곡의 요동.”
성음이 두 팔을 벌리자 열 섬광포의 입자들이 마치 삼투압 현상처럼 풍경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피, 피해라!”
볼케이노의 리더가 소리쳤으나 그를 포함한 대원들은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성음의 공간에 방향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커억!”
강력한 열기가 하늘을 강타하자 200명의 대원들이 피 한 방울 남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증발했다.
“1명은 살려 두어야겠지.”
성음은 키트의 통제권을 잃고 이리저리 날고 있는 리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공간을 뛰어넘어 발목을 붙잡고 끌어내리자 리더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땅에 처박혔다.
“으아아아악!”
다리가 부러진 채로 꿈틀거리는 그에게 다가간 성음이 표정을 감추고 물었다.
“아는 것을 모두 말해라.”
리더가 피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
미궁 파이타로스.
일곱 가지 죄악의 율법이 각기 다른 밀도로 층을 이루고 있는 미궁에서 나네는 마지막 층에 도착했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아귀들의 아우성을 듣고 있노라면 어떤 인간이든 정신이 나가 버릴 테지만…….
‘어째서 우리는 고통을 받는가?’
그들 또한 한때는 인간이었다.
‘고통과 행복의 등가교환이 불가능하다면, 처음부터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네는 결코 빠르게 걷지 않았지만 다른 어떤 후보들보다 먼저 미궁의 종착지에 도착했다.
파이타로스의 유일한 출구 멸겁의 관문.
저 문을 넘어서는 순간 시간은 정지하고 영원한 무의 지속만이 남게 될 터였다.
“우리도 데려가 주십시오! 부디 가련한 이 존재의 고통을 끊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아귀들이 바닥을 기어 와 나네의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했다.
그들 또한 7층의 지옥을 모두 경험하고 내려온 자들이기에 나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불쌍한 중생이여…….”
나네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아귀들을 바라보았다.
“인간인가?”
멸겁의 관문을 지키고 있는 이면 세계의 주인들이 거대한 발로 철판을 내리찍으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