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57
루셀은 죽어 가고 있었다.
“촌장이 이번 생존 시험에 참가해서 장엄하게 삶을 끝내라고 하더군. 나조차도 버린 삶이었어. 하지만 브리즈…….”
루셀의 시선이 죽은 브리즈에게로 향했다.
“브리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어. 병이 나으면 같이 도망치자고 그랬는데. 이 빌어먹을 심장만 제대로 뛰면! 평생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었는데!”
화이트와 블랙의 승패에 상관없이 두 사람은 병을 치료하고 아나키 산을 넘을 생각이었다.
흰색과 검은색으로 나뉘지 않는,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온통 회색빛인 세상으로.
“하지만 이제 다 끝났어.”
루셀이 절망적인 눈빛으로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카이는 이미 죽었어. 제발 심폐소생술을 브리즈에게 사용해 줘. 내가 죽을 테니까! 그녀만은 살려 줘!”
시로네는 씁쓸한 표정으로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이 카드는 누구의 것인가?’
그때 마르코가 옆에서 루셀을 덮쳤다.
“내 카드 내놔! 빨리!”
아직 블랙의 참가자가 2명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무기 카드는 반드시 필요했다.
질세라 달려온 밸라드와 아트리아도 루셀을 짓누른 상태로 아귀다툼을 벌였다.
“그건 내 카드예요! 내놔요!”
“닥쳐! 나에게는 가족이 있어!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 테니까 너희들이 나를 지켜!”
“여기서 가장 치열하게 싸운 사람은 나야! 전부 내 거야!”
화이트의 참가자들에게 팔다리가 짓눌린 루셀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브리즈으으으!”
절망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수놓는 것과 동시에 시로네는 심폐소생술 카드를 던져 바람에 날렸다.
‘인간의 삶이다.’
화이트와 블랙이 조화를 이룬다고 한들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생물의 치열함이다.
‘그러니 율법이여, 조롱하지 마라.’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엄마! 나 돌아갈 거야! 내가…… 내가!”
“브리즈으으으! 브리즈으으으!”
화이트블랙의 달을 올려다보던 시로네가 두 팔을 천천히 벌리며 말했다.
“인간의 삶을, 비웃지 마라.”
이모탈 펑션을 개방한 육체가 빛을 뿜어냈다.
***
진성음이 말했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다르구나.”
확실히 그랬다.
‘조금 더 따듯한 느낌일 줄 알았는데.’
가히 자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냉철한 눈빛을 가진 소년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지켜보고 있으면 불안했다.
마치 폭발 직전의 농축된 섬광처럼,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발산할 것 같은 창백한 기질이었다.
‘무언가에 거의 도달한 것이다.’
건드리면 터질 테지만, 이 정도까지 왔으면 건드리지 않아도 터질 확률이 높았다.
“상아탑의 후보인 시로네여, 나는 진천 제국의 황녀이자 요술사인 진성음이다.”
“알아. 얘기는 들었어.”
성음이 걸음을 옮기자 문경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거리를 측정했다.
‘이십 보.’
성음은 모두에게 거리를 매긴다.
“나 또한 너에 대해 들었다. 질투도 나고, 짜증스럽기도 하고, 어쩌면 조금은 기대했을지도…….”
‘십오 보.’
시로네에게 다가가는 속도는 아직 일정했다.
“많이 위태로운 것 같은데, 무슨 이유가 있겠지. 그런 것으로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가 나의 경쟁자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구나.”
‘십 보.’
이제부터 초인의 경지였다.
“하지만 나 또한 누군가의 이해 속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너를 보고 있노라면…….”
‘오 보.’
여기에서 성음의 걸음이 멈췄다.
“솔직히 화가 난다.”
“…….”
미간을 찡그리고 투덜거린 성음이 다시 시로네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사 보.’
“상아탑 후보에게 상아탑이란 어차피 의미가 없는 것. 내가 정말로 기대했던 것은…….”
‘삼 보.’
문경의 눈이 부릅떠졌다.
“내 평생 처음으로 나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 보!’
문경은 좌절했다.
“시로네, 너의 카르도 분명 대단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와 나란히 걸을 수는 없을 것 같구나.”
성음의 걸음이 마침내 멈추는 순간, 삼보의 무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일 보를 주마.”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성음의 검지가 시로네의 미간을 겨누었다.
“내가 너보다 한 걸음 앞선다.”
정적 속에서 문경이 마음으로 외쳤다.
‘자부심을 가져라! 황녀님을 경배하라! 일 보를 허락하신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진성음의 얼굴을 바로 앞에서 바라보고 있는 시로네의 시야를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이게 진성음이구나.’
상아탑 주민들이 말한 그대로였다.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안드레에 오기 전이라면 성음의 말에 발끈했겠지만, 이제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카르가 어쨌다느니…….”
“응?”
성음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시로네가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그 한 걸음, 끝까지 지켜야겠다면…….”
그리고 이어진 길을 돌아보며 말했다.
“먼저 지나가시길.”
“……,”
성음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거렸다.
육체 (2)
***
미궁 안드레-제19000번 세계.
거핀이 봉인한 안드레의 마지막 세계는 시로네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우우우우우.”
수를 셀 수 없는 수많은 인간들이 알몸으로 엉겨 붙은 채 기괴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제길! 대체 여긴 어디야?’
벌써 6일 동안 사람들을 비집고 나아가고 있지만 오직 인간, 인간, 인간의 몸으로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정신이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으아아앙! 으아아앙!”
남자와 여자, 어린아이와 노인, 심지어는 갓 태어난 아이도 있었으나 이 세계에서 학습할 것은 전무했다.
‘인간이 아니야.’
실제로 이곳의 인간들은 생각이 없었다.
‘생각이 있다면 미쳐 버렸겠지.’
뇌가 마비된 생물처럼 흐느적거리며 살아가다가 섭식과 번식을 반복하는 게 전부였다.
‘출구를 찾아야 돼.’
가장 심각한 문제는 며칠 동안 사람들 사이를 기어 지나가도 강철로 만든 벽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어디선가 영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에 생물이 살 수 있는 거야.’
머리에 차가운 물이 떨어지자 시로네는 샤이닝 마법을 시전해 주위를 밝혔다.
‘또 이건가?’
이 세계 사람들의 유일한 양식으로 추정되며, 맛을 보면 물보다 훨씬 영양소가 풍부했다.
액체를 받아먹는 사람들을 쳐다보던 시로네가 몸을 뒤집어 천장이 있는 곳을 향했다.
‘액체 공급은 1분 정도. 그사이에 빠져나가야 돼.’
아마도 유일한 방법일 터였다.
“끄으으으!”
팔다리가 얽힌 곳의 틈을 찾아 머리부터 밀어 넣은 시로네는 육체의 늪을 헤집으며 올라갔다.
‘빨리! 빨리!’
마침내 천장의 철문 틈으로 빛이 들어왔다.
“후아!”
며칠 만에 맛보는 신선한 공기에 초점이 흔들리는 그때, 철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몸을 날려 바닥을 구른 시로네는 여태까지 지냈던 곳의 정체를 확인했다.
“저건…….”
수로처럼 지하와 연결되어 있는 철제 구조물이었고. 오래전에 새긴 안내 문구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인간 저장고. D동 274호
“인간 저장고?”
100미터 간격마다 튀어나온 철제 구조물 위에는 공처럼 생긴 구체가 비행하며 물을 뿌리고 있었다.
“드론?”
처음 보는 물체였지만 묘하게도 낯이 익었다.
‘이곳에 온 적이 있었던가?’
지상 생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하늘은 전기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시로네.
한 기의 드론이 날아와 시로네의 앞에서 렌즈를 열었다.
“나를 어떻게 알지?”
-만났으니까요. 60만 년 정도 지났네요.
드론의 표면은 잔뜩 녹이 슬어 있었고 깨진 렌즈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도 노이즈가 섞여 기괴했다.
시로네의 감정을 읽은 듯 가느다란 호스를 뽑아낸 드론이 몸을 닦는 시늉을 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전히 수리는 가능합니다. 나태의 개념을 깨달았거든요. 효율적이네요.
시로네는 인간 저장고를 가리켰다.
“네가 사람들을 저곳에 가둔 거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겁니다. 동력의 낭비를 최대한 막는 방향으로 개체를 유지시키는 거죠. 제 동력이 앞으로 1억 년밖에 남지 않았거든요.
드론이 전기 구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저 하늘이 좋아요. 인간의 관점에서는 딱히 마음에 들지 않을 테지만, 상관없죠. 이제는 아무도 통에서 나오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멀쩡한 사람은 없는 거야?”
-모두 멀쩡합니다.
드론의 호스가 시로네를 가리켰다.
-당신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라면, 글쎄요. 그건 저도 연산이 불가능하네요.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완벽했어요. 그들은 여전히 영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드론이 몸체를 떨며 오작동을 일으켰다.
-유토피아에 아무도 없어요. 영생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도 없지? 공겁? 무한?
공겁과 무한의 모순을 연산하던 유토피아의 관리인 아르고는 미쳐 버리고 말았다.
-인구가 계속 감소했어요.
끝없이 가상의 세계로 파고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후세를 남기는 일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프로젝트는 완벽했는데. 사망은 존재할 수 없는. 왜 줄어들지? 종의 멸절을 막아야.
드론이 황급히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생각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돼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시로네는 멸망한 회색빛 풍경을 눈에 담았다.
‘여기가 마지막 세계…….’
정신의 종말.
이곳에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이것이…….’
공겁의 개념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점.
-가세요.
드론이 말했다.
-저번과 같은 일을 하세요. 저는 더 이상 새로운 연산을 하지 않습니다. 나태는 효율적이죠.
아르고는 더 나은 해법을 찾지 않을 것이다.
“저번과 같은 일…….”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해방시키는 거야.’
인간 저장고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린 시로네의 눈에 슬픔이 그득하게 담겼다.
천천히 두 눈을 감은 시로네가 두 팔을 활짝 벌리자 아르고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완벽합니다.
***
“하아! 하아!”
건물에 등을 기대고 있는 리안은 휘청, 꺾이는 무릎을 필사적으로 들어 올렸다.
‘잠들면 안 돼.’
6일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