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76
지극히 인간다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시로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침대를 박차고 집을 나섰다.
“시로네! 잠깐, 잠깐만……!”
에이미의 꿈은 거기까지였다.
***
“으아아아아!”
꿈속에서 웅크린 채 울고 있는 시로네의 앞으로, 루버가 슬픈 표정으로 다가왔다.
“분노하지 마십시오.”
“왜, 왜 나야! 왜 나만…… 왜!”
“용서하십시오.”
단호하게 내뱉은 두 번의 말에 시로네의 숨소리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하아. 하아.”
‘또다시 받아들이는가? 가히 가공할 정신이로다.’
시로네도 나네도 신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베이스는 어디까지나 인간, 그럼에도 이 정도의 정신이기에 신의 경지를 넘보는 것이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대정화기는 이제 막 열렸을 뿐이에요. 담대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죽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죄송해요. 루버 씨가 특별히 저를 위해 해 준 일인데.”
“저야말로 죄송하지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시로네 님이 인간이 되어 버리면 세계가 닫힙니다.”
그렇기에 꿈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뇨. 더 강한 집착이 생기지 않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요.”
오대성의 임무는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친구들에게 데려다주세요.”
루버가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좋은 꿈 꾸시길…….”
***
“으으. 으으으.”
새벽에 들린 네이드의 목소리에, 옆에서 자고 있던 리즈가 몸을 흔들었다.
“네이드? 악몽이야?”
심령권의 반경 밖으로 벗어나느라 하루 종일 마족들과 싸운 그들이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이게 정말 꿈이라고?”
루버가 모든 것을 전해 주었으나 드리모를 경험하지 않은 네이드는 반신반의했다.
“푸하하! 알 게 뭐야! 우와, 시로네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간 네이드였으나 시로네의 얼굴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왜 그래, 시로네?”
왜 울고 있어?
“네이드.”
“무슨 일이야? 나쁜 일이라도 생긴 거야?”
이토록 서럽게 우는 시로네는 처음이었다.
“누가 너를 괴롭혔어! 어떤 놈인지 말해! 지금 당장 가서 박살을 내 줄 테니까!”
“네이드, 나는…….”
긴 꿈이었다.
“허억!”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네이드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리즈의 목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보자 마족을 피해 대피한 여관방의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마족들 꿈을 꾼 거야?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던데…….”
“꿈이 아니야.”
시로네는 나네라고 했다.
“준비해, 리즈. 지금 당장 토르미아로 돌아가자. 이루키를 만나야 해. 아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토르미아?”
심령권이 수도를 덮치면서 네이드는 리즈를 데리고 곧장 국경선을 넘었다.
어차피 네이드야 애국심이랄 게 없지만, 마법협회의 정직원인 리즈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 수도 상황이 어떤지 몰라? 가자마자 체포될 거야. 이루키가 기다린다는 건 또 뭐야?”
“시로네가 힘들어하고 있어.”
“…….”
리즈가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시로네로 인해 새로운 삶을 얻은 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떤 미친놈이 내 친구를 건드리고 있다고.”
시로네가 말한 높은 경지 따위야 네이드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말로 가려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라 따위야 얼마든지 버릴 수 있지만…….”
네이드가 상의를 걸치며 말했다.
“내 친구를 괴롭히면 부처도 용서하지 않아.”
그게 네이드였다.
“하아. 하여튼 남자들이란. 의리에 죽고 못 살지.”
배낭을 어깨에 짊어진 네이드가 리즈를 돌아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가자. 부처인지 개뼈다귀인지…….”
인간이 문제라면 인간을 지배할 것이다.
“시로네 패거리를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지.”
격동의 시대 (3)
***
토르미아 왕국.
대정화기가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났다.
이미 전국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크레아스 도시의 귀족 구역은 출입증 없이는 귀족조차 드나들 수 없었다.
심령권이 확장되었을 때 나타났던 마족들은 거의 궤멸되었다.
하지만 소수의 잔당, 이를테면 아귀들은 여전히 으슥한 곳에 숨어 부녀자들을 노리고 있었다.
“아귀 녀석들, 정말 질릴 지경입니다.”
마법협회 크레아스 지부의 마법사들과 왕성 특파 조사관들이 길목을 순찰하고 있었다.
“놈들이 먹는 건 육신이 아니거든요. 먹는다는 행위를 먹는 거죠. 눈앞에 먹을 것이 있으면 배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입에 넣고 봅니다.”
3일 전에 발견된 한 귀족 여인의 사체는 끔찍할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어느 계든 더 강한 개체가 약한 개체를 흡수하죠. 즉, 먹는다는 행위는 우월함의 증거.”
인간은 거의 모든 것을 먹는다.
“무거운 별이 가벼운 별을 흡수합니다. 다만 생물계는 쾌락을 기반으로 한다는 게 문제인 것이죠. 아귀들이 시체를 훼손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세계 각국에서는 이미 마족들의 규모와 전투력, 요주의 인물들을 파악한 상태였다.
조사관의 냉철한 분석도 그 일환이었으나 동행하는 마법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간이라고 다를 것은 없지요.”
조사관이 눈웃음을 지었다.
“의외로 감상적이군요. 마법사들은 차갑다고 들었는데.”
“글쎄요. 세상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냉정을 유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가 이룬 모든 것들이 붕괴되고 있었다.
어쩌면 해답은 마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통찰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물론 마족은 인간의 이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강력한 욕망이 만들어 낸 율법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마족은 결국 마족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지나가는 여자를 겁탈하거나 가진 자의 것을 빼앗지 않아요.”
조사관이 나직하게 덧붙였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요.”
마족은 왜 존재하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골목의 모퉁이를 도는 그때, 마법사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팔을 들었다.
“정지.”
뒤를 따르던 마법사들이 곧바로 스피릿 존에 들어가고, 조사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뒤로 빠졌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어둠 속을 걸어오고 있는 자는 대답이 없었으나 묵직한 발소리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샤이닝.”
뒤편의 마법사들이 동시에 마법을 시전하자 사위가 밝아졌고, 피 칠갑이 되어 있는 검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저런…….”
피가 엉긴 정도를 봤을 때 족히 일주일은 씻지 못한 듯했으나 안광은 이제 막 태어난 것처럼 섬뜩했다.
아카드 사막을 건너 크레아스에 도착한 리안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굳은 피딱지가 후두두 떨어졌다.
“너희들은 뭐야?”
수도권이나 국가적 요충지는 제단에 대한 대비가 충분했지만 대형 왕국보다 넓은 사막에 설치된 제단에서는 수많은 마족들이 나와 판을 쳤다.
그들 모두를 쓸고 고향으로 돌아온 길이었기에 리안의 정신은 닿는 것만으로 베일 만큼 예리했다.
“마족인가?”
조사관의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흉흉한 살기에, 마법사가 적의를 드러내며 말했다.
“마법협회 크레아스 지부의 마법사다. 영내 순찰 중이야. 출입증이 없이는 들어올 수 없다.”
“영내 순찰?”
리안이 고개를 들고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고생하는군. 나는 오젠트 리안이다. 집으로 가는 길이니 비켜 줬으면 하는데?”
“오, 오젠트 리안?”
오젠트 가문이라면 크레아스에서 유명하다.
하지만 마법사가 놀란 이유는 가문의 위세가 아닌 리안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마하의 기사. 정말 자네가 시로네의 검인가?”
시로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상아탑의 5성급 주민 시로네와 그의 검 리안의 이름은 세계가 알았다.
피곤했고, 대꾸하기 싫은 리안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마법사들이 마도 무구를 치켜들었다.
“멈춰! 신원을 밝히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
“내가 리안이라면 그딴 게 있을 턱이 없잖아. 본가로 따라오면 가족들이 보증해 줄 거야.”
일견 합당한 말이지만 대부분의 간자가 이런 식으로 나오기에 출입증을 발급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려라. 우리가 오젠트 본가에 가서 확인하겠다. 마족도 그렇지만 시국이 좋지 않아.”
리안은 5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펼치고 있는 스피릿 존으로 스스럼없이 들어왔다.
“사막을 건너면서 수천 마리의 마족을 벴지.”
마족이 휩쓸고 간 사막의 부족들은 전부 멸망했고 그들의 최후는 감히 입에 담기도 싫을 정도였다.
“그런데 베고, 베고, 또 베다 보니까 말이야. 오히려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 혐오스러워지더군.”
리안이 다가올수록 마법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이길 수 없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순간 목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부탁한다.”
마법사들의 긴장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커다란 검을 등에 차고 그저 무심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청년은 처음부터 어떤 살기도 드러내지 않았는지 모른다.
‘나 혼자 착각한 것이다. 우리와 싸우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나…….’
너무나 강하기에 지레 겁을 먹어 버린 것이다.
“물러서라.”
마법사의 지시에 부하들이 길을 열어 두고 조사관도 흐음 소리를 내며 벽에 기댔다.
“인간을 위해 싸워 줘서 고맙네.”
마법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자 리안 또한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 사이를 헤쳐 지나갔다.
‘집은 무사할까?’
피는 지워졌으나 벽마다 사정없이 할퀴어진 아귀들의 손톱자국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리안! 무사했구나!”
부집사 테무란의 안내를 받아 본가에 도착하자 레이나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끌어안은 리안의 몸에서 피 냄새가 진하게 풍겼으나 그것조차 남의 피였기에 레이나는 안도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잖아! 무심하기는. 어떻게 편지 한 통 없니?”
의아한 쪽은 리안이었다.
“누나가 본가에 왜 있어?”
비단 전투가 아니라도 왕성 궁중 악사로서 그녀가 해야 할 일들이 태산이었다.
“내가 데리고 왔다.”
오젠트 클럼프가 계단을 내려왔다.
“할아버지.”
“어떻게 된 거냐? 시로네가 상아탑 테스트에 합격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레이나가 말을 끊었다.
“일단 좀 씻어. 금방 저녁 차려 줄게. 집사장, 남은 재료로 빨리 좀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집사장 루이스가 팔꿈치 아래로 잘려 나간 오른팔에 붕대를 감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마족에게 당한 상처였다.
리안은 딱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클럼프에게 물었다.
“큰형은?”
가문의 장남 오젠트 가이.
일찍이 공인 시험에 합격해 토르미아 왕국의 요직에 앉았지만 투철한 애국심으로 간첩이 되어 버린 형이었다.
“모른다. 3년 동안 연락 두절이야. 아직도 타국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죽었겠지.”
오젠트 가문에서 가이는 아픈 이름이었다.
“그래…….”
욕실로 향하는 리안을 빤히 살피던 클럼프가 물었다.
“다시 세상을 떠돌 생각이냐? 이 지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