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698
‘아버지.’
시로네가 야훼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지금은 시온 프로젝트에 합류한 위고의 아버지 카시아는 이렇게 말했다.
-시로네는 없다고 생각해라.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 세계의 모든 마법사들은 최고를 향한 열망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밀린다고?’
마치 한 세대 전에 미로로 인해 세계의 모든 마법사들이 좌절을 맛보았듯이.
“고집을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시로네 씨의 실력은 상아탑 오대성이라는 것만으로 증명이 되었으니까요.”
미네르바는 실망했다.
“그럼 뭘 어떻게 하자는 거야?”
“이런 것은 어떨까요? 마법이 아닌 화신술로 승부를 겨루는 것입니다.”
경지의 깊이.
“호오? 과연, 그거 흥미로운데?”
위고가 의외로 세게 나오자 미네르바의 눈에 다시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상당히 호전적이네. 역시 스카이야.’
마치 목줄이 풀리기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시로네가 허락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로네, 하자. 저렇게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는데 모른 체하는 것도 인간미가 없잖아?”
해라, 해.
좋은 구경을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미네르바의 지원에 위고도 말을 덧붙였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만 도전이 아닙니다. 다만 시로네 씨의 그릇이 크다면, 저의 좁은 그릇이 만든 아집도 이해시킬 수 있지 않을지.”
결국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최소한 경지의 깊이에서는 뒤지지 않는다. 나는 가문이 배출한 최강의 구도 병기니까.’
물론 카시아가 그렇게 가르친 것은 아니다.
다만 수십 년간 미로의 그늘에 머물러야 했던 가문의 분위기를 3세대인 위고는 예민하게 느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생각을 마친 시로네가 말했다.
“미안해요. 저는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미네르바가 더 실망했다.
“왜, 왜? 위고가 얼마나 억울할지는 생각 안 해? 별을 자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해 주면 되잖아.”
미네르바의 속마음이야 빤히 들여다보였다.
“끼어들지 말고 좀 조용히 있어요.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사정을 신경 썼다고.”
위고가 눈에 힘을 주며 내뱉었다.
“……도망치는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네, 정확한 표현이네요. 저는 이기고 싶지 않고, 당신에게 지더라도 상관없어요.”
위고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이미 가장 높은 곳의 경치를 실컷 즐겼기에,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리고 내려오면 그만이었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거야.’
끌어내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는 게 최고의 자리.
양보 따위가 대신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시로네가 돌아보자 가르시아가 그토록 움직이기 힘든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해요. 굳이 이 자리에서 누군가가 패배의 감정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가르시아가 다가왔다.
“위고는 세계적인 인재입니다. 비록 별은 되지 못했지만 공화국은 그에게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협회장님.”
공인 서열로는 까마득한 선배의 말이었기에 이번만큼은 위고도 표정을 풀었다.
“지금 싸워야 할 적은 우리가 아닌, 우리 마음속의 마魔. 오대성의 깊은 뜻은 십분 이해합니다.”
가르시아는 위고를 돌아보았다.
“위고도 세상을 걱정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기에, 싸워 보지 못한 벽에 막혀 있을 뿐입니다. 오대성께서 그 벽을 넘도록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인류의 핵심 전력이 될 그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을 감은 미네르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지적이야. 위고 따위, 아니 위고 정도면 훗날 충분히…….”
시로네가 말을 끊었다.
“도움이 될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도움이 될 겁니다.”
시로네에게 패해서 주제를 알든 어쩌면 정말로 시로네를 이기든, 최소한 응어리는 사라질 터였다.
‘화신술의 대결이라면 후자의 가능성도…….’
가르시아는 위고의 화신이 어떤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좋아요.”
승낙의 말이 떨어지자 시로네에게 집중되어 있던 세 사람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다만…….”
이제부터는 시로네도 진심이었다.
“그런 이유로 대결을 펼치는 거라면, 저도 적당히 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저와 위고가 바라던 바입니다.”
미네르바가 속으로 말했다.
‘물론 나도.’
마음의 소리를 들은 듯 시로네가 한숨을 내쉬더니 걸음을 옮겼다.
“어디에서 하면 될까요?”
“청사는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지요. 스카이 본가라면 충분히 비밀스러울 것입니다.”
오대성의 체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적진에서 대결을 펼치는 셈이었다.
시로네는 신경 쓰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거기로 가죠.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시로네가 먼저 청사를 나가자 가르시아와 눈을 마주친 위고가 주먹을 굳게 쥐었다.
‘됐다!’
세계 최고의 마법사들이 모이는 상아탑, 그중에서도 정점에 서 있는 오대성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왔어!’
위고의 뒤를 따라 청사를 나서는 가르시아의 엉덩이를 미네르바가 두드렸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네가 웬일이야?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일도 하고.”
가르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 내기할까? 이기는 사람 소원 들어주기. 가는 길에 뭐 좀 사 가자. 이런 구경은 먹으면서 해야 돼.”
‘이 여자 진짜 싫어…….’
가르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파계 (4)
***
위고의 본가는 수도 가르단에서 14킬로미터 떨어진 초원에 세워진 거대한 사원이었다.
수도사들의 성지인 동방 중천동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행자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다만 현재는 대부분 시온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기에 시로네가 도착했을 때 사원은 한산했다.
“위고?”
마법협회장이 왔다는 기별을 받은 위고의 사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본가에는 무슨 일이야? 그리고 이분들은?”
테라포스 대법관이 인류 전체에 대한 심판을 했을 때, 선의 숫자는 전체 인구의 1퍼센트 미만.
시온에 입성하지 못한 것은 이들의 수양이 아직 극선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위고가 직접 소개했다.
“상아탑의 별들이세요. 이분은 성 아리안 시로네, 이분은 성 미라크 미네르바.”
“아리안 시로네라고?”
위고를 지지했던 스카이 가문의 친족에게 시로네는 너무나 아픈 이름이었다.
“아주 대단한 분이 오셨군요. 세상의 정점에 계신 오대성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는 어인 일로…….”
분위기가 과열되기 전에 가르시아가 설명했다.
“위고가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화신술을 펼칠 만한 장소를 빌려주실 수 있을지.”
사촌들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드디어 기회를 잡았구나. 장하다, 위고.’
미로는 시로네를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때 그녀를 사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여기에서 화신술로 시로네를 제압하면 세계 최고의 구도 가문이라는 칭호를 되찾을 수 있을 터였다.
‘위고만의 잘못이 아니다.’
사촌들의 눈빛에서 적개심을 읽은 시로네는 위고의 뒤틀린 응어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깨달았다.
‘이곳에는 스승이 없어.’
가주 카시아가 아들의 심마를 모를 리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모두를 데리고 시온으로 떠났다.
마魔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감사합니다.’
시로네의 눈빛이 달라졌다.
‘위고는 제가 바로잡아 놓겠습니다.’
사촌들이 창백한 얼굴로 물러섰다.
“윽! 뭐, 뭐야?”
수양이 얕아도 스카이 가문, 마음까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야훼의 따스함이 걷힌 시로네는 공인 제1급의 대마법사인 가르시아의 눈에도 완벽한 마법사였다.
‘이게 정말 약관의 마법사인가?’
마치 절대영도처럼, 일말의 미동도 없는 정신이라는 것은 극한의 차가움이었다.
“후후, 어때? 끝내주지?”
미네르바가 가르시아의 옆에 섰다.
“지독하게 순수하고, 지독하게 냉정한 스피릿 존. 모든 마법사가 꿈에 그리던 정신 상태잖아?”
“……위고의 심마가 이해되는군요.”
한 번만이라도 느껴 보고 싶었다.
“모든 자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요?”
“포기하면 편해. 역시 마법사는 저래야지. 야훼일 때보다 훨씬 잘생겼잖아?”
시답지 않은 소리에 가르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가자. 빨리 끝내고 싶어.”
시로네의 목소리가 스피릿 존을 진동시키자 위고는 마음이 쩡하고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쳇, 뭐야? 기선 제압이나 하고.’
세상의 모든 마법을 통달한 무한의 마법사.
순수 정신으로 부딪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화신술의 대결이에요.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서로에게…….”
“알아. 대결할 곳으로 안내해.”
위고가 수련장을 향해 돌아섰다.
“따라오세요.”
플라이 마법을 시전하자 시로네와 미네르바, 가르시아와 사촌들이 뒤를 따랐다.
‘흥! 잘난 척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위고가 도착한 곳은 화신술에 집중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광활한 공터였다.
지평선 끝까지 벽이 보이지 않았고, 이 또한 남에이몬드에서 특별히 지원한 장소였다.
“자, 자! 왔으니까 빨리 시작하자고!”
박수를 치며 파이팅을 불어넣은 미네르바가 가르시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내기, 정말 안 할 거야? 차마 조국의 유망주에게 걸 수 없어서 못 하는 건 아니겠지?”
“타인의 고통을 두고 도박은 안 합니다.”
가르시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단순히 의견을 묻는 것이라면, 위고의 손을 들어 주고 싶군요.”
“호호호! 꼴에 자존심은 살아서.”
“……과연 그럴까요?”
오대성의 실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고는 평생을 가상의 미로와 싸우며 보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화신.’
영원한 승자가 없는 이유는, 후발 주자가 최고의 것을 분석하고 흡수할 수 있기 때문.
오늘은 위고의 노력이 결과를 맺는 날이었다.
“육체에 직접적인 공격은 금지. 오직 화신 간의 전투만으로 승부를 가릅니다.”
두 사람 수준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정신에 가해지는 충격이 상당할 터였다.
“알았어.”
시로네가 수열식을 전개하자 광천사의 화신이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하게 솟아올랐다.
위고의 사촌들이 눈을 크게 떴다.
“우아아아.”
시간기의 영향으로 풍경이 기괴하게 일렁거리자 멀미가 생길 지경이었다.
“멋지군요.”
이제는 이빨을 드러낸 위고가 노골적인 비웃음을 지으며 화신술을 펼쳤다.
“그럼 제 무기도 보여 드리죠.”
수열식을 전개하자 하얀 물감처럼 짙은 농도의 연기가 위고의 어깨를 타고 솟구쳤다.
“천상의 기사.”
광천사의 높이까지 솟아오른 연기가 백색의 갑옷으로 전신을 가린 기사로 변했다.
기동성에 치중한 듯 날렵한 형태였고, 갑옷의 표면은 마치 코팅을 한 것처럼 매끈했다.
여자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늘씬한 체형에 양손에는 길이 9미터의 세검을 쥐고 있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선명하다. 저걸 부수려면 상당한 위력이 필요하겠어.’
태어날 때부터 경지를 공부하는 스카이 가문에게 수열식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어떤가요? 천상의 기사라는 화신술입니다. 오대성과 맞서기에 부끄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화신의 대결이 용이하도록 시로네는 위고로부터 300미터 이상을 멀어졌다.
“……시작하자.”
끝까지 무시하는 태도에 위고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화신술을 전개했다.
“눈으로 좇지도 못할 겁니다!”
신장 20미터의 화신이 순식간에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했다.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