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inite Wizard RAW novel - chapter 707
“판돈은 충분하겠지?”
네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
카샨의 황성 아가노스.
자정 무렵에 기별을 받은 우오린은 꼭두새벽부터 넓은 황궁을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시로네가 온다!’
미네르바와 함께.
‘하필이면 그 여자가.’
잔뜩 상기되어 있던 우오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상관없지. 내가 얼마나 오래 이 시간을…….’
인간의 수명으로 할 수 있는 기다림이 아니었다.
‘드디어 만날 수 있어, 시로네를!’
비록 기억의 변화에 불과했지만, 기억의 당사자인 그녀에게는 물리적인 시간과 다를 게 없었다.
“간도!”
즉각 문이 열렸다.
“부르셨습니까.”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30초 전에 저를 부르지 않으셨다면 지금쯤 확인을 하고 있겠지요.”
시로네를 맞이하는 데 실수가 없는 한, 오늘만큼은 우오린이 화를 내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30초는 너무 야박한 거 아냐? 5분은 지났을 텐데.”
“제 걸음은 그렇게 느리지 않습니다.”
우레라는 별칭답게 200미터의 복도를 순식간에 건너뛰어 도착한 간도였다.
“아무튼 좋아.”
아무튼 좋다.
“화장을 해야겠다. 코디네이터를 불러 다오. 연하게만 할 거야. 입술은 조금 더 붉게…….”
간도는 걱정스러웠다.
“여황님은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굳이 무언가를 더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름다운 게 무슨 상관이야? 시로네가 마음에 들어야지. 코디나 불러 줘.”
“여황님.”
간도는 목숨을 걸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으신 겁니까? 저는 여황님이 이토록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우오린이 귀걸이를 바꾸며 말했다.
“……나도 알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시로네는 여황님의 딸을 위해 필요한 도구입니다. 시로네를 사랑하면…….”
그래, 여기서 죽자.
“당신은 다시 딸이 되어, 아비를 사랑할 것입니까?”
기어코 내뱉어 버린 간도는 우오린이 풍장을 부르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간도야.”
그녀가 부른 이름은 간도였다.
“그래, 네 말대로 테라제는 개인이 아니다. 역사지. 하지만 알잖니. 이제는 시로네도 그 역사와 함께 왔다.”
간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저를 죽이십시오! 죽이셔야 합니다, 여황님!’
테라제라는 거대한 역사가 우오린이라는 하나의 인간으로 정의되어 버릴 때, 카샨의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
“처음에는 생존이 목적이었지. 하지만 시로네가 내 기억의 시작을 차지한 순간부터, 나는 오늘만을 기다리며 역사를 지켜 온 것이야.”
간도가 악을 질렀다.
“죽여! 그냥 날 죽이란 말이……!”
“아들아.”
우오린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간도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들.
세상에 없는 단어라고 생각했기에 지금 당장은 어떤 느낌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카샨이 없이는 우오린도 없다.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고, 세상의 비난을 받을 것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우오린이 간도를 돌아보며 슬프게 웃었다.
“그냥 엄마를 응원해 주면 안 되겠니?”
맥이 탁 하고 풀리면서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친 간도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부여잡으며 말했다.
“저녁에나 도착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하십시오. 준비는 제가 차질 없이 진행시키겠습니다.”
“……고맙다.”
정숙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간도가 나가고 홀로 남은 방에서, 우오린은 화장대에 손을 올리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알아.”
밑사건을 기반으로 끝없이 과거를 분석해 가며 여황의 자리에 오른 테라제.
“그렇게 여기까지 왔지.”
역사만큼 길었던 플레이 타임에서 돌발적인 이벤트를 즐긴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한 번이면 족한 것이 삶인데.’
똑같은 사건, 똑같은 대사, 그 지루했던 플레이를 리셋의 횟수만큼 반복하며 버틴 이유는…….
‘나에게 남은 유일한 미지.’
테라제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이벤트를 위해서였다.
연쇄 작용 (3)
***
시온에 도착한 미로는 각 종파를 대표하는 수도사들 간의 회담을 열었다.
부처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악을 공격할 절호의 기회였고, 일 처리는 신속하고 전략적이어야 할 것이다.
기한 없는 전쟁의 첫발을 내딛는 자리였기에 시간이 제법 소요되었다.
그사이에 가올드 일행은 시온에 대한 설명을 들었고 아르민과 쿠안과도 재회했다.
“저자가 가올드인가?”
수도사들의 관심은 온통 가올드였다.
‘부처를 꺾은 인간.’
어차피 미로에게 들을 테지만, 아직 어린 동자들은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했다.
마음에 탁함이 없어 율법의 힘은 강해도 경지에 있어서는 배우는 중인 그들이었다.
“부처보다 높은 깨달음이 대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던 가올드였으나 계속해서 숫자가 불어나자 결국 걸음을 멈췄다.
‘시작한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화장실에 앉아서, 배에 잔뜩 힘을 주어라.”
가올드의 목소리가 들리자 토씨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수도사들이 귀를 기울였다.
“거기서 나오는 것이 깨달음이다.”
차갑게 몸을 돌린 가올드가 멀어지자 동자들은 저마다 고개를 갸웃하며 의견을 나누었다.
“이거, 상당히 어려운 선인데.”
민머리의 아이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흐음, 화장실에 앉아서 배에 잔뜩 힘을 주어라. 거기서 나오는 것이 깨달음이라…….”
그가 퍼뜩 고개를 들고 내뱉었다.
“똥?”
깨달음은 똥이다.
“아마도 이런 뜻 아닐까요? 깨달음을 똥처럼 하찮게 여겨라. 즉,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죠.”
어쨌거나 부처를 꺾은 자의 전언이었기에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해 보려는 그들이었다.
“그렇군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깨달음을 똥처럼 내보내라, 그러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아이들이 감탄했다.
“오오, 명군의 통찰이 탁월하군요. 과연…… 부처를 버려야 부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인가요?”
각 종파의 동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강난이 가올드에게 물었다.
“무슨 의도로 한 얘기예요?”
가올드가 귀찮다는 듯 내뱉었다.
“뭐긴 뭐야? 가서 똥이나 싸라는 얘기지.”
“아하하하!”
강난의 웃음소리가 차가운 하늘을 수놓았다.
“응? 왜 저러지?”
동자들이 동시에 강난을 돌아보자 시온의 중진에 속하는 리리아가 다가왔다.
“가올드 씨가 장난을 친 거예요.”
단테와 함께 오래된 성터에서 옵트러스를 봉인한 아케아니스 신단의 토테미스트였다.
“장난?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요?”
수도사들이 볼멘 표정을 지으며 가올드를 돌아보자 리리아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로 중요한 건, 여러분이 가올드 씨의 말로 깨달았다는 것이죠.”
“…….”
“깨달음은 거창하거나 멋진 게 아니에요.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무언가를 비로소 보게 되는 것이죠.”
갓 태어난 아이에게 호흡은 거대한 깨달음이다.
“가올드 씨는 이미 알고 있기에, 거짓을 말하든 진실을 말하든 상관이 없는 것이랍니다.”
결국 도道는 하나로 통한다.
“깨달음은 똥이다…….”
수도사들이 경외의 시선으로 가올드를 돌아보자 리리아는 자리를 피해 주었다.
‘세상에 큰 힘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온에 마련되어 있는 간이 사원으로 들어가는데 회담을 끝낸 미로가 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미로 씨.”
미로도 정중하게 인사를 받았다.
“네. 가올드는요?”
“조금 전에 숙소로 돌아갔어요. 강인한 분이시더군요. 앞으로 악의 힘이 더욱 약해지겠죠.”
미로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사실은…….”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미로가 리리아의 손을 잡아끌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
남에게 속마음을 드러낼 이유가 없는 미로지만 가올드의 문제만큼은 예외였다.
‘리리아 씨라면…….’
시온에 있는 대부분의 수도사들이 극선에 가까운 인물들이었기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의 남모를 사정을 들은 리리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죄책감을 느끼시나요?”
“모르겠어요. 이 문제만큼은 너무 복잡해서. 가올드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이런 것은 좀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연하죠.”
리리아는 단호했다.
“선이 악과 다른 이유는 비겁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미로 씨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로의 얼굴에서 어둠이 걷혔다.
“물론 이런 말도 제3자라서…….”
“아뇨, 지금 가올드를 만나러 가야겠어요.”
리리아가 웃으며 두 팔을 으쓱했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아무리 세상을 위해 싸운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하지 않고 어찌 인간이라 하겠는가?
“고마워요, 리리아 씨.”
미로가 자리를 떠나고 적막해진 테이블에서, 그녀는 다리를 꼬고 턱을 괴었다.
“하아, 나도 연애하고 싶다.”
평생 악만 쫓아다니느라 남자 한번 제대로 만나 보지 못한 그녀의 머릿속에 단테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나는 잊었겠지. 잘 살고 있으려나?’
“그래, 가는 거야. 직진이야.”
이미 결정을 내린 마당에 고민할 것은 없으나 가올드의 숙소로 걸어가는 미로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자신을 선택할지 세상을 선택할지 결정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선택하면…….’
우뚝 걸음이 멈춘 미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데 나, 엄청 이상하면 어떡하지?’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 감정대로 하면 된다지만, 그것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은 생애 처음이었다.
이런저런 시뮬레이션을 돌려 볼수록 짜증이 솟구친 미로가 다시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몰라! 불 끄면 되지 뭐!’
마침내 도착한 가올드의 숙소 앞에 강난과 줄루, 아르민과 세인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응? 무슨 일이야?”
“미로 씨.”
아르민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왜 여기에 모여 있어요? 가올드는?”
세인이 말했다.
“지금 떠난다고 한다. 짐을 챙기는 중이야.”
미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가는데?”
“전장.”
미로가 선택지를 제시하기도 전에, 이미 가올드는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당신 때문이야.”
강난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