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67
‘어느 때보다 빠르게 세상이 변할 테니까.’
성음이 말했다.
“얘기가 끝났으면 출발하자. 나도 한시라도 빨리 진천 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으니까.”
키도가 성음의 곁에서 물러서며 말했다.
“시로네, 우리는 친구지?”
키도는 세상을 여행하며 어떤 결론을 얻게 될 것이고, 어쩌면 시로네의 결론을 부정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물론이지. 가장 소중한 친구야. 어떤 상황으로 마주치더라도 절대로 변하지 않아.”
그제야 안심한 키도가 몸을 돌리더니 지평선이 펼쳐진 사막을 향해 빠르게 튀어 나갔다.
“행운을 빈다, 시로네!”
시로네는 낡은 망토를 펄럭이며 멀어져 가는 키도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좋은 여행이 되기를.”
그리고 리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혼자서 괜찮겠어? 마을이 있는 곳까지라도 같이 가면 어떨까? 여기서는 식량도 구하기 힘들 텐데.”
리안이 등에 찬 대직도를 들썩거렸다.
“이것만 있으면 지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별이 돼서 돌아와.”
이번 상아탑 테스트로 평생을 여행한 기분이었기에 시로네도 집이 그리웠다.
‘에이미…….’
조만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자 심장이 뛰었다.
“지금 출발하겠다.”
문경이 존경의 마음을 담아 리안에게 고개를 숙이고 성음의 삼 보 뒤에 서자 에테르 파동이 펼쳐졌다.
북극까지 공간을 끌어당긴 성음이 축지를 시전하자 세 사람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시로네가 사라진 자리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리안의 눈에 갑자기 무섭게 불이 타올랐다.
“이미르.”
사막의 지평선 위에 거인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
코로나 왕국.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북방 한계선에 있는 코로나 왕국은 북극의 유일한 국가였다.
만년설 위에 지어진 나라답게 얼음 공예가 발달했으며, 상아탑의 거의 유일한 시장이었다.
블리자드가 매일 들이닥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삶보다 죽음을 더 가깝게 느끼는 법이다.
벽에 걸린 횃불조차 위태로운 시가지의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상아탑은 아닌 듯했기에 시로네가 고개를 돌리자 성음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물고 있었다.
“아마도 코로나 왕국일 것이다.”
거대한 공간을 뛰어넘는 성음에게 대륙의 도시 크기인 코로나는 스쳐 지나간 것처럼 작게 느껴졌지만, 어차피 북극에서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상아탑 아니면 코로나였다.
“상아탑에는 접근할 수 없었어.”
축지를 시전한 것과 동시에 상아탑의 느낌이 사라지면서 좌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일종의 비상 탈출과 같은 느낌으로 그나마 감각에 걸린 장소에 도착한 게 바로 여기였다.
‘공간을 다루는 자가 있는가?’
예전 같으면 믿을 수 없었겠지만 시로네와 나네, 이미르를 상대한 지금은 생각이 달랐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성음의 견문이 넓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시 시도해 보라면 못 할 것도 없지만,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이 정도의 대비도 없이 상아탑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시로네도 같은 생각이었다.
“응. 그래도 북극까지 왔으니 시간을 단축시킨 거야. 이제부터 내가 찾아가 볼게. 고마워.”
평온을 되찾은 시로네가 미소를 짓자 성음의 뺨에 살며시 홍조가 피었다.
‘다정한 사람이다.’
안찰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이 사람과는 싸우고 싶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만큼 시간의 제약을 받는 지금의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나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있지?”
“하하하.”
마치 상대를 거리로 측정하는 성음의 강박이 시간으로 변한 것 같은 말에 시로네는 웃음이 터졌다.
“얼마든지 내줄 수 있지. 네가 아니었다면 북극에 도착하는 데에만 10일은 넘게 걸렸을 거야.”
“10일이란 말이지.”
성음이 수줍게 웃으며 물러섰다.
“별이 되면 진천에 꼭 들러 다오. 네가 준 10일이란 시간을 그때 쓰도록 하겠다.”
“아니, 꼭 그럴 필요 없이 네가 원하면…….”
“약속한 거야. 10일.”
이제는 시로네도 성음의 성격을 알고 있기에 부언하지 않고 승낙했다.
“알았어. 내 10일을 줄게.”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나도 너에게 내 영 보를 주겠다.”
“응?”
시로네가 되물었으나 성음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문경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영 보라는 것은 아마도.”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자는 뜻일 것이다.
“슬슬 출발해 볼까?”
그렇게 결론을 내린 시로네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코로나 왕국의 거리를 거닐었다.
벌써 밤이 늦어서 술집 외에는 불이 켜진 곳이 없었고, 휴식 없이 며칠을 싸운 후유증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뭔가 좀 이상한데.’
어느 순간부터 아르망이 피로를 회복시키지 못하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도 마음이 닿지 않았다.
“자고 싶다. 자고 싶다.”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찾아간 곳은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여관이었다.
‘안 되겠다. 자고 가야지.’
북극에 도착했어도 상아탑이 어디인지 모를뿐더러, 어차피 경쟁자들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중년의 여성이 반겼다.
“어서 오세요. 화이트 여관입니다.”
주위를 둘러보자 구석의 테이블에 한 팀이 카드 게임을 하는 게 보였다.
흔한 풍경을 지나 시로네의 시선이 카운터 앞의 테이블에 고정되었다.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붉은 머리의 소녀가 혼자서 독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여기서는 애들도 술을 마시나?’
추운 지방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는 추리였다.
“숙박하러 오신 건가요?”
중년 여성의 물음에 시로네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 네. 가능하면 음식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직 저녁을 못 먹어서…….”
“저런. 남은 빵과 수프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어떡하죠? 방은 지금 비어 있는 곳이 없는데.”
“방이 없다고요?”
코로나 왕국에 대해 아는 건 단편적이지만 관광객이나 여행객이 자주 들를 만한 나라는 아니었다.
“네. 어제부터 상아탑 주민들이 단체로 투숙하는 바람에 방이 꽉 찼어요.”
‘상아탑 주민?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시로네는 흠칫 눈을 가늘게 뜨며 카드 게임을 하는 4명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대화는 일절 없고, 마치 기계처럼 카드를 뽑았다가 내려놓고는 판돈을 거두어 가고 있었다.
‘이루키 4명이 앉아 있는 것 같네.’
중년 여성이 말했다.
“오늘은 블리자드가 심해요. 합방을 해도 상관없으면 제가 깨어 있는 손님들에게 의중을 여쭤볼게요.”
“아, 그래 주신다면…….”
“나랑 같은 방을 쓰면 되지.”
독한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소녀가 시로네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리자 중년 여성이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으음, 하지만 남녀 합방은 좀…….”
“뭐 어때? 당사자들끼리 좋으면 되는 거지. 안 그래도 남자가 그리웠는데. 방값은 받지 않을 테니까.”
시로네가 미간을 찌푸렸다.
“꼬마야, 그런 말을 입에 담으면 못써. 그리고 벌써부터 술을 마시면 몸에 좋지 않아.”
“하긴, 상대가 나네였으니 피곤하기도 하겠지.”
“응? 방금 뭐라고?”
시로네가 눈을 깜박거리자 흐트러진 눈동자로 술잔을 바라보던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무한의 마법사라도 제대로 맞으면 골로 간다?”
시로네는 곧바로 감각을 개방했다.
‘아이가 아니야.’
울티마 시스템이 초인지와 결합되면서 그녀를 감싸고 있던 거짓의 정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한 것 같은 매력적인 외모에 늘씬한 몸매, 팔다리가 시원하게 길쭉한 여성이었다.
“아, 맞다!”
중년 여성이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보통 사람에게는 소녀로 보였겠네요. 여기 이분은 성 미라크 미네르바 씨예요.”
“성?”
“상아탑 주민이거든요. 가만있자, 몇 성급이라고 그랬지?”
미네르바가 손가락 5개를 펼쳤다.
“아, 5성급이었죠. 그나저나 미네르바 씨는 어때요? 정말로 합방하실 의향이 있으신가요?”
“나는 좋다고 했잖아. 저쪽 의사가 중요하지.”
시로네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5성급이면 오대성이잖아? 잠깐만…… 미네르바? 설마 책에서 봤던 그…….’
미라크 미네르바.
세계 100대 위험인물 중의 하나이자, 700년 전에 세상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대마녀의 이름이었다.
별을 향해 (2)
***
“들어와. 여기야.”
미네르바가 숙식하는 3층 12호실은 간소한 가구와 침대 하나가 놓여 있는 작은 방이었다.
침대가 하나인 것도 문제지만, 설령 부부라도 둘이서 함께 자기는 무리일 듯한 크기였다.
시로네는 그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다란 빗자루가 벽에 기대어 있는 것을 보았다.
‘마녀의 빗자루.’
미네르바의 빗자루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물건 중의 하나로 역사책에 소개되었다.
미네르바가 상의를 벗으며 물었다.
“어떤 플레이 좋아해? 나는 딱히 취향 안 가리거든. 말하면 내가 맞춰 줄게.”
“들어오기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것 때문에 미네르바 씨를 따라온 게 아니에요.”
미네르바가 고개를 쳐들고 웃었다.
“그 말을 누가 믿겠어? 하여튼 남자들이란.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솔직히 생각이 있는 거 아냐?”
남녀의 대사가 바뀐 듯했지만 시로네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잘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갔을 거예요. 그리고 미네르바 씨가 상아탑에 데려다준다고 약속했잖아요.”
겉옷을 모두 벗은 미네르바는 개어 놓은 잠옷 앞에서 시로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약속을 지켰잖아. 여기가 상아탑이니까.”
시로네의 눈이 똥그래졌다.
“여기가 상아탑이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상아탑의 테라스 정도 될까? 코로나 왕국은 상아탑 주민들이 세운 나라야. 주민들은 평생 상아탑을 나갈 수 없으니까, 각종 편의 시설이 있는 공간이 필요하지. 손님 접대하기도 용이하고.”
“그럼 상아탑은 어디 있죠?”
미네르바가 실크 재질의 가운을 걸치며 말했다.
“왕성 지하의 마법진을 타고 갈 수 있어. 또한 그것 외에 상아탑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지. 보통의 경우에는 말이야.”
절대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바로 너. 인간의 몸으로 초감에 도달한 마법사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미네르바가 요염한 자세로 침대에 쓰러졌다.
“오늘 나를 기쁘게 해 주면 왕성의 마법진을 이용하게 해 줄게. 어때? 이건 정당한 거래야.”
시로네가 한심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 시선 익숙하지. 어쨌든 반가워. 앞으로 같은 오대성끼리 잘해 보자고.”
“오대성? 제가요?”
미네르바의 눈빛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마하가루타가 세계를 떠났어. 현재 공석이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나도 상아탑에 돌아온 거야.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태성의 생각도 나와 같을 거야.”
오대성의 공석은 시로네가 채우게 될 것이다.
“세계를 떠났다는 것은…….”
“그래. 이모탈 펑션을 완전히 개방했지. 너는 이 세계로 돌아왔지만 말이야.”
미네르바가 벌떡 상체를 세웠다.
“이해가 안 돼. 왜 돌아온 거야? 이 세계라고 해 봤자 먹고, 싸고, 싸우고…… 그게 전부잖아? 솔직히 나는 나네의 의견에 동의해. 그가 모든 것을 끝냈다면.”
미네르바가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았을 거야.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는 거지. 그거 알아? 태어나기 전에는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없어.”
“하지만 살아 있잖아요,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 시로네가 이 세계로 돌아올 수 있었던 유일한 깨달음이었다.
“살인을 악으로 정의하는 건 인간이지.”
미네르바가 콧김을 내쉬며 말했다.
“만약 나네가 거의 대부분의 인류를 죽인다면 그는 최악의 살인마가 될 거야. 하지만 전부를 죽인다면 그건 선악의 문제가 아니야. 존재를 초월하니까.”
시로네는 흔들리지 않았다.
“미물조차 똑같이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극단적으로 낮은 카르 덕분이지. 하지만 결국 너도 인간이야. 어째서 거핀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자계를 초월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거핀 또한 떠났다.’
시로네가 벽에 웅크리고 앉자 미네르바가 침대를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올라와. 진짜로 손만 잡고 잘 테니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