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04
“나에게 대업의 숙원이 없었다면…….”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지만 담담한 표정 속에 충격은 없어 보였다.
“너에게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
미로는 들을 수 없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네가 손을 내밀었다.
“설법, 갈喝.”
청색의 검이 튀어 나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한 줄기의 벼락이 되어 정수리를 강타했다.
잠시 전율하던 미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죽여라.”
체념의 말이 아닌, 실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녹초가 된 상태였다.
“간발의 차이였다.”
아주 작은 원인에 의해 극과 극으로 결과가 갈리는 것이 극상의 경지였다.
“어쩌면 뜻을 이룰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미로는 조소를 지었다.
“동정하는 거냐? 너도 신은 아니야.”
“그래.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인간에게서 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패배였다.
“티끌보다 더 작은 불순물. 왜 버리지 않았지? 무엇이 너를 인간에 붙잡아 두고 있는가?”
나네는 듣고 싶었다.
“죽여라.”
하지만 미로는 말할 생각이 없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설법, 살殺.”
12개의 붉은 검이 나네의 배후에서 튀어나오더니 미로를 향해 손톱처럼 휘어졌다.
“고통은 없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미로의 몸통을 꿰뚫을 것 같은 살기가 400미터 밖에 있는 세인에게도 전해졌다.
“안 돼. 지금 구출해야…….”
“이미 늦었어.”
천수관세음의 소멸 앞에서 슈라는 웃지 않았다.
“가장 부처에 가까웠던 자가 무릎을 꿇었다. 어느 누구도 부처의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어.”
세인이 몸을 날리는 순간이 나네의 설법이 미로의 몸에 꽂히는 순간.
“제길! 제길!”
결국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미로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유예시키는 게 전부였다.
나네는 기다리지 않았다.
“끝이다.”
12개의 검이 미로에게 쏘아졌다.
세인과 아리우스의 심장이 강력한 한 번의 박동을 준비하며 잔뜩 웅크리는 그때.
“포스메터리.”
찬란하게 빛나는 거대한 괴조가 미로를 휘감은 채로 하늘로 치솟았다.
미로가 다른 차원으로 사라지자 나네의 설법이 살의를 주체하지 못하고 스스로 몸을 폭파시켰다.
“줄루의 소환수?”
황급히 주위를 살핀 세인은 나네에게서 수십 미터 떨어진 자리로 이동한 미로를 발견했다.
“결국…… 쫓아온 거냐?”
줄루와 강난이 카이드라에 앉아 있고, 지상에서는 가올드가 미로를 들고 서 있었다.
“지금이다!”
세인과 아리우스가 카이드라 쪽으로 공간 이동을 시전하자 슈라도 혀를 차며 나네에게 날아갔다.
이상한 감각에 미로는 눈을 떴다.
‘뭐지?’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것과,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정보가 동시에 들어왔다.
“…….”
가올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런 젠장.”
가올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오랜만이다.”
재회의 인사는 그게 끝이었고, 가올드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네를 향했다.
“저게 부처인가? 확실히 애 좀 먹었겠군.”
미로는 이를 악물었다.
“내려놔. 여기에는 왜 온 거야? 이제 너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잖아.”
기진한 미로는 혼자서는 움직이는 것도 벅찼고 세인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가올드, 너…….”
“나중에. 나중에 하자.”
전과 다른 분위기에 세인은 입을 다물었다.
‘하긴, 당연한 일인가? 한 번으로도 끔찍한 지옥을 두 번이나 경험하고 돌아왔으니.’
가올드가 나네를 살피는 데에 여념이 없자 그제야 미로가 슬그머니 얼굴을 쳐다보았다.
‘많이 야위었구나.’
끝없는 전투로 단련되었던 근육들이 모조리 빠지고 남아 있는 것은 상처뿐일 터였다.
‘정말 최악의 재회야.’
두 번은 없다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이번에도 가올드에게 목숨을 빚지고 말았다.
‘미로 님.’
주인의 무사 생환을 기뻐하며 미로의 다리 옆에 웅크린 아리우스가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집니다.’
미로의 정신에 침투한 다이버.
아리우스는 완전무결에 가까운 그녀의 정신에 새겨진 유일한 트라우마를 알고 있었다.
‘미케아 가올드.’
차마 버릴 수 없는 이름.
“돌아가자. 일단 천국으로 가는 것은 막았으니 시온에서 차후 계획을…….”
가올드가 물었다.
“부처가 왜 미로를 죽이려고 하지?”
세인이 미간을 구겼다.
“대체 너는 아는 게 뭐야?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 없어. 미로를 무사히 대피시키는 데 협조해.”
“됐어.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
가올드가 나네에게 걸어갔다.
“이 멍청아! 지금 상황 파악이……!”
화를 낸다고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기에 세인이 분을 삼키며 강난에게 말했다.
“빨리 가서 데려와. 저러다 저 자식 진짜 죽어.”
줄루가 답했다.
“말릴 수 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요.”
“그러면 죽는 겁니다.”
줄루가 멀어지는 가올드의 등을 바라보았다.
“가올드에게 현실은 끔찍한 고통. 하지만 그는 지옥을 두 번이나 헤치면서 되돌아왔다요.”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가올드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우리는 모르지. 그래서 말릴 자격도 없는 것이다요.”
“시간을 벌어 줘.”
미로가 세인에게서 멀어지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정신이 회복될 거야. 내가 데리고 도망칠게. 그때까지만 가올드를 지켜 줘.”
그들에게 남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세인이 혀를 차며 나네를 향해 돌아섰다.
“쳇, 끝까지 귀찮게…….”
가올드를 지켜보던 나네가 눈을 빛냈다.
“슈라.”
“네.”
“떨어져라. 최대한 멀리.”
“네?”
되물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슈라가 자리를 떠난 뒤에도 나네는 가올드가 다가오기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구나.’
세상의 모든 아픔을 경험한 끝에 지옥에서 몸을 내주는 것으로 부처가 된 나네였다.
“고행자인가?”
가올드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로를 죽이려는 이유가 뭐야?”
“이 세상을 닫기 위해.”
“이 세상이 왜? 너한테 무슨 잘못이라도 했냐?”
“고통.”
검지를 세운 나네가 가올드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대야말로 이 세계를 이해하는 자. 이제 나와 함께 번뇌의 사슬을 끊는 것이 어떠한가?”
“이 세계를 이해한다고?”
성큼 발을 내디딘 가올드가 허리를 틀더니 풀스윙으로 나네의 얼굴을 후려쳤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 자식아!”
세인의 눈이 황당하게 치떠졌다.
“저 미친놈이……!”
나네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가올드는 눈을 뒤집어 까며 쿵쿵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서 도 좀 닦았냐? 부처면 부처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나불대는 거야?”
‘가올드다!’
예전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에 세인이 일행을 돌아보았다.
“시작이다! 모두 준비해!”
미로가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가올드의 에어 프레스가 대기를 짓누르자 마치 고무판처럼 땅이 상하로 흔들렸다.
“으아아아아아!”
열 손가락을 구부리고 괴성을 지르는 가올드의 두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저, 저건…….”
대기의 압력에 짓눌려 움직이지 못하는 나네의 모습에 강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대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거야?’
통각 1조 배.
두 번째로 지옥에서 돌아온 가올드의 역치는 전에 비해 훨씬 올라가 있었다.
‘이런 고통이라고?’
나네의 눈에 기이함이 담겼다.
‘그런데 어째서 죽지 않는가?’
줄루가 말했다.
“이미 죽었어야 정상이다요. 하지만 가올드는 죽지 않았어. 일단 그런 일이 생겨 버리면…….”
그냥 그런 일이 생겨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요.”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 가올드가 피눈물을 흘리며 나네에게 다가갔다.
“진짜 고통이 뭔지 말해 줄까?”
제정신이 아니었다.
“참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냥 당하는 거지.”
“설법, 파破.”
나네의 머리 위에 탄생한 빛의 검이 진동하면서 철근처럼 단단해진 대기를 흔들었다.
“안 돼! 빨리 가올드를……!”
미로가 소리치는 그때.
“좁은 육체에 갇혀서 한심하게 비명이나 질러 대는 게 전부인 거야. 그런데 너 따위가……”
고통을 견디지 못한 가올드가 괴성을 내지르더니 두 다리로 땅을 쿵쿵 짓밟았다.
“고통을 말해!”
통각 10조 배.
“아! 아! 아! 아! 아! 아! 아! 아!”
통각 100조 배.
“어리석은 중생이여!”
나네는 설법의 위력을 한계치까지 끌어 올렸다.
“내가 너의 고통을 지워 주리라!”
“으아아아아! 으아아아아!”
이미 의식은 날아갔고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아프다는 생각뿐이었다.
‘통각 천조 배! 만조 배! 억조 배! 빌어먹을!’
세상에 그딴 게 어디 있냐?
‘아무리 아프다고 지랄 발광을 해도…….’
그걸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끼겠냐고.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고, 그렇기에 모두에게 고통의 무게는 똑같다.
‘그래도 살아간다.’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라도 내일은 오늘보다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이를 악물고!’
끝까지 살아가고 싶은 게 삶이다.
“같잖은 고행 좀 해 봤다고…….”
오직 가올드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남의 고통을 운운해!”
통각 1경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